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김혜자 환자 체납된 입원비나 치료 및 수술비는 전액 다 납부되셨어요.”
아니 대체 누가.
“그냥 키다리 아저씨라고만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제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신 납부를 해 준 것일까?
김 실장은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기며 고민에 빠져 들었다.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누가 그런 거금을 선뜻 대신 납부해 주고 갔을까? 달랑 키다리 아저씨라는 수수께끼만을 남긴 채 말이다.
설마… 김우석? 그래, 그 사람이라면 이런 정보 하나쯤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긴 할 터였다. 저번에 보니 확실한 자신의 편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호의는 충분히 부릴 수 있어 보이기도 했고.
다만.
그랬으면 벌써 생색을 부리고도 남았을 텐데 왜 잠잠하지? 아니면 최 이사님인가? 맞지, 자신의 이런 사정을 자세히 아는 건 그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제 추측일 뿐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에 계속 물음표만 연달아 떠오를 뿐….
확실한 답안 없이 움직이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래,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내일이 현승의 새 프로젝트인 ‘동물의 섬’ OST 앨범 발매일이다.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지. 현승의 시작을 도왔으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유종지미를 거두어 내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우선이었다.
터벅, 터벅-.
목적지가 향해진 발걸음에 속력이 붙었다. 이제 현승의 작업실은 눈감고 갈 수 있을 지경이다. 이렇게까지 개인 작곡가 작업실을 화장실 가는 것마냥 습관처럼 드나들기도 처음이다.
“음?”
작업실 문 앞에 도착한 김 실장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틈 사이로 기분 좋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현승아, 잘 있었냐.”
“아, 오셨어요.”
“방금 곡 뭐야? 동물의 섬 테마곡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뭐 봄에 맞춰서 준비해 본 거죠.”
고개를 돌려 제 존재를 확인한 현승이 재생 중이던 음원을 종료시켰다. 현승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해 보였지만, 얼핏 들어도 흘러나오던 곡은 꽤 완성도가 높아 보였다.
“이번 봄을 강타할 시즌곡 또 준비하는 거야?”
“예, 뭐.”
“듣기만 해도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곡이던데?”
현승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렇다면 다행이네요.”하고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이 녀석, 프로젝트로도 바쁠 텐데 이런 명곡을 준비하느냐고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구나?”
“실장님도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요?”
“나야 네 뒤치다꺼리하느냐고 매번 바쁘지. 아무튼 작업도 좋지만, 머리 이발도 좀 하고 그래라.”
김 실장은 현승의 옆으로 다가가 머리를 헤집듯이 쓸어 넘겼다.
“아, 나름 머리 정돈해놓은 건데 왜 망가트리고 그래요.”
“얼씨구? 원래 까치집이더만, 뭘.”
“혼돈 속의 질서라는 말 모르세요? 다 계산된 세팅이에요.”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서로 어색함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이 나오는 이 분위기가 안락했다.
그래, 현승이 준비한 신곡까지는 함께 도와주고 가야겠다. 거기까지는 해 주고 가야겠다. 최선을 다하여,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럴 수 있는 놈이지만….
“음? 이건 또 뭐야?”
그런 생각들에 잠겨 있던 중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서류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이거 아무리 봐도 부동산 매매 계약서 같은데?”
“예, 아파트 하나 새로 매매했죠.”
“전세 얻은 지 반년도 안 돼서 자가로 가는 거야?”
현승이 대강 “예, 그렇죠.” 하며 흐트러져 있던 서류를 정돈하여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래, 이제 현승에게 저 정도는 일도 아닐 거다. 계속 꾸준히 들어오는 정산금과 더불어 맨 레코즈와 협업을 통한 계약금까지….
아파트 한 채만 매매한 거라면 겸손하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할 정도의 수입이 생겨났을 터였다.
“이야, 진짜 일 년 만에 이뤄 낸 성과가 이 정도라니. 내가 다 뿌듯하다.”
“이 정도도 늦은 거죠, 뭐.”
“하기야 네가 안정적인 길만 택했어도 더 폭발적인 성과로 돌아왔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재미는 있었잖아요?”
“그놈의 재미는, 그 재미 때문에 맨날 내 심장만 쫄깃했지.”
서로 마주 본 채로 키득거리던 찰나였다.
자가(自家)
그 두 글자가 마음을 또 무겁게 짓눌러 온다. 보잘것없는 부러움이란 감정이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 자신도 사람인지라 부러울 수밖에 없는 거겠지.
대체 난 언제쯤 자가를 살 수 있으려나.
그래, 지금은 그런 막연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제 할 일에 집중해야 할 때다.
“난 이만 간다.”
“벌써요?”
“자정에 네 OST 발매 되잖냐.”
“근데요?”
“근데요라니, 인마.”
김 실장은 씩 웃으며 말아 쥔 주먹을 뻗어 보였다.
“잘해 달라고 홍보실 가서 닦달해야지.”
그에 맞춰 현승도 제 주먹을 뻗어 가볍게 툭 맞부딪혔다.
“감사해요.”
“당연히 할 일이지.”
그래, 자신이 현승을 위해 당연히 할 일이었다.
* * *
동물의 섬 OST가 발매된 지 3일 차가 되었다. 사실상 LS 엔터의 가수 앨범이 아니었기에 사 측 전체가 주목하는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현승과 가까운 관계자들에게만큼은 빅 이벤트였다.
김 실장은 발매일부터 매일같이 현승의 작업실을 들러서 곡에 대한 반응을 전달해 주었다. 오늘 또한 예외 없이 오전 업무를 끝내자마자 자료를 한가득 챙겨 현승의 작업실을 찾았다.
“정식적으로 발매하는 대중 음원이 아니라서 정확한 지표나 성과를 바로 확인할 수는 없는데, 유저들 사이에서 반응은 꽤 좋은 모양이더라고.”
그리고는 자료를 훑어보다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 정도면 게임 삽입곡으로서는 좋은 시작이랄 수 있지.”
“그 정도면 됐죠, 뭐. 유저들 들으라고 만든 곡인데.”
“앞으로 더 잘 되겠지. 그런 의미로 구내식당이나 갈까?”
그 물음에 현승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기분도 좋은데 외식이나 할까요?”
“네가 쏘려고?”
“무슨 소리예요? 더치페이해야죠.”
김 실장은 짐짓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혀를 끌었다.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해.”
그러나 입가에 담긴 미소를 보아 간만에 현승과 외식할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
.
.
“현승아, 설마 여기가 저번에 네가 매매했다는 아파트야?”
김 실장은 높게 솟아 있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우러러 보며 물었다.
“예, 맞아요. 같이 구경이나 좀 하자고요.”
“외식은 핑계고, 자랑하려고 데려왔지?”
“예, 보고 배 좀 아프시라고 데려왔어요.”
그 말에 “허?”하는 헛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금 시선을 아파트를 향해 옮겼다. 서울의 노른자 위치에 우뚝 솟은 주상복합 아파트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아팠다.
현승을 따라 아파트 내부로 들어설 때도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알려 주듯 공기 자체에 이질감이 들었다. 그리고 도달한 어느 집의 도어락을 여는 순간까지도 낯선 새 아파트의 향이 코를 찔렀다.
“와….”
자연스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매끄럽게 뻗은 현관과 통유리 창의 중문을 통해 보이는 거실이 마치 세트장에서나 마주했던 집의 풍경 같았다.
“좋죠?”
먼저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현승이 물었다.
“한눈에 척 봐도 좋아 보이네.”
“들어와서 좀 구석구석 봐요.”
“됐어,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현승은 그의 팔을 잡아 이끌며 계속 채근했다.
“에이, 같이 좀 봐줘요.”
이내 못 이기는 척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김 실장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이 방, 저 방을 둘러보고 다녔다. 속으로는 자신이라면 방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상상까지 다 맞춘 뒤에야 다시금 거실로 돌아와 발코니 너머의 풍경을 확인했다.
“현승아, 저-기, 저거 한강 아니냐?”
“예, 시내 쪽이라 한강이 가깝지는 않은데 보이긴 하더라고요.”
“이야, 진짜 대박이네.”
발코니 가까이 걸음을 옮겨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자신이 몸담은 회사도,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도 보였다. 서울의 중심부인 만큼 인접성까지 훌륭했다.
“살고 싶죠?”
그때 넌지시 옆으로 다가온 현승이 물었다.
“뭐, 당연한 걸 묻냐. 누구라도 이런 집 살고 싶어 하지.”
“그럼, 여기 사실래요?”
그리고는 계속 품에 끌어안고 있던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야, 됐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농담 아닌데요?”
“뭐? 농담이 아니라면 더 큰 일이지, 인마!”
김 실장은 서류를 보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이 바닥이 어떤 곳인데 그렇게 말랑하게 굴면 온갖 하이에나가 다 달라붙어서 골수까지 빼먹으려고 들 거야.”
그리고는 그렇게 안 봤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는 잔소리까지 보태어 거절 의사를 밝혔다.
“김 실장님이 하이에나처럼 제 골수까지 빼먹으려고 달려드실 분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이런 집이면 이자만 해도 한 달에 웬만한 회사원 월급 가까이 될 것 같은데.”
“이자는 대출 끼고 매매한 사람들이나 내는 거고요. 저는 세금만 따박따박 잘 내면 되거든요.”
“오늘따라 이놈이 왜 이럴까? 가까운 관계일수록 금전적인 부분은 더 철저해야 하는 거 몰라?”
현승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요, 당연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철저해야죠.”
“그래, 근데 그걸 아는 놈이 어떻게 이런 집을….”
“그런 의미로 저랑 월세 계약서 한 장 쓰시죠, 임차인님.”
김 실장이 “월세?”라며 되묻고는 다시 한번 서류를 바라봤다. 정말 서류 상단에 ‘부동산 월세 계약서’라는 글씨가 보였다.
“얼씨구? 나를 상대로 월세 장사를 하시겠다?”
“방금 실장님도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철저히 하시라고….”
지레짐작하고 김칫국을 마셨던 사실이 다소 창피해졌다. 맞다, 이 정도의 집을 어디 뭐 공짜로 내어 줄 사람이 어딨겠는가? 설령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돈이 아쉽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말이다.
다만 김 실장은 밀려오는 머쓱함에 괜스레 이죽거리는 어투로 얘기했다.
“짜다, 짜. 아주 있는 놈들이 더 하지 아주? 월급쟁이가 이런 집 월세를 어떻게 감당하냐?”
“그럼 얼마인지 서류를 한번 제대로 보고 결정하시죠. 그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나름….”
현승이 다시금 서류를 내밀며 말을 잇던 찰나였다.
지이이이이잉-.
울리는 진동 소리에 휴대폰을 꺼내어 드니 집주인으로부터 재촉 문자가 와 있었다.
[ 전세 재계약하시는 건가요? 확실히 말씀을 해주셔야 저희도 다음 입주자를 구하든지 말든지 하죠! 보시면 연락주세요. ]
지금은 당장 답할 수가 없었다. 수술비는 남을 통해 해결됐다고 하더라도 당장 오천만 원이라는 현금이 수중에 없던 탓이다. 문자를 보고 나니 이 집이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제 현실에는 맞지 않는 집이다.
“아무튼 난 필요 없으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고.”
이윽고.
“우리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김 실장은 집을 나서자며 재촉했지만, 현승은 되려 꿈쩍도 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저랑 월세 계약하시죠.”
그런 현승을 바라보던 김 실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전세면 몰라도 월세는 그냥 땅바닥에 버려지는 돈인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냐.”
“아까 문자 슬쩍 보니까 전세 재계약하실 때도 된 것 같던데 그냥 저랑 계약하시죠.”
“부동산에 얘기해서 다른 임차인 알아봐라. 나는 월세는 절대 안 살 거야.”
그 말에 현승이 다시금 고집스럽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진짜 이 집도 거의 반전세로 해 드린다니까요?”
“어이구? 하여간 짜다, 짜.”
“짠지, 단지는 한번 보고 결정해 보시면 되잖아요.”
김 실장은 투덜거리는 투로 “그래, 어디 한번 얼마인지 보기라도 하자.”라며 제 앞까지 들이민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어?”
계약서를 살피던 김 실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현승아, 이거 월세 금액란에 0이 하나 빠진 것 같은데?”
“아닌데요? 일, 십, 백, 천, 만, 십만… 맞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집 월세가 십만 원일 리가 없잖아.”
사실상 이 정도의 집 규모라면 웬만한 전세 급 보증금을 깔고도 백만 원 단위의 월세가 통상적일 터였다. 그러나 지금 계약서상 이 집은 보증금 오천만 원에 월세 십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매물이 되어 있었다.
“설마 나 때문에 일부러 이런 월세 계약서를 만들어 온 거야?”
“그래서 제가 보고 선택하라고 했잖아요.”
“정말 고맙지만 이건 네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라 안 되겠다.”
누가 보면 장난 혹은 사기라고 생각할 만큼 터무니없는 액수가 기재된 계약서였다. 만약 이게 실제 매물이라면 번호표 뽑고 대기해서라도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서울 한 바퀴를 돌 정도 될 거다.
“제 계약서 살필 때는 누구보다 깐깐한 시어머니처럼 따지고 보는 놈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들고 왔어?”
“어차피 투자용으로 사 놓은 거고 당장 다른 이한테 월세 받는다 해서 재정에 크게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 괜찮아요.”
맞는 말이었다. 현승에게는 매달 쏟아지듯 들어오는 저작권료가 있기에 까짓거 돈 백만 원의 월세가 크게 아쉬운 금액은 아닐 터였다. 그래, 그렇게 합리화시키며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고 흔쾌히 받아들일까 생각도 들었다.
“맞는 말인데 좀 재수는 없네….”
다만.
자신이 이 정도의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도움보단 자신의 선택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선 놈이다. 그러니 제 분수에 맞지 않는 특혜를 명분도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튼 이건 너무 불공정 거래라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하자 현승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한참 열리지 않던 입술이 들썩거리는 걸 보아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음….”
대답 대신 현승의 목울대를 타고, 깊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 손해가….”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물음을 건네 왔다.
“사실 제 미래를 위해 보는 손해라면요? 결국 그럼 투자가 되는 거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쉽게 얘기하자면, 여기서 살면 회사하고 더 가까워지니까 저를 보다 더 케어해 주십사 부탁드리는 거죠.”
“그 말인즉슨, 매일 먹거리 들고 작업실로 오라는 말 아니냐?”
“이런, 들켰네요.”
김 실장은 익살스럽게 웃는 현승을 바라보다 같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보였다.
이윽고.
웃음기가 사라진 현승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저도 김 실장님도 각자 조금씩 손해 보는 걸로 치고, 제가 먼저 둥지를 옮길 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서 지내시는 걸로 하죠.”
일순 김 실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제 시야 안에서 계약서와 현승의 얼굴이 교차하고,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직 사실에 대해 아직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지금의 분위기와 현승이 지어 보이는 표정, 자신을 잡는 듯한 어조가 이직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잠시, 잠시만 그럼 혹시 병원비도….
“혹시 너냐?”
“뭐가요?”
“키다리 아저씨.”
현승이 제 사정을 알 리는 없지만, 그 정도의 호의를 베풀 사람이라면 한정적이다. 지금 현승이 제게 보여 준 호의를 보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애매한 대답을 남긴 채 어깨를 들썩이는 현승을 보니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남을 위해 착한 거짓말조차 해 본 적 없는 녀석이 아닌 척하려니 어색한 표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럼 이제 슬슬 밥 먹으러 갈까요?”
그래, 일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지고 볶으며 지내다 보니 이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차에 시동 걸어 놓을 테니까 집 좀 더 둘러보고 계약서 챙겨서 천천히 나오세요.”
지금처럼 어색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것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휴….”
김 실장은 먼저 앞서 집을 나서는 현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러니 내가 널 두고 가긴 어딜 가냐….”
그래.
그의 굳은 결심이 무너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