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70화 (70/118)

70화

“와….”

힘없이 풀린 까만 눈동자 위로 번쩍이는 조명들이 반사되어 비췄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와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처음이었다. 그 흔하다는 놀이공원 한번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 씨, 윤제이 씨!”

넋을 놓고 있던 와중에 주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스태프라고 적힌 목걸이를 걸고 있는 남자가 짜증 섞인 얼굴을 한 채였다.

“아, 네…!”

“제가 몇 번을 불렀잖아요. 안 들리셨어요?”

그 남자가 따지듯 몰아붙이고 있는 여자의 이름은.

윤제이.

K-싱어스타 서울 지역 2차 예선전의 통과자이자 최종 3차 예선전을 보러 온 참가자였다.

윤제이는 남자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죄, 죄송합니다….”하며 웅얼거렸다.

“휴, 이거 티셔츠 앞면에 붙이시면 됩니다.”

남자 스태프는 그런 윤제이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참가번호가 프린팅된 스티커를 내밀었다.

남들 눈에는 대답 좀 못 한 거 가지고 왜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할까 싶겠지만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그래.

현재 서울 지역 최종 예선장은 천 명에 육박하는 참가자와 현장 스태프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인원은 많고, 시간은 촉박하다.

그러니 스태프로선 윤제이처럼 시간을 잡아먹는 참가자에게는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랄 수 있었다.

“휴우….”

윤제이는 대기실 내부의 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조명의 빛을 담지 못한 윤제이의 까만 눈동자는 다시금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저, 저기요….”

결국 윤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를 붙잡고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죄송하지만, 아직 차례가 좀 남은 거라면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예, 그러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리 너무 오래 비우시면 안 됩니다.”

스태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혹시나 중도 포기하고 싶으신 거면 미리 말씀하고 가셔야 해요.”

그 말에 윤제이는 다시금 더욱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급하게 대기실을 벗어났다.

“하아….”

윤제이는 화장실 칸 안으로 뛰어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았다.

‘난 왜 이렇게 소심할까….’

매번 자신에게로 쏠리는 매섭고, 호기심 어린 시선 하나에도 위축되고 움츠러들곤 했다. 안다, 자신이 보더라도 이런 제 모습은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걸.

“엄마, 아빠…….”

생전 찾지도, 부르지도 않던 부모님을 힘겹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 말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런 날은 곁에 있어 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부모님은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후.

여러 친척 집을 전전하며 시선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온 탓에 자연스럽게 눈치가 늘었다.

그건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자신이 살아가려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생존본능과도 같은 거였다.

처절하지만, 덤덤하게….

물 흐르듯 뭐 하나 바란 적 없이 살아온 자신에게도 딱 하나 바라는 게 생겼다.

바로 음악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미치도록 음악이 좋고, 하고 싶었다.

다만….

결국 제 간절한 바람은 현실 앞에서 깨져 버렸다.

“그렇게 배우고 싶으면 네가 벌어서 배워!”

성인이 되면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음악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자신에겐 꿈을 지지해 줄 부모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금전적인 여력도 없었다.

그래.

이미 줄이 툭 끊어져 버린 연 같은 꿈이었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꿈을 연명하며 살았다.

직접 알바해서 번 돈으로 간신히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안 쓰는 거라며 준 오래된 통기타 하나로 제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계속 이어 나갔다.

물론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번번이 떨어지는 오디션에 정말 마지막 남은 기타 한 대마저도 꿈과 함께 팔아 버리려고 다짐했었다.

그러던 중.

K-싱어스타 참가자 모집 광고를 보게 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무조건 참가해야 할 것만 같은 강한 욕구가 차올랐다.

대인관계가 힘들 정도로 소심한 성향인 자신이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입이나 뻥긋해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가슴 깊숙이부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 한 번 정도는 자신도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해 보고 싶었다.

분명 그랬는데….

막상 이렇게 경쟁자들이 바글거리는 오디션장에 와서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가수들을 앞에 두고 한 소절이나 제대로 부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은 얼핏 목 푸는 소리만 들어도 하나같이 쟁쟁한 실력자들인 것 같던데 자신이 과연 저기서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이제 정말 피 튀기는 서바이벌이 시작된 거다.

한번 탈락이라면 그대로 끝인 거다. 잘하면 탈락하고 돌아서는 제 모습이 방송으로 생생하게 전해질 테지. 그럼 자신은 사람들에게 탈락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거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다시는 남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문득 겁이 몰려왔다. 조금 전 스태프의 말대로 그냥 중도 포기를 할까?

아니, 아니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윤제이는 고민이 깊어질수록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283번 참가자?!”

그때 화장실 밖에서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283번 참가자, 거기 안에 계세요?”

283번? 어딘가 익숙한데? 제 티셔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가슴팍에 붙은 스티커 위로는 그 여자가 찾고 있는 283번이 적혀 있었다.

“예, 예! 저 여기 있어요!”

“하, 이제 곧 들어가야 해요!”

“아, 그게….”

“얼른 나오세요!”

윤제이는 결국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굳게 걸어 잠가 놨던 화장실 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네, 바로 갈게요-!”

* * *

“HS 씨는 거의 탈락만 주시는 것 같아요?”

이영아가 서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제 기준에서는 실력도 가망성도 없다고 판단되어서 탈락시킨 겁니다만.”

현승의 무뚝뚝한 대답에 이영아가 “예, 그러시겠죠.” 하며 맞받아쳤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한 예선 심사장 내부는 팽팽한 공기가 맞부딪쳤다.

따지고 보면 이영아 홀로 기 싸움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현승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류만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서류를 살피던 김광진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오?”하고 말문을 열었다,

“고준수 동생이 나오나 본데?”

“고준수 씨라면 괴물 보컬이라고 요즘 뜨는 사람이잖아요.”

“과연 형만큼 노래를 잘하려나?”

“뭐, 핏줄이 어디 가겠어요? 적어도 기본은 하겠죠.”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다음에 볼 참가자 서류를 살피기 바빴다.

사락, 사락-.

서류 넘기는 소리만 들리기를 잠시.

“저는 이 사람이 기대되는데요?”

“누구길래 그래?”

“에디슨 킴이라고 외국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결승전까지 올라간 사람이에요.”

이영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자 잔뜩 신난 얼굴로 부연했다.

“저도 이 프로그램 봤었는데, 이 사람 목소리가 진짜 좋거든요.”

“영아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기대되는걸?”

“이 사람은 여기서도 TOP10은 갈 거라고 장담해요.”

김광진은 확신에 차서 말하는 이영아를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렇군.”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왼쪽으로 틀며 HS에게 말을 건넸다.

“HS도 에디슨 킴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

“예, 저도 프로그램을 본 적은 있습니다.”

“그럼 자네도 이 사람이 TOP10에 진출할 거라고 봐?”

그 물음에 이영아가 눈매를 좁혔다. 김광진의 물음이 제 안목보다 HS의 안목을 믿어 보겠다는 의미로 들린 까닭이었다.

“음.”

HS는 고민에 빠진 듯 작게 침음을 흘리며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글쎄요? 관심 있게 본 참가자는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이영아는 중의적인 답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날이 선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HS 씨가 생각하는 TOP10 진출할 것 같은 예상 참가자가 누군데요?”

“저요?”

“예, 연예인 가족부터 유명 인사도 많이 참가한 것 같은데 우리끼리 그냥 한번 후보를 뽑아 보는 거죠. 이미 오디션을 본 사람 중에서 골라도 돼요.”

이영아뿐만 아니라 김광진도 내심 HS가 누굴 뽑을지 궁금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둘의 뜨거운 시선이 HS를 향한 찰나.

“저는….”

에디슨 킴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와 달리 곧장 자신이 보던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283번이요.”

HS를 따라 낮게 “283번?”하고 중얼거린 이영아가 서류를 들춰 283번 참가자의 지원서를 찾아냈다.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단에 적힌 참가자의 이름 석 자를 읊조렸다.

“윤…제이?”

* * *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윤제이가 3차 예선을 보기 위해 오디션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서울 예선 3차전부터 김광진, 이영아가 심사위원으로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다지만….

대체 저 헬멧을 쓴 한 명은 누구란 말인가?

한편.

이영아는 어버버거리고 있는 윤제이를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티 위로 붙은 스티커에 283번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래, 바로 저 사람이다.

HS가 TOP10 진출 후보로 꼽은 사람.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 주시겠어요?”

“아, 아…. 저는 서울에 살고 25살이고…. 이름은 윤제이…. 라고 합니다. 잘, 잘 부탁드립니다.”

이영아는 답답함에 제 목덜미를 쓸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잔뜩 떨리는 목소리와 버벅거리는 말투가 답답함을 배로 느끼게끔 했다. 초등학생한테 시켜도 이것보단 또박또박 잘 해내리라.

“좀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 긴장 푸시고, 노래는 좀 편하게 불러 보시겠어요?”

“편하게요?”

“예, 최대한 편하게 불러 보세요.”

참가자를 위하는 심사위원인양 나긋하게 말했지만 이내 이영아는 시선을 거둔 채 다음 참가자 서류를 살폈다. 별 기대감이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털석-.

그때 윤제이는 자리에 털썩하고 앉으며 기타를 품에 안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윤제이에겐 노래를 시작하기 전 아주 익숙한 습관과도 같았지만, 장내에 있는 사람들에겐 돌발 행동이었다.

“편하게 부르라고 하셔서….”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그녀를 보며 김광진은 가볍게 웃음을 보였고, 이영아는 황당한 표정을 보내왔다.

그 와중에 헬멧남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윤제이는 다시금 기타를 고쳐 잡으며 결의를 다졌다. 자신의 첫 도전이 후회로 얼룩진 기억으로 남아선 안 될 일이니까.

이 딱딱하고 차가운 땅바닥이 마치 제 현실과도 같았지만 그걸 견뎌내야 이 땅바닥을 밟고 올라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내.

윤제이는 헬멧을 뒤집어쓴 의문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고, 표정조차 알 수 없으니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어찌 보면 이건 기회가 아닐까?

“하나, 둘….”

윤제이는 기타 바디를 가볍게 두들기며 박자를 맞췄다.

시작된 기타 반주는 느릿하며 음울했다.

그 위로 깔린 그녀의 목소리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 안쓰럽다고 여기진 말아 줘요.

그녀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시선은 오로지 헬멧 남에게로 향했다. 장내에 저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떨림이 멈췄다.

물론 아무런 미동도 없는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닌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되레 마음이 편안했다.

그렇게 점차, 아주 미세하게….

호흡이 돌아오고, 목소리에 힘이 붙어 가려던 찰나였다.

“그만, 그만.”

얼마 안 가 그녀의 목소리는 “팅”하고 마찰음에 가까운 기타 소리와 함께 툭 멈췄다.

“뭐, 이 정도 들었으면 충분한 것 같네요.”

이영아가 손을 들어 중단한 탓이었다.

“음…….”

그리고는 잠시 턱을 긁적이며 주변을 살폈다. 김광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별로라는 얼굴이었다. 더 시선을 뻗어 HS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헬멧을 뒤집어쓴 탓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HS는 왜 이 여자가 기대된다고 했던 걸까?

자신은 아무리 봐도 윤제이라는 여자는 보컬로서 재능이 없어 보였다. 목소리 자체는 매력적이랄 수 있었지만, 자기소개 때처럼 웅얼거리며 뭉개지는 발음 때문에 소리가 부유하는 먼지처럼 흩어졌다.

더군다나 잔뜩 머금은 우울함까지….

그렇다고 자작곡이 기막히게 좋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요즘 이 정도 코드의 자작곡이라면 웬만한 일반인들도 만들 수 있다. 기타 실력 또한 기가 막히게 좋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뭘까?

이영아는 계속 피어오르는 의문과 함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자작곡의 문제인 건지, 보컬 실력의 문제인 건지 듣는 내내 윤제이 씨만의 매력이 돋보이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의미로 저는 탈락입니다.”

많은 의문을 뒤로 밀어 두고 심사평을 끝냈다.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끝도 없이 많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듣는 것조차 거부감이 든다든지, 불쾌감이 들어서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어요 –라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제이 씨가 가진 목소리의 색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지만, 그 색을 짙게 살려 낼 실력이 아직 부족한 것 같네요. 아쉽지만 탈락입니다.”

김광진까지 탈락 버튼을 누르며 이미 붉은 네온사인으로 과반수인 2개의 ‘X’자가 빛을 내고 있었다.

“아….”

윤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우르르 쏟아지는 심사평을 듣고 있었다. 끝내 그녀의 고개는 시들어 가는 꽃가지처럼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때.

“HS 씨, 아무 말씀이라도 좀 해 주시지 그래요?”

이영아가 비아냥거리듯 넌지시 던진 말소리에 윤제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HS-?!’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은 헬멧을 뒤집어쓴 의문의 남성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이 정말 작곡가 ‘HS’라고? 그렇다면 자신이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같이 걷자’와 ‘Dear my Beethoven’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말이다.

쿵쾅, 쿵쾅, 쿵쾅-.

심장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HS의 곡은 다 좋았지만, 그 두 곡은 자신이 나아가고 싶은 방향성과 닮은 곡들이었던 만큼 각별한 애정을 품고 들었다.

당일 아침에도 그 노래를 들으면 걸어왔고.

그런 사람의 입에서 탈락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면 꽤 큰 충격으로 다가오리라. 윤제이는 듣기 싫은 마음에 두 눈을 꽉 감은 채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붉은 네온사인의 ‘X’자가 하나 더 빛을 낼 뿐일 테니까.

“HS 씨, HS 씨-?”

그때 카메라 앵글 밖에 서 있던 스태프가 HS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는 채 다급히 글씨가 적힌 스케치북을 흔들어 댔다.

“심사평, 심사평 해 주셔야 해요!”

그러나 스태프의 열성에도 HS의 침묵은 지속되었다. 이 정도면 정말 졸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HS 씨, 얼른 뭐든 말씀을 해 주셔야…!”

이영아가 나서서 입을 연 찰나였다.

“저 질문 하나 있는데요.”

드디어 HS가 이영아의 말을 틀어막으며 입을 열었다.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나 뜸을 들였을까?

아니면 진짜 졸았던 거 아니야?

많은 호기심 속에서 이영아는 그가 어떤 심사를 할지 들어나 보자 -라는 심보로 팔짱을 끼워 보였다.

이윽고.

“예선에서 슈퍼패스 써도 되는 거죠?”

HS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심사평도, 탈락 통보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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