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75화 (75/118)

74화

윤제이가 노래를 끝냈을 때는 이미 뒤에 전광판에는 ALL PASS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

김광진은 제일 먼저 마이크를 집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침음을 흘렸다.

“선배님, 지금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어버리신 것 같은데요?”

그때 이영아가 빈 오디오를 틈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럼 제가 먼저 심사평 할게요. 저는 서울 예선에서 제이 씨를 한번 봤었잖아요. 근데 정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때 아마 제가 목소리와 곡의 궁합이 좋지 않다고 심사평을 했었던 것 같은데, 정말 곡이 문제였나 봐요.”

“감, 감사합니다-!

“너무 좋게 들었습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김광진도 잡고 있던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가며 심사평을 시작했다.

“너무 놀라울 따름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잃어버릴 정도였어요. 제이 씨가 이렇게나 리드미컬한 곡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상상을 못 했었는데, 오히려 목소리의 매력이 살아나면서 사람의 분위기 자체가 뒤바뀌는 것 같네요. 다음 라운드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됩니다. 고생하셨어요.”

원진섭은 제이블과 HS가 마이크를 집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대신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저는 예선전에서 어땠는지 전혀 모르거든요? 근데 이런 실력자라면 당연히 저 같아도 슈퍼패스 드렸을 것 같아요. 그만큼 좋게 들려서 바로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HS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HS 씨도 한 말씀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슈퍼패스를 주신 장본인이잖아요.”

위잉-.

장내 안으로는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올 정도로 지독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꿀꺽-.

HS의 묵언수행이 지속되기도 잠시.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라운드 때도 기대할게요.”

기다려 온 심사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단출하다고 여겨질 만큼 짤막한 심사평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제이는 HS의 짧은 한마디에도 연신 꾸벅거렸다. 그리고는 그 상태로 뒷걸음질 치듯 무대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와…….”

이영아는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근데 이게 말이 되나? 곡 하나로 사람의 분위기까지 이렇게 바뀔 수 있다고?”

“자네는 예선 때부터 윤제이의 목소리에는 이런 곡이 맞는다는 걸 예상했던 거지?”

현승의 양옆에 앉은 이영아와 김광진은 조금 전 자신들이 본 상황이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는 표정을 한 채로 질문과 감탄을 번갈아 가며 쏟아냈다.

아무리 약 한 달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지만 보컬 실력뿐만이 아니라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바뀐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랄 수 있었다.

그래, 이건 기적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그때 심사위원석 맨 끝자락에 앉아 있던 원진섭까지 끼어들며 말을 보탰다.

“요즘 다들 HS, HS 거리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네. 듣는 귀부터가 다른가 봐. 다들 못 알아본 원석을 알아본 거잖아?”

“그런 셈이죠. 솔직히 HS 씨 본업이 작곡가니까 잘 몰라서 저러나 보다 싶었거든요? 근데 윤제이 무대 보니까 아차 싶더라니까요.”

눈빛부터 달라진 이영아는 아예 그를 향해 몸을 틀어 앉아 열렬히 속내를 털어 냈다. 그렇게 심사위원석은 지금 ‘HS’로 대동단결을 이루었다.

딱 한 사람….

제이블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찌푸려지는 미간을 가리기 위해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다음 서류를 살폈다.

아니지, 사실 제이블은 머릿속으로 조금 전 윤제이의 본선 무대를 계속하여 상기시키는 중이었으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 글씨를 살피는 척해야만 했다.

그래.

오디션 무대라는 특성상 백 코러스도, 섹션도, 어떠한 특수효과 하나 없이 MR뿐인 무대였다.

오로지 윤제이의 목소리만으로 가득 채워 나간 무대는 잠시 눈 돌릴 틈조차 허락지 않았다.

영상에서 봤던 우중충한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윤제이라는 사람만이 반짝거렸다.

그 말인즉슨….

자신은 발견하지 못한, 윤제이가 가진 가수로서 잠재력을 HS만 발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

윤제이라는 좋은 예시가 생겼으니, ‘HS’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겠지.

‘젠장…….’

비록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

.

.

절대 끝날 거 같지 않던 본선 라운드도 얼추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한 남자 강하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 청년이 당당하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와 자신을 소개하자, 잔뜩 풀어져 있던 심사위원들도 조금씩 자세를 고쳐 앉았다.

“풉-.”

이영아가 ‘강한 남자’라는 단어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자, 원진섭은 잘생긴 출연자 나오니까 웃음이 너무 후한 게 아니냐며 농담을 던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근데 강하준 씨는 경기 예선 때도 느꼈지만, 비주얼이 당장 내일 아이돌 데뷔해도 될 정도로 완벽하신 것 같아요.”

제이블의 말에 현승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

대충 흘겨보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단박에 끌어당길 만큼 미형적인 얼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비주얼만 놓고 본다며 강하준은 이미 스타 반열에 올라갈 조건을 갖추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럼 바로 노래 들어 볼게요.”

가벼운 토크를 끝으로 무대 위에 정적이 깔리기를 잠시.

‘이 곡은….’

제이블은 익숙한 선율이 들려오자 눈매를 좁혔다. 그래, 자신에게 치욕스러운 패배감을 안겨 줬던 곡이라 인트로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원작자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고?”

이영아도 무슨 곡인지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기가 대단하네….”

그가 부르려는 곡은 바로 지금 심사위원석 한 자리를 당당하게 꿰차고 앉아 있는 HS의 개인 앨범 타이틀 곡이자.

얼마 전 챌린지 열풍을 불고 오면서, 차트 상위권을 장기간 독점하고 있는 ‘Dear my Beethoven’였기 때문이다.

잘 부르면 가창력을 뽐내기 좋은 곡이라지만….

아무래도 난이도가 극상위인 곡이다 보니 자칫 잘못 부르면 소음처럼 느껴질 위험성이 수반될 수 있었다. 이번 K-싱어스타에서 아직 그 노래를 오디션 곡으로 들고나온 사람이 없다는 게 방증이리라.

이윽고.

굳게 닫혔던 강하준의 입술이 열리고, 모두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현승 또한 헬멧 안에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음?”

모두의 염려와 달리, 강하준의 보컬은 제법 듣기 좋은 선율로 다가왔다. 대단히 뛰어난 기교를 선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기초가 탄탄했으며 곡을 표현해내는 제스처나 표정 같은 퍼포먼스가 받쳐 주면서 강하준표 ‘Dear my Beethoven’이 탄생하고 있었다.

자신이 윤제이 말고는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탓일까?

현승은 다소 놀랐는지 눈썹을 들썩거렸다. 제 전생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번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될 인물임이 분명해 보였다.

직접 연주하고픈 악기는 아니지만, 탐미적인 악기라고 해야 할까? 그래, 강하준에겐 자신의 평범한 실력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천부적인 스타성이 있었다.

허락된 자만이 타고난다는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빛’ 말이다.

만약 제이블의 말대로 당장 데뷔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하준은 평균 손익분기점 이상의 몫은 해내는 가수가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하준의 노래가 점차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던 찰나.

타-악.

현승이 앉은 자리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어?”

그래, 다른 이도 아니고 현승이 제일 먼저 강하준에게 합격을 준 것이다.

“웬일이에요?”

이영아는 깜짝 놀라며 소리 내어 물었다. HS와 서울 최종 예선부터 본선 1차까지 총 2번의 심사를 함께 해 왔지만, 유난히 합격 버튼에 인색한 사람이지 않던가?

비단 그 점에 대해선 이영아만 느낀 게 아니었다.

당일 심사만 놓고 보더라도, 100명의 합격자를 가려내기 위해 배가 되는 인원의 노래를 들었는데 합격을 준 사람은 꼴랑 스무 명 남짓 정도 되려나?

더군다나.

강하준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처음으로 제일 먼저 심사평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제가 먼저 심사평 해도 될까요?”

다들 그 물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현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이크를 집어든 현승이 심사평을 시작했다.

“강하준 씨? 우선 제 노래로 선곡한 점은 감사드립니다. 다만…….”

* * *

“아무래도 HS 씨는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강하준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건조하리라 만큼 일정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박 전무는 갑자기 꺼내든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재차 물었다.

“보고 받기로는 본선 라운드에서 HS가 제일 먼저 합격을 눌렀다고 하던데?”

“합격이요? 예, 뭐…… 그렇죠. 합격 버튼은 제일 빨리 눌러 주시긴 했죠.”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은 강하준이 뒷말은 차마 잇지 못한 채 입매를 굳게 닫아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박 전무는 강하준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던 거냐며 보채고 싶지만….

‘뭔가 대하기 어렵단 말이지.’

사회에 구를 만큼 굴러서 여러 인간 유형을 만나온 박 전무라 할지라도 강하준만큼은 어려울 따름이었다.

신분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자제들처럼 본인 뜻대로 안 되면 떼를 쓰고, 안하무인처럼 굴었다면 오히려 더 대하기 쉬웠을 거다.

그러나 강하준은 정반대의 유형이랄까? 모든 이들에게 예의 바르며, 뭐든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해 따라오는 FM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묵묵하고, 곰살맞지 못한 성격 탓인지 벽을 쳐 놓은 채 곁을 내주지 않아 대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혹시 HS가 악평이라도 한 거야…?”

박 전무가 아주 조심스레 던진 물음에 강하준은 그저 침음만을 흘려 댔다.

“음…….”

분명 녹화 현장에 따라 보냈던 로드매니저의 보고대로라면 HS가 제일 먼저 합격 버튼을 누른 것도 모자라, 제일 먼저 나서서 마이크를 잡았다고 했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심사위원 전원에게도 합격을 받아 ‘ALL PASS’라는 영광을 얻고 돌아왔다며 격양된 투로 얘기를 전달하던 로드매니저의 얼굴이 생생하지 않은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껏 가벼운 사담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녀석이 HS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거 같다는 얘기를 꺼내어 든 걸까?

그렇게 강하준이 침묵을 유지하기를 잠시.

“스타성은 천부적이라 생각하나, 악기로서 타고난 소리가 좋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는 “아….”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박 전무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말을 스타로서는 재능이 있으나, 가수로서는 재능이 없다는 말로 해석했거든요.”

박 전무가 깊은 탄식과 함께 상념에 젖어 들었다.

악기라….

그래, 그 녀석은 늘 가수를 악기에 비유하곤 했었다. 더군다나 말을 듣기 좋게 포장해서 할 줄 모르는 녀석인 만큼 아마 그 말 그대로 해석해서 듣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아직은 발성이 완벽하게 트인 게 아니라서 그렇게 말한 거겠지.”

다만.

이제는 실력으로 당당하게 승부를 보겠노라는 제 다짐을 보여 주기 위해, K-싱어스타를 앞두고 강행한 여러 트레이닝도 군말 없이 따라와 준 강하준에게 네 해석이 맞을 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런 걸까요?”

강하준이 제 턱을 몇 번 어루만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그 자리에 머무른다면 쇼윈도 안에 진열해 놓고 싶은 악기 정도로 그칠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이셨는데….”

“그만큼 앞으로 더 발전하라는 얘기겠지. 그 녀석 말수도, 남한테 관심도, 하물며 싹수도 없는 녀석인데 그 정도면 나름 너를 관심 있게 들여다본 모양인데?”

아무리 다른 재벌집 자제들과 다른 품성을 지녔다고 한들, 살아 오면서 칭찬받는 일이 더 익숙했을 도련님이다. 그래, 짐짓 아닌 척해봐도 별안간 자신에게 쏟아진 악평에 기가 죽었을 터.

이제 막 연예계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중요한 순간에 멘탈이 흔들린다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게끔 바로 잡아줘야만 한다.

무엇보다.

HS의 심사평이 좀 아리송하다고 한들, 깐깐한 녀석이 합격 버튼을 눌러 줬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긍정적인 사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특히나 빈말이라곤 씨알만큼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 스타성은 확실히 있다고 한 걸 보면 제 눈앞에 앉아 있는 강하준은 분명 크게 될 녀석임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HS의 말대로 가수로서의 재능도 밑받침되어야겠지만.

“모쪼록 우리 하준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잘 되겠지.”

박 전무는 손을 뻗어 강하준의 어깨를 잘게 다독였다.

“네, 다음 라운드에서는 더 잘해 볼게요.”

그 말에 강하준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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