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48화 (48/118)

48화

“최 이사, 요즘 얼굴 보기 통 어렵네?”

아침부터 듣기에는 썩 유쾌하지 못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을 보아 박 전무임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곧게 서 있던 최 이사가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자신보다 풍채가 두 배는 더 큰 박 전무가 능글스러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요즘 외부 미팅이 좀 많아서 자리를 오래 비웠습니다.”

“뭐, 최 이사만 바쁜가? 외부 미팅 많은 건 내 쪽도 마찬가지인걸?”

박 전무가 말하는 외부 미팅이라는 건 라운딩을 뜻한다. 물론 최 이사는 그 라운딩이 타 기업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을 위한 접대 자리였으리라는 건 안다. 알고 있지만 열받는 포인트는 박 전무가 접대를 받는 입장이라는 거였다.

딩동―!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고 박 전무가 먼저 앞서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정중앙에 우두커니 자리를 잡았다.

“안 타요?”

“탑니다.”

최 이사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외투 옷깃을 고쳐 맸다. 곁눈질로 살펴본 그의 입매는 온갖 말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 말들을 듣지 않아도 얼핏 알 것도 같았다. 그래, 분명 제 귀에 듣기 좋은 말들은 아닐 것이리라.

“소중한 인재를 잃을 뻔했는데 참 다행이야.”

그래, 역시나.

“근데 그 친구는 번 돈을 고스란히 기부하게 생겨서 어떻게?”

심사가 뒤틀릴 만한 얘기들을 일부러 늘어놓을 거라 예상했다. 그가 말하는 ‘친구’는 민현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약 3주 전 현승이 음원 성적을 걸고 ‘은퇴빵’을 제안했으며, 제이블은 그에 맞받아치듯 한 달이라는 기한을 잡고 ‘기부 내기’를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 둘은 1위 쟁탈 전쟁의 끝을 향하고 있었고, 아직 승기의 깃발이 제이블을 향해 펄럭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박 전무는 이미 현승의 패배를 확정지은 듯이 말을 이었다.

“발매 시기 맞춘다 했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지. 결국 무슨 은퇴빵이니, 뭐니 들쑤셔서 사달을 만드느냔 말이야. 이대로 지게 되면 결국 LS 엔터의 드높은 위상과 명성에도 누를 끼치는 꼴이잖아.”

그의 말들은 하나 같이 틀린 말은 없었지만,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최 이사로부터 그리고 현승으로부터 재차 쌓여 온 감정들이 못나게 자리 잡은 탓이었다.

“내가 그 친구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결국 그 친구도 이번 결과를 통해서 몸값도 떨어져, 신뢰도 떨어져… 뭐 하나 이득 볼 게 없잖아.”

최 이사는 대답 대신 뱀처럼 날름거리는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 혀를 보고 있노라니 상대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참아야지.

“그러니 말과 행동을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아직 젊어서 그런가? 근데 이 정도면 패기가 아니라 객기를 부린다는 말이 더 맞겠지.”

그렇지만 최 이사는 도를 넘어선 언행을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 유들유들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현승은 자신이 직접 키운 놈은 아니라지만 분명 자신의 라인이고, 제 사람이다. 그래, 최 이사는 제 사람을 건드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래도 도벽보단 객기 부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요?”

“뭐? 도벽? 내가 분명 말했지! 그건 다 우리 회사에 좀 더 좋은 방향성으로…!”

“누가 회사를 위해 개인의 기회와 권리를 뺏습니까? 그런 걸 도둑질이라고 하는 겁니다.”

박 전무는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닫아 버렸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에 곧 내릴 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대내외적으로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그였기에 더 언성을 높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박 전무님, 제발 회사 내에서는 체통을 위해서라도 서로 존댓말로 대화하시죠.”

최 이사는 단호한 일침을 가한 뒤 열린 문틈 사이로 빠져나와 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뒤에서 분명 “최 이사” 하며 고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더 상대했다간 지난 회의에서처럼 유치하게 저속한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단 생각이 스쳤기에 무시를 택했다.

“최 이사, 거기 서 보라고!”

복도 끝자락을 향할 때까지 들려오는 끈덕진 그의 목소리에 잠시 “꽈득” 하며 구두 굽을 멈춰 세운 찰나였다.

지이이이잉―!

바지 주머니 춤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박 전무 또한 안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전 임원진께 알립니다. 즉각 대표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

그건 대표 비서실로부터 온 문자였다.

* * *

“안녕하세요. 당일 맨 레코즈 대표이사인 타이치 님의 통역을 맡은 김수진입니다.”

각 잡힌 정장 차림의 여성이 LS 엔터 측 임원진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얼마나 바싹 머리를 묶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음에도 앞으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었다.

그 여성의 앞, 상석에는 전남일 대표가 그리고 우측으로는 타이치가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었다. 또한 대표를 중심으로 전무, 상무, 이사진들이 남은 빈자리를 꽉 채웠다.

장내에 모인 어떠한 이도 이런 그림이 그려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 전남일 또한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분명.

일전에 통화할 때 타이치가 현승을 직접 만나러 와도 되냐고 묻기는 했다만, 이토록 빠르게 국경을 넘어 날아오리라고는 전혀 짐작지 못했다.

“미리 양해도 구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찾아뵙는 실례를 범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놀라기야 했다지만 전남일 또한 국내에서 대기업에 해당하는 규모의 LS 엔터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그저 말랑말랑하게 다 맞추며 주도권을 내어 줄 인물이 아니다. 놀람은 감춘 채 지독하리만큼 평온한 투로 말했다.

$$

“그 부분은 괜찮습니다만, 미팅을 원하시는 HS 씨가 다소 늦어질 수 있는 점 널리 이해 부탁드립니다.”

통역사는 전남일의 말을 타이치에게 전달한 뒤 답변을 받아 통역했다.

“만나고 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합니다.”

전남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타이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정말 기다리는 일쯤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말간 눈을 한 채였다.

“흠.”

한편 대화의 내용을 듣고 있던 박 전무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이 가로챈 공문에 대해서 대표는 알고도 묵묵부답으로 경고를 보냈다. 하나 별 조치는 없었다. 왜 그럴까에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전남일 대표다운 처사였다고 짐작만 했다. 근데 오늘에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자신이 공문을 빼돌렸다 한들 어떠한 지장이나 영향조차 주지 않았던 거다. 그래,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거였다.

아무리 방해물이 있었다지만 맨 레코즈 아니, 타이치는 ‘HS’만을 원했고, 그를 위해서라면 번거로움도 감수할 수 있던 거다. 그러니 대표도 자신의 밥그릇 싸움도 못 본 척 넘겨 준 거다. 그리고 오늘도 일부러 부른 것일 터였다.

보아라, 네가 무엇을 망치려 했는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임원진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겠지. 물론 이번 계기로 맨 레코즈와의 관계를 잘 형성해 놓는다면 더욱 넓은 시장으로 입지를 넓힐 기회가 될 테지만, 타이치가 원한 건 ‘HS’와 협업이다.

그리고 그 협업의 실 결정권자는 오직 셋뿐이다. 두 대표, 그리고 당사자인 HS. 이렇게 온 임원이 비상 연락을 받고 곧장 모여들 만한 자리는 아니다. 그저 대표가 ‘HS’라는 인물을 자신이 얼마나 총애하는지 보여 주는 자리였다.

“안녕하십니까.”

때마침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현승이 문을 열고 장내로 들어섰다.

“HS…?”

별안간 타이치가 벌떡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랄까? 흡사 헤어진 이산가족을 몇십 년 만에 만나게 된 것마냥 현실감 없이 행복하다는 감정을 담은 채였다. 그래, 타이치는 그런 그윽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현승을 훑었다.

“음?”

반면 현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타이치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필 뿐이었다. 맨 레코즈의 대표가 자신을 콕 집어 공문을 보냈다는 사실도, 자신을 찾는 연락이 왔었다는 얘기도 전달받지 못한 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표 긴급회의라고만 전달을 받은 채 걸음 했을 뿐인데 지금 초면인 남자가 감동에 벅차오른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기시감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봤던 얼굴인 듯 묘하게 낯이 익숙했다. 그래,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저 사람은….

사카모토 타이치.

일본 맨 레코즈 본사의 대표이사직을 맡은 자였다.

“현승 씨를 만나 뵙고자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맨 레코즈사 대표 사카모토 타이치 상입니다. 와서 인사부터 하시죠.”

대표의 손짓을 따라 현승이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걸음에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맨 레코즈는 음악성으로는 독보적이나 그만큼 폐쇄적인 유통사였기에 전생에도 크게 접점이 없던 탓에 제아무리 현승이라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음원 유통사이다.

“먼 걸음 해 주셨는데 제가 너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작곡가 HS라고 합니다.”

일전에 전남일 대표에게 전화가 온 건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방문까지 한 걸 보면 분명 좋은 교류가 오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군다나 자신을 만나고자 기다렸다고 했으니 지금 이 만남은 맨 레코즈와 작업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셈이랄 수 있었다. 그래, 돌아온 김에 맨 레코즈를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닙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맨 레코즈 대표이사 타이치입니다.”

통역가를 통해 형식적인 인사말이었지만 둘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오가는 악수마저도 훈훈한 온기가 돌았다.

전남일은 타이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현승이 오기 전 비즈니스적인 태도와 표정을 품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인간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 유통 음원사의 대표이사가 타국의 어린 작곡가를 향해 이렇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대상이 현승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전남일은 다시금 시선을 현승에게로 옮겼다. 타이치를 앞에 두고도 기죽지 않고 당찬 미소를 머금은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 바로 협업 관련하여 얘기 나눠 볼까요?”

타이치와 현승의 호기로운 눈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전남일이 직접 나서서 흐름을 진행 시키기에 이르렀다.

“협업에 앞서 타이치 대표님께서 약소하지만 준비해 온 선물입니다. 급하게 일정을 빼면서 무리하게 방문한 것이다 보니 인원수 체크를 할 수가 없었던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통역사는 타이치와 눈빛을 공유한 뒤 곧장 챙겨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한눈에 척 보아도 가격대가 나가 보이는 일본 전통 사케가 열 병 남짓 들어 있었다.

박 전무는 그녀가 내민 쇼핑백보다 아직 손에 쥐고 있는 단 하나의 쇼핑백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저건 현승에게 전하고자 따로 준비한 선물일 게 분명했다. 대충 흘겨봐도 더 고급스러운 포장지가 보였다. 확실히 타이치가 현승에게 관심과 애정을 품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HS 씨를 위해 타이치 상이 준비한 선물입니다.”

역시나, 남은 쇼핑백 하나는 현승의 품에 안겼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일본에서 구하기조차 어렵기로 소문난 500만 원을 웃도는 사케였다.

타이치는 LS 엔터 측 사람들이 작곡가 ‘HS’에게만 자신이 특별한 애정을 품고, 제일 값비싼 선물을 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리라고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순전히 저 젊은 천재와의 비즈니스 때문이지, 다른 이들은 좋게 말해서 들러리다. 그저 나이 많은 원숭이, 말하는 감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 이건 교토의 전통 깊은 양조장에서 만든 사케 아닙니까?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나 좋은 사케를 선물로….”

박 전무가 사케 병을 든 채로 말을 이어 나가는 와중에도 타이치의 시선은 오직 현승에게만 고정된 채였다. 결국 박 전무는 말끝을 잇지 못한 채 뒷말을 삼켜 냈다.

그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은 밥만 해도 몇 트럭은 될 터였다. 임원이기 전에 단련된 직장인이었다.

괜스레 관심을 끄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저….”라든지, “듣고 계신 겁니까…?”라든지 하는 눈치 없는 발언들 따위를 할 짬이 아니다.

더군다나 타이치는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로 찍어 누르거나 휘두를 수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현승에게 질투를 느끼는 게 다였다.

구차하고, 추잡스러우며, 별 볼 일 없는 그런 질투.

“감사합니다. 혹시 오늘 찾아 주신 이유가….”

현승이 타이치의 맞은편에 앉으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호의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타이치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통역사에게 서류를 내밀며 내용을 전달했다.

“네, 본론만 얘기하자면 여러 형태의 비즈니스 제안을 받았고, 당신에게 제작 참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음원 소싱에 대한 계약서이며, 웬만한 조건은 다 맞출 수 있습니다.”

짐작했던 내용이다. 자신을 대한 태도에 호의와 절대적인 편애가 담겨 있었다. 고작 자신의 곡을 유통하겠다고 저렇게까지 나서진 않을 터.

그렇다면 음악 작업에 대한 협업 제안이리라 짐작했던 바였다. 현승은 서류를 받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일어와 한국어가 함께 기재된 서류는 기대 이상이었다.

마치 나는 너에게 애매한 단어로 현혹하지 않겠어-라고 얘기하는 듯 직관적이며 긍정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읽는 내내 흥미로운 침음이 흐를 만큼.

“음?”

전남일 대표는 그런 현승을 바라봤다. 사회초년생이다. 저 또래 작곡가들은 으레 LS 엔터의 계약서 앞에서도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룬 양 무릎을 꿇고 깍지를 낀 채 신을 찾곤 한다.

반면, 현승은 맨 레코즈의 협업 계약서 앞에서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고개만 천천히 끄덕여 대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수락하라는 말을 뱉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까?

“네, 우선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던 순간 현승이 유창하기 그지없는 일어로 답했다. 옆에 앉은 통역이 놀란 눈으로 현승을 바라봤다. 그동안 눈치 없이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민망해진 까닭이었다.

전남일 또한 눈매를 좁혔다. 일전에 현승 앞에서 타이치와 통화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모른 척 묻던 현승의 말간 얼굴이 여우 같다는 생각도 함께 스쳤다. 그래, 저 정도의 일어 실력이라면 대충 알아들었을 터였다.

“뭐, 모쪼록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뒤를 이은 현승의 말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으로 숨을 삼켰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 진짜 미친 거 아냐?”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타이치만은 예외였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전자기기 하나를 살 때도 꼼꼼히 검토해야 하는 게 계약서다. 하물며 제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비즈니스를 논하는 계약서를 단 한 번 훑어보고 오케이 했다면 도리어 걱정했을 거다.

대다수의 천재는 자신이 지닌 가치를 모른다. 흥정에는 젬병이라, 서커스단의 곰처럼 재주를 부리지만 돈은 그들을 부리는 대표들이 챙겨 가기 마련이지 않던가?

적어도 저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청년의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성싶었다. 제 가치를 아는 저 청년은 먼 미래에도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게 될 거다.

자신이 봤던 다른 천재들처럼 말이다.

“HS 씨는 제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네요. 꼭 함께 작업을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천천히 검토하시고 충분히 심사숙고하신 뒤 연락 부탁드립니다.”

타이치는 제 안 주머니에서 얼핏 봐도 수백만 원은 호가할 듯한 금장 케이스를 꺼내어 현승에게 명함을 건넸다. 워터마크 처리가 되어 있는 상앗빛 재질의 명함 위로는 품위 있게 두툼한 영문 폰트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다. 명함은 그 사람의 작은 포트폴리오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래, 이 명함은 깔끔하고 기품 있는 타이치 사카모토, 그 자체였다.

“개인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으니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현승은 명함을 받아 들며 짧고 명료하게 “예.” 하며 답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과거에서부터 이런 경험을 답습하여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여느 기업의 대표가 개인 연락처가 담긴 비밀 명함을 내민다는 건 그 사람을 깊게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맨 레코즈의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의 비밀 명함이라니.

작고, 얇은 종이 한 장이다. 그러나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종이 한 장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떤 가치를 지녔을지 모르나, 자신처럼 가치가 확실한 이에게 주어진다면 억만금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억만금이 손에 쥐어진 셈이었다.

“본론도 끝이 났고, 더 이상 일 얘기로 귀찮게 해 드리고 싶진 않은데,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아쉽고….”

그러고는 마치 장내의 다른 임원진을 포함하여 통역사까지 투명 인간 취급하듯 둘은 일어로 사적인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혹시 HS 씨, 일정 괜찮으시다면 함께 점심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그럼 잘 아는 한정식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벌써 기대되는걸요? 사실 저는 한식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현승은 본인이 뜻했든 뜻하지 않았든 아주 자연스레 제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물살마저 바꾸는 사람이다.

그렇게 점점 능력을 지닌 인물이나 높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과 얽히며 더 높은 곳을 향해 간다.

“그럼 이만 일어나실까요?”

그래, 지금 현승의 손안에는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는 선택지 하나가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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