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드디어 대망의 K-싱어스타 참가자 모집이 시작되었다. K-싱어스타는 전 국민 오디션이라는 취지에 맞게끔 지역 상관없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K-싱어스타의 오디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걸려 있었다.
TV, 포털사이트, 기사, 라디오, 버스 전광판까지….
지금껏 열렸던 오디션 프로그램들보다 여유로운 예산 덕분에 대대적으로 공격적인 광고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땅덩어리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 10명 중 9명은 K-싱어스타를 인식하고 있는 채였다.
무엇보다….
대중들은 짱짱한 연예인들로 꾸려진 심사위원 라인업에 더욱 관심이 쏠려 있었다.
지역별 심사위원은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아이돌이나 래퍼, 프로듀서로 배치를 해 놓고.
본선에서는 대한민국 대표 뮤지션인 김광진, 이영아, 원진섭을 메인 심사위원들을 앞세웠다.
그리고.
메인 심사위원 라인업표 가운데 물음표로 가려진 두 명의 실루엣이 궁금증을 자아냈다.
네티즌들은 저 두 명의 실루엣이 누구일 거냐에 대한 추측으로 갑론을박을 이어 나갔다.
문범재와 KOK의 리더 권세훈일 것이다. 아니다, 해외 유명 팝 가수일 것이다. 등등….
“흠.”
제이블은 그런 추측성 글이나 댓글을 살피다 말고 깊게 침음을 흘렸다. 제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게 못내 탐탁지 않은 까닭이다.
하기야.
대중들도 방송 출연을 활발하게 하는 자신을 구태여 실루엣으로 가리면서까지 광고할 리가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다들 바보네.”
이내 제이블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피식 웃음을 흘려 보였다. 실루엣의 주인공을 알고 있다.
그래, 바로 자신이니까.
그리고 제이블은 나머지 한 명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HS….”
그 이름을 계속 곱씹다 보니 모래알을 씹는 것마냥 입안이 까끌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패배감을 안겨 준 작곡가이자, 살면서 처음으로 경계심을 들게 한 작자의 이름이니 껄끄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시작해 볼까.”
제이블은 콘솔 위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각 잡고 작업할 때만 나오는 습관이었다.
한 손을 들어 마우스를 움직이자 액정이 탁 켜지며 미디 프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K-싱어스타 결승전에 사용될 경연곡을 만들기 위해 마스터키보드 위로 손을 옮겼다.
머릿속의 악상을 구체화 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만.
오늘은 그저 악상을 찍어 내는 행위로 그치지 않을 거다.
‘HS….’
까득-!
제이블은 이를 바득 갈았다. 점차 몸짓을 키우며 제 뒤를 바싹 쫓아오고 있는 HS를 보며 생전 처음 경각심이라는 감정을 느낀 게 스스로 우스웠던 까닭이다.
그래, 이번 K-싱어스타 섭외를 승낙한 것도,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작업에 임하는 것도 그런 우스운 감정 따위를 떨쳐 내기 위함이었다.
탁, 탁, 탁-.
마우스를 쥔 손이 정신없이 움직이자, 그에 따라 트랙 위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코드들이 빠르게 채워져 나갔다.
K-싱어스타 TOP2까지 올라온 2명 중 1명은 제이블이 만든 곡을, 나머지 1명은 HS가 만든 곡을 부를 거다.
제이블은 이 조건을 대가로 심사위원 참여 및 경연곡 제공을 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HS도 마찬가지다.
제이블 대 HS, HS 대 제이블….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한번 경연곡의 음원 성적으로 승부를 겨루게 된 거다. 이번에야말로 다시 한번 제대로 준비해서 확실하게 밟아 주리라.
까드득-!
다시금 이를 바득 갈았다.
아니지…?
갈렸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열중한 나머지 제이블의 꽉 다문 입매 사이로 바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턱 근육이 뻐근할 법도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이블은 작곡가로서 노력이라는 걸 해 본 지 오래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아름아름 곡을 만들어도 매번 1위를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그랬기에 노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지금 제이블의 모습을 본 사람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음해하지 말라며 1인 시위할지도 모르겠다.
“제, 제이블……?”
작업실 안으로 들어선 담당 실장조차 놀랄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을 태우고 있었으니까.
“제이블?”
제이블은 담당 실장이 재차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장비들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일까? 제이블의 등은 흠뻑 땀에 젖은 티셔츠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음.”
담당 실장은 그런 제이블의 뒷모습을 고요하게 바라봤다. 복잡한 심경과 달리 표정은 더욱 차분해져만 갔다.
간혹 제이블을 바라볼 때 ‘능력충’, ‘재능충’ 같은 단어는 저 녀석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제이블이 음악판에 데뷔한 시점 이래 지금껏 국내 음악 시장은 그의 놀이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제이블만의 독점 무대랄 수 있었달까?
그럴수록 제이블은 자기 잘난 맛에 심취해 노력보단 성공에 초점을 맞춘 곡을 만들어 냈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전혀 나쁠 게 없었다.
다만.
지금 제이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묘한 익숙함이 일렁거렸다. 마치 처음 작곡가로서 데뷔할 적에 작업하던 뒷모습과 겹쳐 보인달까?
직함을 다 내려놓고 측근으로서 바라봤을 때, 그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저렇게 열의를 비춘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왠지 기특하기까지 했다.
이윽고.
담당 실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작업실을 나섰다.
“다음에 와야겠군.”
모쪼록 제이블에게 처음으로 선의의 경쟁자가 생긴 모양이었다.
* * *
한편.
현승은 제이블과 달리 K-싱어스타 경연곡 준비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채였다.
지금은 우선 ‘벚꽃 한 줌’ 발매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벚꽃 한 줌’이라는 곡은 봄에만 느낄 수 있는 아스라한 설렘과 묘한 떨림을 담아낸 곡이다.
한 마디로 포근하고, 간질하고, 하늘하늘한 감성이 짙은 곡.
곡에 딱 맞는 목소리를 찾아 헤매다 보니 딱 한 명이 떠올랐다. 그래, 봄처럼 포근하고 마음을 간지럽히면서도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닌 한 사람…….
“작곡가님, 저 왔어요!”
때마침 그 사람이 따스한 봄의 햇살에 바스러질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작업실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어, 왔냐.”
그 사람은 바로 정아린이었다.
“저를 다시 한번 불러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또 오버한다. 연습은 좀 많이 했고?”
“그럼요! 진짜 파일 받고 나서 피 터지게 연습했어요.”
정아린은 두 팔을 걷어붙이며 당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룰 수 있는 스케줄까지 싹 다 미루고 연습에 몰두했어요.”
현승이 피식 웃으며 “잘했네”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데려와서 작업할 때보다 총명하게 반짝거리는 눈빛이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목도 풀고 왔나? 바로 작업 시작해도 돼?”
“잠시만요. 5분만, 아니, 3분만요.”
정아린은 다급한 손으로 가방 안에서 프린트된 악보를 꺼내 들었다.
“음?”
그 악보를 흘깃 살펴본 현승은 사뭇 놀란 눈치였다. 악보 위로 형형색색 적혀진 글씨들만 보더라도 정아린이 연습에 들인 시간을 엿볼 수 있던 까닭이었다.
“잠깐, 좀 보자.”
현승은 그대로 그 악보를 낚아채 살폈다. 당황해서 “어? 어?”하는 정아린은 잠시 무시한 채로 악보를 훑었다.
가사를 외우고자 따라 적은 흔적들부터, 구간별로 어떤 식으로 포인트를 주고, 어떻게 호흡을 내뱉어야 할지, 목소리에 힘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혼자 고민하고 적어 내린 흔적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혼자 애드리브 라인도 잡아 놨네?”
정아린은 현승이 따져 묻는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풀이 죽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 원래는 작곡가님하고 상의하고 결정했어야 하는 건데, 제 욕심이지만 꼭 성장한 모습을 좀 보여 드리고 싶어서 혼자 구상해 봤어요. 혹시…. 뺄까요?”
현승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부스를 향해 손짓했다.
“아니, 그대로 가 보자. 부스 들어가서 준비되면 얘기해.”
“정말 제가 짜 온 그대로 진행해요?”
정아린은 단박에 허락해 줄 거라 예상하지는 못 했는지 놀란 투로 재차 되물었다.
“진짜요? 지금 바로 녹음해요?”
“뭐, 그럼 야식 챙겨 먹고 밤에 할까?”
“아, 아니요! 절대 아니요!”
“그러니까 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들어가.”
이윽고.
정아린과 함께 하는 두 번째 녹음이 시작되었다.
.
.
.
“예?”
정아린이 벙 찐 얼굴로 입을 뻥긋거리다 말고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이대로 끝 맞아요? 마무리?”
“어, 그래. 끝이야.”
“진짜? 이렇게 끝내도 돼요?”
“내가 다 됐다잖아.”
“귀찮아서 대충 해 주신 거 아니죠?”
이내 현승이 자신을 귀찮게 졸졸 쫓아다니며 계속 되묻는 정아린에게 날카롭게 “대충?”하고 반문했다.
“아, 아니에요….”
정아린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냈지만, 더 이상 되묻지는 못했다.
“다시” 지옥이란 굴레 속에서 몇 날 며칠을 헤매다 겨우 끝났던 첫 녹음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으, 정말 그때만 생각하면….’
다시금 떠오른 기억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고단하고 힘든 녹음이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생각했는데 단 세 번의 테이크만에 오케이 사인이 나온 게 아니겠는가?
‘그럴 리가….’
정아린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항상 현승에게 가슴 깊이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니지,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먼저 디지털 싱글 제안을 받게 되었고, 꼭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 주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래.
이 곡을 자신이 불러야 할 이유부터 파악하고, 곡을 맛있게 잘 살릴 수 있을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목이 터질 정도로 연습하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현승이 자신에게 맡겼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물며 녹음 일자 뒤로 3일간 스케줄을 모두 전면 취소해 놨었다. 못 해도 현승과의 녹음 작업은 기본 1박 2일 이상은 소요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내고 녹음을 하러 왔는데…,
“저 그럼 진짜 가요…?”
“어, 진짜 끝났어. 가 봐도 돼.”
그런데 달랑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나 버린 탓에 정아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현승의 눈치를 살폈다.
노력의 결과물이 이렇게 반영된 걸까?
아니, 아니지….
현승의 성격을 봐 온 결과 혹시 디렉터 자체를 해 주기 싫어질 정도로 형편없어서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아니면 자신이 준비해 온 정성을 봐서라도 차마 더 지적하지 않겠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말랑한 이유로 봐 줄 사람은 또 아니고….
어느 쪽이든 썩 달갑지는 않은 소식이었다.
“그럼…. 또, 뵐게요?”
“아직도 안 갔냐?”
결국 정아린은 쫓겨나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작업실을 나섰다.
한편.
닫힌 작업실 문을 바라보던 현승은 뒤늦게 가벼운 실소를 터트렸다.
“느낌이 좋네.”
그리고는 곧장 헤드셋을 뒤집어쓰며 마지막에 따놓은 원 테이크 녹음본을 재생시켰다.
딸칵-.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봄날, 벚꽃잎이 한 움큼 나풀거리며 흩날리는 듯한 인트로가 흘러나오고.
들뜨는 기분과 함께 정아린의 또렷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곡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며 시작을 알렸다.
“음, 음….”
곡의 중반부가 되자 현승은 콧소리로 따라 흥얼거렸다. 이젠 정말 기성 가수라는 걸 알려주듯 확실히 정돈된 정아린의 보컬이 반주 위를 매끄럽게 헤엄친다.
“정아린…….”
현승은 곡이 끝나자 작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말고 다시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법인데?”
정아린은 기가 죽어 우물쭈물하던 첫 작업 때와 달리, 포텐이 터진 듯 제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 기대 이상의 성장이었다. 덕분에 ‘벚꽃 한 줌’이란 곡이 지닌 색깔을 더욱 짙게 물들였다.
그 결과, 딱 세 번의 테이크만으로 녹음이 끝났다.
정아린은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치 그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 주었다. 아니지, 그냥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손에 쥐여 주었다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니 밥이나 먹자고 할까.”
이윽고.
현승은 흡족한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님, 구내식당이나 가실까요?”
이제 이 결과물에 걸맞는 만발의 준비를 끝내고 봄과 함께 선사하면 될 일이다.
* * *
뒷짐을 진 채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박 전무는 카페테라스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 저 녀석.”
고정된 시선 끝에는 커피를 사고 있는 현승이 보였다. 작은 뒤통수가 말도 걸기 싫을 만큼 얄미웠지만, 얼마 전 K-싱어스타 출연 관련 들은 얘기가 있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큼, 흠.”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못 할 게 없는 그가 아니겠는가? 박 전무는 괜스레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며 아는 척을 해 댔다.
“지금 출근하는 건가?”
“박 전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요, 커피는 내가 사지.”
그리고는 카드를 내밀며 자신이 마실 에스프레소 한 잔도 추가로 주문했다. 그런 박 전무를 바라보며 현승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전했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예? 갑자기 우리 사이라니 그게 무슨….”
현승이 잔뜩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박 전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등을 다독이며 구석진 자리로 이끌었다.
“많이 안 바쁘면 잠시 얘기나 좀 나누자고.”
“예, 뭐 그러시죠.”
“요즘 보니까 아주 HS가 대세야, 대세.”
그리고는 번들거리는 입술이 마를 일 없게 말을 늘어놓았다.
“개인 앨범도 대박 나고, 맨 레코즈랑 협업한 작업도 잘되고 말이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딱 들으니까 감이 오더라고.”
현승은 그의 입을 빤히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서두를 길게 늘어놓는 걸까. 굳이 대답하거나 되묻지는 않았다.
어련히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 내기 위해 본심을 털어 낸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래, 내가 얼핏 듣기로는 이번에 K-싱어스타에서 섭외도 들어왔다면서?”
이게 목적이었나?
“예, 그랬죠.”
현승은 그의 뚜렷한 본심 앞에서 덤덤한 투로 답했다.
“혹시 섭외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지역 심사위원? 메인 심사위원?”
“메인 심사위원으로 서울 3차 예선부터 출연합니다.”
“이야, 잘 생각했어. 잘난 얼굴은 드러내야지.”
박 전무는 일부러 크게 액션을 취하며 손을 뻗어 현승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마침 잘됐네. 우리 1팀에서 히든카드 하나를 K-싱어스타에 내보낼 생각이거든.”
“히든카드요?”
“그래,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엔터사에서는 으레 그런 오디션 프로그램에 숨겨 놨던 히든카드를 한 명씩 심어 놓거든.”
“아, 그렇군요.”
현승은 영혼 없는 투로 응대하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기도 하거니와, 딱 봐도 자신에게 심사평을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하고자 함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최종 우승자까지는 아니더라도 HS가 방송하는 동안 어여삐 봐 주면 나중에 떨어지더라도 LS 엔터 측에서 캐스팅했다고 하면 신빙성도 있고 그림도 좋잖아.”
“어여삐 봐 달라…… 결국 그 말은 그 히든카드를 위해 심사를 편파적으로 해 달라고 청탁하시는 거네요?”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박 전무는 얄밉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승을 보며 미간을 억지로 펴 보이며 웃음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제 성격대로 굴 수 없지 않겠나? 아쉬운 사람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기 마련이니까.
“자네, 섭섭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같은 식구끼리 그저 좀 돕고 살자는 거지.”
현승이 눈썹이 오묘한 호선을 그리고 들썩였다. 필요에 따라 뒤바뀌는 박 전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놀라웠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그가 지금 챙기려는 건 자존심 나부랭이 같은 게 아니지 않나? 그래, 제 팀 식솔의 밥상을 차려 주려는 거겠지.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다만.
현승은 설령 같은 식구라도, 저런 알량한 말 한마디에 청탁을 받아줄 만큼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뭐, 그 사람이 쓸 만한 악기면 그에 응당한 결과가 있겠죠.”
일부러 척을 칠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중의적인 말만을 남겨 놓은 채 커피를 챙겨 들었다.
“잠, 잠깐만! 뭐 그렇게 황급히 서둘러?”
박 전무는 다급히 현승을 따라 일어나 소매를 붙잡았다.
“이 사람아, 같은 식구가 된 지도 벌써 일 년인데 계속 이렇게 팍팍하게 굴 거야?”
자기도 모르게 잠시 커진 목소리에 “큼, 흠.”하고 목소리를 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그냥 형식상 1팀, 2팀으로 분리되어 있을 뿐이지 결국 뿌리는 LS 엔터인 거잖아. 그러니 경쟁자라고 생각지는 마. 같은 식솔끼리 똘똘 뭉쳐서 밀고 당기며 공생해야지.”
어깨를 쓸어내리며 다독이듯 말해 봤지만, 현승은 입꼬리만 가볍게 올려 보일 뿐이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 제 밥그릇을 호시탐탐 노리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기엔 이질감이 들어 웃음이 났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유치하고 쪼잔한 감정으로 안 해 주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K-싱어스타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는 목적은 딱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연주해 보지 못한 채 숙제로 남은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것.
물론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있다 보면 더 좋은 소리의 악기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제 기억 안에서만은 그 여자보다 소리가 좋은 악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박 전무가 지금 부탁하는 히든카드라는 악기 또한 그저 그런 소리를 가진 악기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연주하고 싶지 않은 악기를 억지로 떠맡을 필요는 없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커피는 잘 마실게요.”
현승은 구겨진 소매를 툭툭 털며 장내를 빠져나갔다.
“쯧쯧, 저 융통성 없는 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박 전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철판 두둑이 깔고 자존심도 내려놨지만, 자신이 원하는 상황대로 흘러가지 않자 화가 났다.
그러기를 잠시.
박 전무는 얼마 가지 않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윽고.
못내 아쉬운 듯 “쩝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왜 저런 녀석이 2팀으로 가 버려선….”
그래, 그렇게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진 K-싱어스타의 예선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