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59화 (59/118)

59화

“네, 그럼 수술 일자 전까지는 낼 테니 모쪼록 필요한 치료는 다 제일 좋은 걸로 진행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선 김 실장의 발걸음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연기처럼 착 가라앉았다.

지이이잉-!

그때 바지춤에 넣어 놨던 휴대폰이 거세게 진동했다.

[ 집주인입니다. 이번 주까지는 재계약할 건지 확답 주세요. ]

젠장, 하필 이 타이밍에 전세 계약 만기일이 도래하고 있다. 하물며 주변 시세에 따라 보증금이 오천만 원이나 인상된 채로 말이다. 왜 항상 안 좋은 일은 엎친 곳에 덮치듯 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곱씹다 보니 벽을 향해 휴대폰을 집어 던져 버리고 싶었다.

아니, 안 될 일이지.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이후로 악착같이 축적해 온 모든 인연과 데이터가 담긴 휴대폰이자 금전으로 환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물건인 셈이다. 그래, 자신에게 있어서 휴대폰 없이 일한다는 건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 총알을 두고 나가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니까.

터벅, 터벅-.

누가 자기 발목에 족쇄라도 채운 것처럼 내딛는 걸음이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억지로 발을 이끌어 병원을 빠져나왔다. 숨통이 트이고, 걸음이 느슨해진다.

“후….”

한동안은 잘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물고, 착잡한 심경을 담은 연기를 토해 냈다.

그래, 언젠가는 하려던 이직이다.

마이 안 주머니 깊은 곳에 넣어 두었던 김우석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명함이 꾸깃꾸깃해져 버린 채였다. 며칠 밤을 명함을 부여잡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사내이사. 김우석 」

그의 명함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고급스럽게 각인된 ‘사내이사’라는 글씨 뒤에 적힌 이름이 김우석이 아니라 김우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직하게 되면 본부장으로 시작하게 될 테니까.

결론적으로 ‘임원’이라는 결승선에 남들보다 한 걸음 더 가까이 출발하게 되는 거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 업계에서 이직이란 비일비재한 일이고,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게 당연한 거다.

이젠 결단해야 할 때이다.

열의 혹은 도의라는 책임감을 명분으로 버텨 냈던 건 ‘청춘’이라는 이름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이윽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문자를 전송했다.

[ 이직 제안 주신 점 관련하여 만나 뵙고 답변드리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으신가요? ]

* * *

드디어 동물의 섬 OST 발매 시기가 잡혔다. 그에 따라 A&R 팀도 막바지 작업에 돌입한 채였다.

“난 6번 테마곡이 진짜 말도 안 되게 잘 뽑힌 것 같아.”

“그래도 오프닝 곡이 제일 좋지 않나? 곡의 전개도 확실하고.”

“사실 곡이 다 좋으니, 그냥 개인 취향 차이 아니겠냐? .”

“맞지. 근데 대체 15곡을 언제 다 작업하냐? 침대 보고 싶다.”

“방금 나 음절 하나 볼륨 조절 잘 못 해서 혼난 거 못 봤냐.”

“그래, 너도 맘 접고 미리 집에다가 못 들어간다고 연락해놔.”

소속 엔지니어들은 어떨 때는 현승의 곡에 감탄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덧없는 원망도 해 가면서 사정없이 몰아치는 지시사항에 따라 마스터링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근데 진짜 진짜 대박이긴 하다, 와….”

“그치, 15곡이 하나같이 다 좋기도 힘든데 그걸 해냈다는 게.”

“아무래도 괴물이 맞아. 아니고서야 이게 가능한 일이냐?”

결국 그 끝은 현승의 칭찬으로 이어졌다. 작업하다 말고 디테일한 곡의 짜임새나 말도 안 되게 좋은 변주들에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기도 하고, 넋을 놓은 채 감탄사를 늘어놓기도 했다.

“잡담할 시간이 있어?”

그때 한 팀장이 커피를 양손 가득 들고 엔지니어실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 둘이 작업하다가 하나가 죽어 나가도 모를 정도로 작업량이 많다고 들었는데?”

엔지니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커피를 받아 들며 투덜거리는 투로 답했다.

“팀장님, 사실 이미 제 머리는 죽었는데 이 심장과 감각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거뿐이에요.”

“맞아요. 지금 저희 걸어 다니는 시체나 다름없어요. 곡이 좋으니까 반응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그들의 투덜거림에는 곡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좋은 음악을 사랑하고, 그 음악을 더욱 좋아지게끔 가다듬는 재미를 쫓아 엔지니어가 된 이들이다.

만약 현승의 곡에 대한 애정이 없고, 곡의 퀄이 좋지 않았다면 이런 무리한 작업량을 다 수용하고자 잠도, 샤워도, 식사도 포기한 채로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 현승 씨가 만든 곡이니 당연히 좋겠지.”

적어도 ‘컨트롤타워’라 불리는 A&R의 소속 직원이라면 현승에 대한 각기 다른 크기의 애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한 팀장도 포함이었다. 그래,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그의 곡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가 선보인 모든 곡이 좋았지 않은가? 처음 장난식으로 보내온 매절곡부터, 서지니, 정아린, 공효주 그리고 개인 앨범까지 모두 좋았고 그에 응당한 성과로 돌아왔다.

더불어 로컬라이징으로 일본에서 발매된 현승의 개인 앨범 곡들이 천천히 입소문을 타며 일본 오리콘 차트 50위 안팎까지 올라섰다. 이제 오리콘 1위도 멀지 않았다는 기사가 한·일 구분 없이 쏟아지는 걸 보면 모두 그의 성공을 믿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어? 메일이 새로 들어와 있는데?”

그때 커피를 쪽쪽 빨며 메일함을 확인하던 엔지니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15곡 다 받지 않았어?”

“테마곡 추가한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현승 씨라면 설마가 사실이 될지도.”

모두가 컴퓨터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 서려 있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첨부된 파일은 딱 하나, 음원 파일이었다.

“벚꽃 한 줌…?”

혼잣말처럼 파일명을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지이이이잉-!

[ HS : 방금 보낸 음원은 현 작업 다 끝나고 진행 요망. ]

현승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한 엔지니어 하나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잠깐만… 결국 이 작업이 끝나고도 연이어 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 아닌가? 이런, 악마 같은 놈.

“결국 저희 쉬지 말고 일하라는 뜻 같죠?”

“응, 월급 값하라는 거 같지?”

“어휴, 뭐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죠.”

“어차피 깔 거 지금 들어볼까?”

“이미 파일 저장했어요. 바로 들어보죠.”

당장 테마곡 OST 마스터링 작업만으로 벅차긴 하지만, 눈앞에 유명 쉐프가 만든 음식이 식탁보에 덮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 심리라는 게 당연히 열어서 무슨 음식인지 확인하고 맛보고 싶지 않겠는가?

딸칵.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곧장 새로 온 메일함의 음원을 재생시켰다.

이윽고.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마음이 일렁인다. 달큼한 봄이다. 그래, 곡의 제목처럼 벚꽃 한 줌을 쥐어 흩뿌리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테마곡처럼 수많은 악기를 활용하여 화려하진 않아도 곡이 주는 분위기 자체가 화사하다. 말 그대로 봄의 형상이 그려졌다.

“와….”

곡이 끝난 다음에는 탄식 같은 감탄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구석에서 “괴물….”이라고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모두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이 사람 괴물 맞는 것 같아.”

“내가 괴물이라고 했지?”

“우선 사람이 아닌 건 확신할 수 있어.”

모두 바람 빠지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곡이 너무 좋아서도 맞지만, 이런 곡을 테마곡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이젠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까닭이었다.

“홀로 작업실에 박혀서 묵언수행 중인가 했더니, 말도 안 되는 퀄리티의 테마곡을 15곡이나 작업하면서 동시에 이런 비장의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고?”

그 말을 듣던 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들은 ‘벚꽃 한 줌’은 그냥 녹음 진행만 해서 바로 봄 시즌에 맞춰 발매해도 될 정도의 곡이었다. 아니, 당연히 발매해야지. 이런 곡을 썩힐 수야 없지. 얼른 서둘러서 녹음하고 봄 시즌에 맞춰야 하는데….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아?”

한 팀장은 급한 마음에 현승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 그럼 이만 가 볼게.”

그는 곧장 엔지니어 실을 나서서 다급하게 발을 굴러 현승의 작업실로 향했다. 잠겨 있는 작업실의 문을 두들기고 전화를 걸어보지만, 응답이 없었다.

“아니, 대체 이렇게 좋은 곡을 만들어 놓고 어디 간 거야?”

.

.

.

한편, 그 시각.

“영감님, 부동산 계약 관련해서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승은 ‘벚꽃 한 줌’까지 작업을 모두 끝 맞춘 뒤 이두석의 집을 찾았다. 앞서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도움받은 일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아니야, 나 또한 도와준 덕분에 자네와 대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나.”

이두석이 흑 돌을 착수하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혹시 앞으로도 남을 위해 그 정도의 호의를 베풀며 살 건가?”

그리고는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그렇게 말랑한 심성을 지닌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현승은 쥐었던 백 돌을 내려놓으며 상념에 잠겼다. 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남 일에 관심을 두고 살필 만큼 넓은 시야와 아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다만.

이 대화에서 이두석이 말하는 ‘남’이라 하면 김 실장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당연히 아니죠. 왜 제가 땀 흘려 번 돈을 남한테 퍼 주겠어요?”

“얼씨구? 그럼 그 양반은 뭐 피가 섞인 가족이라도 되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지금은 제가 아쉬운 입장이라 그렇습니다.”

제 말을 끝낸 현승이 백 돌을 착수하며 이두석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은색 테 안경에 가려진 눈매가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또한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읽기 어렵겠지만.

“그래, 보통 아쉬운 사람이 손해를 보기 마련이지. 그렇지만 사람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 정도면 꽤 많이 쓴 것 같은데, 이걸로도 못 삽니까?”

“사람 마음은 구멍 난 독 같아서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지. 언제까지고 부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승은 제 손에 가득 쥔 백 돌을 모두 착수할 때까지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탁, 탁, 탁-.

그렇게 바둑판이 백 돌과 흑 돌로 빼곡하게 채워진 찰나였다.

탁-.

현승이 무서운 기세로 마지막 백 돌을 바둑판 위로 착수하는 순간, 대국의 결과가 결정되었다.

“이런, 또 당했군. 자네 머릿속을 좀 어지럽히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줄 알았더니.”

“에이, 그런 요령이나 꼼수로는 저를 절대 이기실 수 없습니다. 어림도 없죠.”

“그런가? 그럼 다음번에는 꼭 실력으로 이겨 줄 테니 긴장하고 오게나.”

작게 “예.”하고 답한 현승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할 말이 떠올랐는지 “아”하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영감님 말씀대로, 제가 호의를 베푼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돈으로 사람 마음을 사기는커녕 오히려 얄궂은 일만 넘쳐나겠죠.”

기보를 살피던 이두석은 그대로 시선을 고정한 채 “쯧”하며 혀를 찼다.

“그러니까 아는 놈이 왜 구태여 그런 손해를 보면서….”

현승은 구시렁거리는 듯한 그의 말을 자르며 부연했다.

“세상도 안 바뀌고 그 사람 마음도 못 살지언정, 최소한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은 조금이나마 살 만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윽고.

방을 나서며 인사를 전했다.

“저 정말 갑니다, 영감님.”

이두석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내 저었다.

“녀석도 참….”

그리고는 머지않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쪼록.

저 천둥벌거숭이 같던 녀석이 드디어 주변을 살필 줄 알게 된 모양이었다.

* * *

김 실장은 원무과를 찾았다. 당장 가진 모든 돈을 털었지만, 비급여 항목의 항암 치료와 입원비 그리고 수술비용을 감당하기란 너무 버거웠다.

“저기, 죄송하지만….”

당장 수중에 가진 돈을 모두 끌어왔지만, 그마저도 수술비를 감당할 정도여서 곧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 또한 손해를 보고 깨러 갈 예정이다.

“우선 김혜자 환자 수술비라도 먼저 납부할게요.”

김 실장은 이천만 원가량의 수술비를 내면서도 죄인처럼 어깨를 말고 눈치를 살폈다. 참 병원비 앞에서는 이상하게 작아진다. 혹여나 필요한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게 된다.

“나머지는 제가 일주일 안으로….”

구차한 말들을 구구절절 이어 나가던 찰나였다.

“김혜자 환자 체납된 입원비나 치료 및 수술비는 전액 다 납부되셨어요.”

김 실장은 제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예? 그럴 리가요? 다시 확인해 보세요.”

“어제 다른 보호자 분이 와서 다 납부하고 가셨는걸요?”

“대체 누가요? 보호자는 저 하나뿐인데….”

“안 그래도 처음 보는 분이라서 성함을 여쭤 보긴 했는데….”

간호사가 “잠시만요.”하고는 차트를 열었다.

이윽고.

“아, 맞다!”

불현듯 떠올랐는지 짧게 박수를 한 번 치고는 입술을 열었다.

“그냥 키다리 아저씨라고만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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