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우리 사이에 이리 야박하게 굴 건가?”
문범재는 아침부터 작업실을 찾아와 현승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예?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요?”
“음악으로서 하나가 된 사이지?”
“예? 제가 왜 선생님과 하나입니까?”
현승이 다급히 헤드셋을 집어 들며 되물었다. 사실 대답을 원하고 되물은 건 아니다. 그저 작업해야 하니 얼른 가 달라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우리 함께 밤을 지새우던 그 날의 추억을 잊었나?”
“선생님, 이 발언 남이 들으면 오해합니다.”
그러나 문범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현승을 잡고 늘어질 따름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콘서트에서 부를 음원들을 살짝 편곡해 주는 게, 자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나?”
조만간 진행하게 될 자신의 전국 투어 콘서트에서 부를 음원들의 편곡을 봐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 정도 편곡은 다른 엔지니어한테 부탁하셔도 되잖아요?”
“내 콘서트 티켓팅이 얼마나 어렵고 비싼 줄 아나? 그리 어렵고 비싸게 걸음 한 관객들에게 당연히 최고의 퀄리티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그 퀄리티를 왜 제가 제공해야 하는 겁니까?”
“콘서트에서 부를 곡 중에는 우리의 Dear my Beethoven도 있어. 그 곡은 현승 군의 것이니, 편곡을 볼 수 있는 것도 자네, 한 명뿐이지.”
현승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낭만에 젖은 채 자신을 설득하려 항변을 토해 내는 문범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쉽게 물러설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 제 곡만 해 드릴게요.”
“이왕이면 전곡을….”
“저도 바빠요. 안 됩니다.”
“페이도 넉넉히 지급을….”
애처롭게 매달려 오는 문범재의 눈빛을 모르는 체하며 헤드셋을 뒤집어쓰던 찰나였다.
똑, 똑, 똑-.
작업실에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문범재 선생님도 와 계셨네요?”
김 실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현승에게 따로 할 말이 있는지 눈썹을 들썩이며 눈치를 보냈다.
“점심 먹을 시간은 아직인데? 벌써 배고파요?”
다만 전혀 알아채지 못한 현승이었다.
“휴, 그게 아니라 네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
작게 한숨을 내 쉰 김 실장이 제 품에 안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밀며 부연했다.
“오늘 아침에 뜬 기사인데 아무래도 제이블이 설욕전을 벌일 생각인 것 같아.”
[ [단독]제이블, K-싱어스타 심사위원으로 확정! “HS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호흡 맞추고 싶다.” ]
스르륵, 스르륵-.
[ 끝나지 않은 승부, 제이블과 HS 다시 한번 K-싱어스타에서 원으로 맞붙나? ]
스르륵, 스르륵-.
[ K-싱어스타 제작진, 결승전은 HS와 제이블의 자작곡으로 치러질 계획이라고 전격 발표! ]
현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크롤을 내리던 손을 멈췄다.
K-싱어스타.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시즌1이 흥행몰이에 성공하며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 사상 최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끝에 시즌 10까지 진행을 이어 나가며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 중 대표가 되었다.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 중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관심을 두지 않던 이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봤을 때, K-싱어스타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대대적인 홍보를 진행한 덕택에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K-싱어스타가 시즌1인 거 맞죠?”
“그렇지, 이번에 처음 들어가는 프로그램인 것 같은데.”
더군다나 후반 시즌에는 자신이 직접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적도 있었다.
“근데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기사를 낸 거지? 집요하게 섭외 요청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그때 슬쩍 태블릿 PC 화면을 훔쳐본 문범재가 대화에 껴들었다.
“음? K-싱어스타? 이 프로그램이라면 나한테도 섭외요청이 들어온 걸로 아는데?”
“선생님한테도요?”
“응, 근데 콘서트 일정도 있고 방송 출연은 애초에 싫어하니까 딱 잘라서 거절했지.”
김 실장이 다시금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며 조소를 흘렸다.
“아주 제작진 애들이 칼을 갈았나 보네요. 심사위원 라인업에 대한 욕심이 과한 걸 보면.”
그리고는 현승을 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네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들린 건데, 혹시 제이블하고 다시 붙어 보고 싶어?”
“아뇨, 이제 제이블한테 흥미 없는데요.”
“얼씨구? 벌써?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아예 정정 기사 보도하고, 섭외 건도 완강히 거절해 놓을게.”
현승이 전혀 관심 없는 투로 “네.”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K-싱어스타 측이 시즌 1을 흥행시키기 위해 아주 필사적으로 고군분투 중이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이래서 시즌 1이 잘된 건가?
아니지, 잠깐….
현승은 아스라하게 피어오르는 기억을 끌어모았다. 전생에서 K-싱어스타 시즌 1이 방영된 때에는 자신이 작곡가가 되기 이전이었다.
그래, 자신의 재능을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시기였다.
여동생과 우연히 보게 되었던 K-싱어스타의 첫 방송, 2차 예선전에서 기타 하나만 덜렁 들고나와 땅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여자가 떠올랐다.
이름이 뭐였더라? 인디 느낌이 짙은 곡을 선택했었던 것 같은데….
사실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현승의 눈에는 예선장이 한순간 재즈클럽으로 보였다. 오래 숙성된 와인 같은 목소리가 장내를 휩쓸었다.
뭐랄까…. 절제되어 내뿜는 호흡마저 농염하게 느껴졌달까?
다만.
그 여자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거대한 실력을 심사위원들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곡과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예선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말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어디선가 조용히 음악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작곡가로 데뷔한 이후 수소문을 해 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꼭 한번 화려하게 연주해 보고 싶던 악기였지만,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일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열장에 놓인 악기를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그렇게 깊은 아쉬움만을 남긴 채 훌훌 사라져 버린 유일한 악기였다.
‘전생의 나는, 이 무렵에 작곡가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악기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아예 달라졌다.
자신은 현재 영향력 있는 작곡가가 되었고, K-싱어스타는 제게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활을 쥐여 주겠다고 등을 떠민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김 실장님, 저 나갈래요.”
“갑자기 어딜 나가?”
김 실장은 번뜩이는 현승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또 일이 시작되었음을 감지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현승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어디긴요? K-싱어스타죠.”
* * *
김영호 PD는 안 그래도 잔뜩 무거울 이효섭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연 확정받아 내야 해, 알지?”
“그럼요.”
그리고는 뒷머리 칼을 흩트리며 덧붙였다.
“아무튼, 그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만으로도 잘했어.”
“감사합니다.”
김영호는 제 앞에 서 있는 이효섭에게 진심으로 장하다며 당근이라도 쥐여 주고픈 심정이었다. 사실 다른 이들에 대한 섭외 보고는 하나같이 반갑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이효섭이 다 계획이 있다며 패기로 들끓어 말할 때까지만 해도, 어디 한번 보여 봐라 -라는 심보로 팔짱을 끼운 채 눈여겨보기만 했다.
그래, 방송사에 알음알음 돌고 있는 소문에 의하면 HS의 섭외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조차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정말 이효섭의 작전인지 사고인지 모를 일이 터졌다. 별안간 제이블과 HS의 K-싱어스타 출연 예측… 아니지, 거의 확정인 것처럼 기사가 왕왕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LS 엔터 측에서 소송을 당하는 건 아닌가? 하고 노파심에 맘을 졸였지만, 되려 HS는 출연 조건 조율을 원한다며 미팅을 제안해 왔다.
이 정도면 그래도 긍정적인 사인이었다.
아예 방송 출연 자체를 고사하던 미스테리한 인물이, 방송국에 친히 걸음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겠는가?
김영호는 오늘 HS가 어떠한 조건을 요구하던, 다 맞춰서 꼭 심사위원 가장 중앙에 앉혀 놓겠노라 의지를 불태웠다.
“미팅 시간 다 되어 가지 않아?”
“예, 분명 1시에 만나기로….”
이효섭은 회의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더니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1시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호 PD는 약속 시간에 누구보다 예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혹여나 자신이 약속 시간을 착각한 건 아닐까 싶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1시 맞는데….”
다행히 문자에도 정확히 당일 오후 1시에 만나기로 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HS의 갑질일 확률이 높다. 콧대 높은 작곡가 나리의 초반 기선제압이겠지.
“차가 좀 막히시나…?”
이효섭은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김영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김영호는 느긋하게 따듯한 차 한 잔을 들이켜며, 미술관이라도 구경하러 온 듯 평온해 보일 따름이었다.
“주말이잖아. 당연히 차 막히겠지.”
거기다가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대답하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HS를 옹호했다. 모쪼록 HS가 출연을 해 주기만 한다면야, 얼굴에 침을 뱉어도 괜찮다고 할 것 같은 뉘앙스였다.
똑, 똑, 똑-.
그때 반가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 뒤에서 “HS입니다.” 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죠.”
김영호 PD는 마치 방송국장을 만나는 것마냥 떨리는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하, 하이바…?”
“시간이 좀 늦어졌네요.”
그를 반갑게 맞이하던 이효섭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자신이 HS라며 나타난 남자가 헬멧을 뒤집어쓴 채로 미팅 장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팬들 앞에서도 헬멧을 쓰고 등장했을 정도로, ‘헬멧남’에 대한 일화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지만 서로 원하는 바를 협의하는 자리까지 쓰고 나올 줄이야.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K-싱어스타의 연출을 맡은 메인 PD 김영호라고 합니다.”
김영호 PD는 떨떠름해하는 이효섭을 뒤로하고 먼저 헬멧남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예, 반갑습니다. 작곡가 HS입니다.”
“이리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우선 앉으시죠.”
이효섭은 김영호가 구김살 없이 살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일순 아차 싶었다. 그래, 미팅 장소에 모자를 쓰고 왔던 헤드셋을 쓰고 왔던 헬멧을 쓰고 왔던 무슨 상관이랴?
그저 무슨 수를 써서라도 HS의 입에서 출연한다는 한마디만 들으면 될 일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저 남자는 프로그램의 첫 시즌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히든카드라 볼 수 있으니까.
“HS 씨, 반갑습니다. 섭외 담당자 이효섭이라고 합니다.”
이효섭이 제 명함을 내밀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 노출을 꺼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는 HS 씨가 메인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주신다면 원하시는 조건을 전부 맞춰 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는 곳곳을 공란으로 비워 둔 출연 계약서 한 부를 HS 앞에 놓으며 부연했다.
“회차당 출연비든, 선 계약금이든, 부가적으로 원하시는 사항이 있다면 편하게 적어 주시면 됩니다.”
HS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헬멧 앞 고글을 훌렁 올린 뒤 계약서를 훑었다.
‘헉’
일순 김영호와 이효섭은 동시에 잠시 숨을 멈췄다. 사실 멈춘 게 아니라, 그냥 멈춘 거였다.
깊은 눈매와 미간에서부터 곧게 떨어지는 콧대만 보더라도 완성형 얼굴임이 확실해 보였다.
이제야 커뮤니티에서 왜 그렇게나 HS의 얼굴이 화제가 되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헬멧은 안 답답하세요?”
김영호가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이내 HS는 계약서를 다 훑었는지 고글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덧붙였다.
“근데 정말 뭐든 다 맞춰 주실 수 있습니까?”
“예, 뭐든 다…!”
“나중에 방송국장이 어쩌고 하면서 말 바꾸시는 건 아니고요?”
경계심으로 날이 선 HS의 눈초리가 둘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너무 허무맹랑한 조건만 아니라면…!”
“그 허무맹랑하다는 기준은 누가 정합니까?”
뾰족한 물음에 이효섭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다른 조건은 다 괜찮습니다. 짜고 치는 판에 얼추 맞장구도 쳐 드릴 수 있습니다. 단, 제 심사나 활동에 제지를 건다거나 강요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HS는 아예 김영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결정권을 가진 자와 얘기하겠다는 명확한 의사 표현이었다.
“예, 그럼요.”
김영호는 제게 눈빛이 꽂히자 일순 움찔했지만, 이내 경청하고 있다는 의미로 깍지를 끼우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제가 공란에 적은 조건에 대한 건 절대 조율하지 않을 겁니다.”
이윽고.
“응?”
제 앞으로 주르륵 밀려 들어온 방송 출연 계약서를 받은 김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PD님이 책임지고 지켜 주신다고 약속해 주시면 당장 사인하죠.”
* * *
고현덕 CP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게 뭐야….”
김영호 PD가 자신에게 내민 출연 계약서에 생전 처음 보는 조건들이 나열되어 있던 탓이다.
1. 전 회차에 헬멧 쓰고 출연하게 해 줄 것.
2. 헬멧 벗어 달라는 요구하지 말 것.
3. 헬멧이 벗겨져서 얼굴 노출이 될 경우 편집해 줄 것.
통상적으로 이 업계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었다. 으레 자신이 출연할 테니 누구를 써 달라, 자신을 위주로 각본을 조정해 달라는 조건을 제일 많이 제시하는 편이다.
잘나가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눈 마주치지 마라, 일반 스태프는 말 걸지 말게 해라, 촬영장에 자기 반려동물을 풀어놓게 해 달라, 물은 특정 브랜드로만 준비해 달라 같은 조건을 건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헬멧이라니?
그토록 애타게 원하던 출연자 측에서 원하는 조건이 달랑 3개인데 그 3개가 모두 헬멧과 관련된 조건이라는 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계약금이나 회차당 출연비에 대한 건?”
“제이블과 같으면 된다고 합니다.”
고현덕 CP는 “허허.”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참….”
그리고는 이내 심각한 투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 분명히 어려운 조건은 아니다.
다만.
방송이라는 특성상 얼굴을 가리고 나온다는 게, 어찌 보면 가장 터무니없는 조건이랄 수 있었다.
“대중들은 HS의 얼굴을 궁금해하고 있잖아? 근데 전 회차에서 헬멧을 벗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흥미를 잃어버릴 거야. 나중에 가선 방송에 헬멧을 쓰고 나온다며 욕을 할지도 몰라. 보이콧해 버리는 경우도 많을 거라고.”
“예, 압니다.”
“무엇보다 깐깐한 우리 방송국장이 대체 누가 방송에 헬멧을 쓰고 나오냐면서 분기탱천하실지도 몰라? 내 얼굴에 침을 한 바가지 튀어 가며 연설을 늘어놓겠지. 더 나아가선 HS의 출연을 아예 제지시키실 수도 있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김영호 PD가 곧게 허리를 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그래서 CP님을 찾아온 겁니다. 출연자 한 명 앉혀 놓는 거야 제 선에서도 충분히 컨펌할 수 있는 일이죠.”
그리고는 직각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완강한 투로 덧붙였다.
“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방패막이 되어 달라고 부탁드리고자 CP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현덕 CP가 “뻔뻔한 건 여전해.”라며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자신이 총괄 CP로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을 때 곧장 김영호를 메인 PD 자리에 앉혀 놓은 것도, 이런 뻔뻔함 때문이리라.
“컨펌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게 목적이었구먼.”
맡은 프로그램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부리지 않고, 윗선에 눈치 보지 않고, 매번 요구한 바에 합당한 성적으로 보답하는 사람이니까.
“그럼 그에 합당한 성적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그래야 나도 국장님한테 개길 명분이라도 생기지 않겠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김영호는 제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PD로서 성장했지만, 저 눈빛만큼은 신인 PD 때와 다를 바 없이 불타오른다.
모쪼록 저 눈빛 때문에라도 믿어 줘야겠지?
이윽고.
고현덕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잘해 봐.”
그렇게 HS의 첫 방송 출연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