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84화 (84/118)

83화

“HS 씨,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짙은 정적 속에서 불쑥 반기를 들고 일어나듯 말문을 연 건 다름 아닌 고현덕 CP였다.

“돌연 하차라니요?”

재차 닦달하듯 되묻자, HS는 딱딱한 헬멧 뒤통수를 긁적이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제작진의 사정이 그렇다면야 고작 참가자 하나쯤 탈락시킬 수도 있죠.”

“예, 방송가 사정 다 아시잖습니까? 한두 푼 들어간 프로도 아니고 아무래도….”

“다만, 고작 그런 이유로 탈락시키는 거라면 저도 함께 하차하겠습니다.”

HS가 덧붙인 말에 고현덕 CP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드르륵, 탁-!

그로 인해 등 뒤로 쭉 밀려난 의자가 벽에 부딪히면서 굉음을 냈다.

“이봐, 당신-! 잘나간다, 잘나간다, 다들 치켜세워 주니까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뭐야?”

고현덕은 마뜩잖다는 양 눈매를 좁히며 고압적인 투로 재차 따져 물었다.

“앞으로 다신 방송국 문턱 넘기 싫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건가?”

마지막으로 던져진 물음에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실장은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저런, CP님이 질문 선택을 잘못하셨군.’

현승은 원래 방송국 문턱이라면 질색하던 놈이니 저런 협박이 통할 리가….

“예, 그래도 상관없는데요?”

만무했다.

“지금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언제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습니까?”

“뭐?”

“그쪽이 먼저 애걸복걸 부탁했잖아요? 부탁한다, 살려 달라, 한 번만 나와 달라….”

현승이 턱을 살짝 치켜들며 반문했다.

“안 그랬으면 방송국 문턱 넘는 건 고사하고, 방송국 있는 방향은 쳐다도 볼 생각이 없었는데?”

김 실장은 작게 “풉.”하고 웃고는, 눈치를 한번 살피며 헛기침이 나온 양 목을 가다듬었다.

‘내 새끼, 잘한다!’

현승에게 잔뜩 으름장을 놓고, 씩씩거리고 있는 고현덕은 MBN에서 뼈대가 아주 두껍고 입김이 센 인물이랄 수 있었다.

그런 인물 앞에서도 눈 깜짝 안 하고 똑 부러지게 말을 잇는 걸 보고 있노라니, 다시 한번 현승의 배포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LS 엔터 소속 가수들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가진 음원 파워가 센 편이었고, 사내가 보유한 마케팅 채널 수도 많은 편이라 MBN 하나 빠진다고 하여 그리 치명적인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만큼 현재 고현덕의 발언이 크게 위협적이라거나, 현승이 대형 사고를 쳤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고현덕 CP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김 실장님! 실장님 정도 되시는 분이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 아실 거 아닙니까? 그렇게 방관만 하지 마시고 좀 거들고 말려 주세요! 이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군다고 될 일 아니잖습니까?”

그래, 결국 고현덕은 타겟을 바꿔 제 사정을 더 잘 알아줄 게 분명한. 그리고 적어도 현승에 비해서는 훨씬 상식적인 사고가 가능해 보이는 김 실장을 붙들고 떼를 쓰기에 이르렀다.

다만.

고현덕의 예상과 달리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리라고요? 누가? 제가?”

김 실장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콕 가리키며 능글스럽게 되물었고, 이내 한사코 거절하듯 손사래를 쳐 보였다.

“이 친구는 저도 통제가 안 됩니다.”

“예?”

“보세요, 통제될 것 같은 친구인지.”

말을 끝내자, 익살스러움이 묻은 김 실장의 손가락은 현승이 쓰고 있는 헬멧을 향해 있었다.

그때.

별안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고현덕 CP를 대신해 성규진 PD가 호통을 치기에 이르렀다.

“아니, 윤제이가 뭐라고 이 사달까지 가는 겁니까!”

성규진은 항상 고현덕에게 확실히 점수를 따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왔다.

“방송이 무슨 애들 장난입니까?”

다른 PD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고현덕 CP는 뿌리가 깊게 내린 MBN의 소나무 같은 존재이자, 방송국장만큼이나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랄 수 있었다.

그래, 제아무리 LS 엔터가 방송사에 행사하는 입김이 세다고는 하지만 현재 자신이 붙들고, 붙들어야 할 동아줄은 고현덕 CP의 손이 아니겠는가?

때마침 절호의 때가 찾아온 것이리라.

“이 양반들이-!”

그렇게 생각한 성규진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차가 그렇게 쉬운 문제인 줄 알아요-?!”

“지금 우리 애한테 소리 지르신 겁니까-?!”

별안간 김 실장도 학부모라도 되는 양 들고 일어나 풍채만큼이나 단단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럼 지금 상황에 소리 안 지르고 배깁니까?”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 하시죠?”

“책임이요? 무슨 책임? 우리가 손해배상 청구해도….”

이내 김 실장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손해배상? 방송국 밥 먹은 지 몇 년 안 됐죠?”

“예! 예…?”

“우리 PD님께서는 우리 대표님 성격 모르시려나?”

그리고는 턱짓으로 고현덕을 가리키며 재차 되물었다.

“고현덕 CP님은 잘 아시죠?”

마치 그 턱 끝에 찔리기라도 한 양 흠칫 몸을 떨어 보인 고현덕이 “예, 예….”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협박조로 얘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낱 서브 PD 따위가 감히 제 새끼를 건드리지 않았던가?

“가, 갑자기 여기서 왜 대표님 얘기가 나옵니까?”

성규진은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재차 내질렀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국장님은 병풍입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남자가 칼을 꺼내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기회에 고현덕 CP 라인을 완벽히 타겠노라고 다짐하고 큰소리까지 친 마당에 꼬리를 말고 체면만 구긴 채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야, 규진아. 됐다, 됐으니까 그만해.”

“선배님, 제가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성규진이 김영호의 만류에도 재차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이 새끼야! 그만하라고! 분위기 파악 못 해?”

고현덕 CP가 대뜸 고성을 내질렀고, 성규진은 화들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어라?’

이게 뭐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나 지금 점수 따고 있는 거 아니었나?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던 성규진이 입을 다물던 찰나였다.

“일단 고정하시고 차분히 대화로 해결하시죠.”

한 차례 숨을 길게 내쉰 고 CP가 말을 이었다.

“실장님, 자존심 다 내려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와서 HS 씨가 하차하게 되면, 저희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이성을 되찾은 김 실장이 겸연쩍은 얼굴로 “예, 알죠….”하며 차분히 답했다.

“HS 씨가 원래 방송 출연은 절대 고사하시던 분이라는 거 잘 압니다. 큰 결심을 하고 나와 주신 점은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시청률도 잘 나오고 있고요….”

고현덕은 혹여나 다시금 비위를 거슬러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진 않을까, 염려되어 단어 선택에 심혈을 기울이며 낮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하다 보면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내부적인 사정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하물며, 이렇게 큰돈 태운 오디션 프로그램은 더더욱 그렇고요. 방송국이 자선 사업 단체도 아니고, 저희도 어떻게든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차분한 부탁의 어조에 한층 누그러든 김 실장은 슬쩍 현승의 눈치를 살폈다.

실상 이 사태의 결정권은 자신이 아니라 현승에게 있었다.

첫 계약서를 쓸 때부터 방송 출연에 대해 절대적으로 강요하지 않기로 작성된 바 있었고.

무엇보다.

돌연 현승의 하차로 삼대 지상파라 불리는 방송사 ‘MBN’과 척을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맞아, 현승이라면 대표님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겠지.’

그때.

현승이 제 검지를 세워 테이블을 “톡톡”하고 일정하게 두드리기도 잠시.

“김영호 PD님, 그럼 뭐 하나만 여쭤 볼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김영호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물론입니다.”하고 즉답했다.

“딱 TOP10 선발 라운드를 코앞에 두고 왜 이렇게 급하게 내정자가 정해진 거죠?”

“저희도 일부만 내정자로 정해 놓고 나머지는 공정히 평가로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김영호가 한차례 텀을 두고는 부연했다.

“뒤늦게 참가자와 계약을 맺은 소속사들 측에서 투자금을 명목하에 TOP10 진출을 청탁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JN 엔터에서 계약서 쓴 참가자를 최종 파이널까지 올려 달라며 어찌나 압박인지….”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김 실장의 눈썹이 들썩였다.

‘JN 엔터…?’

그의 입에서 나온 ‘JN 엔터’라 하면, LS 엔터의 전(前) 본부장을 맡았던 김우석이 둥지를 옮겨 사내 이사직으로 자리 잡은 엔터였다. 김우석은 자신에게도 이직을 권했던 바 있었다. 비록 그때는 현승이 눈에 밟혀 거절했었다지만….

추후 알아보니 JN 엔터는 뭣도 모르는 연습생들에게 독소조항이 가득한 계약을 체결하게 하고, 정산금도 제대로 치러 주지 않는 갑질을 일삼아 소속 연예인들의 곡소리가 들려온다는 흉흉한 뒷소문이 돌고 있는 곳이었다.

‘안 가길 잘했지….’

제아무리 임직원의 처우가 좋다고 한들, 젊고 반짝이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갑질을 일삼는 곳에 몸 담글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럼….”

김 실장의 상념이 길어지던 무렵, 현승이 다소 무미건조하지만, 충분히 위압적인 투로 말을 꺼냈다.

“강하준은 LS 측에서 투자금을 태우지는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배경이 좋으니까 올려 주는 겁니까? LS 엔터와의 관계 유지 목적으로?”

“예, 뭐….”

“그렇게 따지면 강하준은 올려 주고 윤제이는 못 올릴 이유가 대체 뭡니까? 윤제이도 같은 배경인 데다가, 제가 키워 보려고 점찍은 친구인데.”

그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현승에게 집중됐다. 강하준과 같은 배경? 흐름을 파악해 보자면 윤제이도 LS 엔터 소속이란 말이지 않은가?

단….

놀람을 금치 못 하고 있는 건 김 실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 거짓말이다. 윤제이는 계약서 작성은 고사하고 아직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윤제이도 LS 소속인 겁니까?”

“예, 뭐.”

“아니, 대체 언제 계약하신 겁니까?”

그 말에 김 실장이 제 입을 손으로 가리고 현승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언제?”하고 되물었고.

현승이 마치 오늘의 초대 가수를 소개하는 진행자처럼 옆에 앉은 김 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김 실장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말을 마친 현승이 제 헬멧의 고글을 슬쩍 올려 보였고.

“아….”

이내 눈을 마주한 현승이 윙크를 날리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또, 사고를 저질렀구나. 뒷수습은 내 몫이었구나.

현승은 다시 고글을 “탁” 닫으며 김 실장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제가 괜찮게 보는 애라면 영입한다고 하셨었죠?”

“그렇긴 한데, 제발 미리 언질은 좀 해 줘.”

“안 해도 손발 잘 맞추시잖아요.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예, 예,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비록 둘이 뭐라고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현덕 CP의 얼굴 위로는 당혹스러움이 서렸고.

‘둘이면….’

LS 엔터 같은 큰 회사가 상도의를 지키지 않을 이유는 없다 봐도 무방했다. 방송가의 생리를 잘 아는 이들인 만큼, 연습생을 둘이나 띄워 달라는 부탁을 맨입으로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해가 있었군요.”

그래, 이건 전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LS 같은 큰 회사가 입찰권을 받지 못했으니, 억울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예, 뭐, 오해, 그런 거죠.”

반면, 김 실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명분이 될 정도의 값은 치러야 할 거다. 매니지먼트 운영 역시 흔히들 말하는 세상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문제는 오롯이 돈 때문이다.

영세 매니지먼트의 대표들이, 기적적으로 스타를 배출해 내지 못하는 건 죄다 돈 때문이다. 덩치 큰 회사들이 이렇게 자금을 태워서 자리를 만드는데, 자금적 준비가 안 된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숫자 얘기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김 실장이 눈치껏 되묻자, 고현덕 CP가 옷깃을 고쳐 잡았다.

“예, 그러시죠, 천천히, 느긋하게요.”

그 모습이 VIP 손님을 맞는 점원처럼 보일 뿐이었다.

* * *

한편.

윤제이는 강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10분 안에 강당으로 나오세요.”

“예? 10분이요?”

“곧 중간 평가가 치러질 겁니다.”

“갑자기 중간 평가라니….”

별안간 숙소에 찾아온 스태프는 무뚝뚝하게 할 말만을 전달했고, 참가자들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아직 편곡을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는데….’

윤제이가 다급해진 손을 움직여 족히 일 년 이상은 보관한 듯 잔뜩 너덜너덜해진 악보 위로 재차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던 찰나였다.

“야, 왜 너만 자꾸 말을 안 들어-!”

큰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너는 특히 남들보다 조금만 먹으라고 했어, 안 했어?”

“했어요….”

방금 막 강당으로 들어선 성규진 PD는 잔뜩 구겨진 미간을 한 채 다른 이들에 비해 다소 살집이 있는 참가자, 한승언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근데 왜 체중이 안 줄어? 되레 체중이 늘었잖아.”

“죄송합니다….”

“너 여기 있기 싫어서 계속 반항하는 거지?”

한승언은 고압적인 투로 나무라는 성규진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승언아, 네가 원하는 대로 그냥 지금 바로 하차시켜 줘? 어? TOP10 올라가면 시청자 투표도 진행될 텐데, 너 계속 이대로면 어차피 올라가도 바로 떨어져.”

“죄송합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성규진은 힘이 잔뜩 들어간 손으로 한승언의 어깨를 살짝 주무르며 덧붙였다.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네,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한승언을 보며 고현덕이 제 입을 손으로 가리며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 하나에 모여든 이들이다. 그들은 방송을 통해 약속된 성공을 거머쥐게 될 테고, 제작진들은 이 참가자들을 최대한 굴리고 짜내서 시청률만 잘 뽑아내면 될 일이었다.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는 것이니 합당한 거래다.

물론.

모두가 약속된 성공을 거머쥐게 되는 건 아니다.

사실, 조금 전 자신이 거칠게 나무란 한승언은 TOP10에 진출하지 못하고 떨어지게 될 참가자다. 이미 회의를 통해 탈락 내정자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실력은 좋았지만, 거대한 체구를 가진 한승언은 어느 소속사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진행된 인기투표에서도 꼴찌를 기록한 참가자였다.

그러니, 탈락을 시킬 수밖에.

이윽고.

성규진은 “그래, 감사해야지.” 하며 곧장 뒤를 돌았다.

하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권위적인 성규진의 행동에 아무도 나서서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CP와 메인 PD가 없는 자리에서는 성규진 PD의 권력이 가장 막강하게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참가자들을 감시하듯 눈매를 좁힌 채 주위를 살피던 성규진의 시야 속으로 윤제이가 들어왔다.

악보를 손에 쥔 채로 연신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가며 입은 가사를 외우는 것인지 계속 뻐끔거렸다.

‘HS가 슈퍼패스로 살려 낸 기적의 참가자.’

그리고.

‘또다시 HS가 살려 낸 천운의 참가자….’

성규진은 마뜩잖다는 시선으로 윤제이를 바라보다 아까 전 비즈니스 실에서 있던 일을 복기해 냈다.

자신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고현덕 CP를 잔뜩 열받게 한 HS를, 직접 책망하고 점수를 따고자 나섰지만….

“이 새끼야! 그만하라고! 분위기 파악 못 해?”

되레 크게 꾸지람을 듣고, 체면만 구겨져 버렸다.

“지금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언제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습니까?”

재수 없는 놈….

“그쪽이 먼저 애걸복걸 부탁했잖아요? 부탁한다, 살려 달라, 한 번만 나와 달라….”

아쉬울 거 하나 없다는 듯 거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안 그랬으면 방송국 문턱 넘는 건 고사하고, 방송국 있는 방향은 쳐다도 볼 생각이 없었는데?”

방송국 사람들을 마치 제 아랫사람쯤 보듯 치켜 올라간 고개.

그래.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작자였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당장 윤제이에게 꼬투리를 잡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태산이지만….

비즈니스 실에서 자신만 축객령을 당한 참에 또 문제될 만한 여지를 남겨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씨발….”

성규진은 잔뜩 날이 선 눈빛으로 윤제이를 째려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이야기 잘 끝나면 나만 좆되는 거 아냐…?’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곤 HS가 재차 성격대로 꼬라지를 부려서, 비즈니스 테이블이 “확!”하고 엎어지는 일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이대로 양 측간의 흡족할 만한 악수를 나누게 된다면….

말 그대로 자신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셈이니까.

잘 생각해 보니 아예 확률이 없는 일은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 정도 성질머리라면, 일을 그르쳐도 몇 번은 더 그르치고도 남을 거다. 분명 과한 요구를 당하다가, 모든 일이 무산될지도 모른다.

‘제발, 제발….’

그렇게 성규진은 마지막 희망을 품은 채, 또 초조함과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 강당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내가 PPL 들어온 거니까 로고 제대로 보이게 두라고 했지!”

“가볍게 메이크업은 좀 하고 나오지, 그랬어!”

“더 열심히 연습하는 시늉 좀 못 하겠어? 그림이 별로잖아.”

평가전을 앞두고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 참가자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다니기도 잠시.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거야?”

머지않아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강당 문을 흘끔거리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강당 문 쪽에서 왁자지껄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어?”

고현덕과 김영호 그리고 HS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이, PD 양반.”

이내 현승이 그를 불렀고-.

“예…?”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한 성규진이 일순 비굴한 투로 되묻자.

“왜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고 그래요?”

“아, 그게….”

“애들 연습할 시간도 없어 보이는데.”

이내 성규진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올리던 찰나, 현승이 꼿꼿이 세운 검지를 제 *입(*헬멧) 앞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쉬잇, 오케이?”

“예.”

“봐요, 좋잖아.”

성규진이 굴욕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찰나였다.

“야, 넌 왜 그러냐?”

“예?”

“내가 잘 수습해서 망정이지.”

고현덕이 그를 재차 나무랐다. 쯧쯧, 혀를 찬 그가 나지막이 부연했다.

“야, 성 PD. 너는 그 성격부터 고쳐야 돼.”

“…….”

“장담하는데 성격 때문에 일 그르친다.”

그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쥔 성규진이 억지로 답했다.

“시정하겠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HS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이 바라고 또 바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 회사 간의 이야기는 잘 끝맺어진 듯 보였으며, 끝내 윤제이는 TOP 11 진출을 확정받았다.

‘하, 씨발….’

그리고 혼자만 웃지 못하는 한 사람은 고 CP의 환심을 사려다가 도리어 눈 밖에 나 버리고야 만.

어쩌면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맡게 되든 HS는 물론 LS 쪽 인물들을 섭외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나만….’

성규진, 한 사람뿐이었다.

‘나만 좆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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