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고전적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쉽게 설명하자면.
특정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자극을 반복하여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유발해 내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 과정을 토대로 생긴 조건 반사의 현상을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라고 칭하기도 한다.
요즘 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할 만큼 세뇌당했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그래.
지금 박 전무의 앞에 서 있는 김우석이 딱 ‘파블로프의 개’처럼 보였다.
“바쁜 우리 애들 붙잡고 대체 무슨 얘기를 떠들고 있었는지.”
박 전무가 던진 말 한마디에 자동반사적으로 몸이 흠칫하고 떨려 온다.
김우석이 LS 엔터에 몸을 담그고 있을 적….
박 전무는 LS 엔터의 설립부터 함께한 인물이자, 사내 정치질에도 능했기 때문에 혹시 눈 밖에 났다가 LS 엔터 사원증을 반납해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 애를 태웠었더랬다.
하물며 김우석은 1팀 소속도 아니었던지라, 박 전무가 살갑게 대해 준 적도 없었고, 사내뿐만이 아니라 연예계 바닥에서도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존재 자체만으로 대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김우석은 박 전무에게 단 한 번도 거역하거나 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조차 무서워 밟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LS 엔터와 비견한 규모의 JN 엔터에서, 전무는 아니더라도 엇비슷한 사내 이사로써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은가?
‘마냥 설설 길 필요는 없지.’
더군다나 김 실장은 박 전무가 관할하는 팀도 아닐뿐더러, 천적이랄 수 있는 최 이사의 사람이지 않나?
그래, 자신이 아는 박 전무의 성향상 큰 사달이 아니라는 것만 잘 설명하면 깊게 관여할 리도 없었다.
“나에게는 말 못 할 둘만의 비밀인 건가?”
박 전무는 강압적인 투로 되물었다.
“예….”
그의 넓은 풍채와 부리부리한 눈매에 위협을 느낀 김우석은 잠시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주변에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고는 짐짓 의연한 표정으로 맞서 응수했다.
“그저 김 실장과 시시콜콜한 사담을 나눴을 뿐입니다.”
LS 엔터의 전무와 실장, 거기다가 JN 엔터의 이사까지 모여 있는 장면은 동종업계 사람이라면 꽤 흥미로운 장면이었으므로, 그들의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원래 둘이 같은 식구지 않나?”
“김우석이 JN 엔터로 갈아탔잖아.”
크고 작게 술렁임이 일었고, 김우석은 위협을 위해 몸짓을 키우는 동물처럼 일부러 더 세게 말을 이었다.
“박 전무님께서 크게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박 전무가 침음을 흘리기도 잠시.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 해도, 이미 들어 버려서 말이야.”
이내 날카로운 눈매를 좁히며 되물었다.
“김 실장한테 무슨 제안을 했던 거지?”
“이직 제안?”
“JN 엔터로 스카우트 제안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박 전무의 뒤로 걸음을 옮긴 현승이 ‘김우석 몰아가기’에 동참하듯 중간중간 말을 껴들었고.
기름만 부어 놓은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아무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려 댔다.
‘1열 직관 최고.’
역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는 싸움 구경이라던가? 특히 지금의 싸움은 뭐랄까….
마치 육식동물 앞에서 발발 떨며 죽을 때를 기다리는 한 마리의 초식동물 같다고 할까?
돌이켜 보면….
현승과 박 전무는 같은 식솔이라지만 좋게 얽힌 인연은 아니었다. 박 전무는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1팀을 위해서라면, 다른 팀 밥그릇쯤이야 거리낌 없이 빼앗아 가려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현승이 맛있게 차려 놓은 밥상 자체를 탐냈던 적도 여럿 있었다.
하나,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보자면 큰 타격도 없었거니와, 방해 덕분에 오히려 더 잘 풀린 적도 있었고.
얼마 전, 표절 시비 사건 이후 박 전무와 얽혔던 오해도 조금은 해소되지 않았던가?
현승이 바라본 박 전무는….
그저 제 식구들을 챙기기 위해 무소불위(無所不爲)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 아군이라면 아주 든든하게 여겨질 것 같은 사람.
“박 전무님, 제 말을….”
“대답 먼저.”
“예, 스카우트 제안했었습니다.”
“하지만, 전무님도 아시잖아요. 이 업계에서 스카우트 제안이야 부지기수인 일이고 당연히 함께 손발 맞춰서 일하던 후임이니 다시 한번 끌어 주고 싶은 거 아니겠습니까?”
박 전무는 당연히 다 알고 있다는 양 답했다.
“그렇지, 둘이 합도 잘 맞았고 김 실장이 일도 잘하니까 데려가고 싶겠지. 네 말대로 이 바닥은 가변성도 심한 곳인지 둥지를 옮기는 거야 너무 흔한 일이고.”
그리고는 한 차례 텀을 두고 첨언했다.
“근데 그건 그거고, 다른 얘기 나눈 것도 있잖아.”
김우석은 일순 박 전무의 시선이 명확하게 꽂히자, 다시 한번 잘 길든 ‘파블로프의 개’처럼 몸을 바싹 움츠렸다.
“대답 안 해?”
재촉에도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 그의 입술을 끈덕지게 바라보다 손을 휙 내저어 보였다.
“아니다, 말 안 해도 돼.”
명확한 자초지종까진 다 알 수 없었으나, 이런 서바이벌 오디션장에서 기획사 주요 담당자들끼리 맞부딪힐 만한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가?
제 소속 연습생이 다른 소속 연습생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을 때겠지.
사실 이마저도 약육강식(弱肉強食)인 이 바닥에서 통용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제 소속사가 다른 소속사보다 힘이 없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런 걸로 문제 삼고, 트집을 잡고, 패악질을 부린다?
으레 원래부터 감정이 좋지 않을 사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인 것 같고.’
김 실장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당해 감정이 상한 상태였고, LS 엔터 소속 연습생인 강하준에 이어 윤제이까지 TOP 10 진출 내정을 받았다고 하니까….
아마 김우석으로선 계획도, 배알도 꼬였을 터였다.
‘그 바람에 어깃장마저 부렸겠지.’
생각 정리를 끝낸 박 전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우석아.”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텀을 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일이 되었건, 내 식솔 건드리는 일은 용납 안 하는 거 알고 있지?”
낮고 차분하지만, 가히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였다.
“한때는 같은 식솔이었는데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려서 쓰나. 아무래도 대표님께 JN 엔터와 화합의 장을 한번 마련해 보자고 건의해 봐야겠어.”
김우석은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대략 7년 전쯤이었나….’
가요계에서 가장 큰 행사랄 수 있는 연말 뮤직어워드에 갔을 때 일이다. LS 엔터의 소속 가수와 다른 엔터 소속 가수가 합동으로 특별 무대를 준비했고.
스탠바이를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동선을 맞춰 보던 중에 문제가 생기며 사소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었다. 하나, 보는 눈이 많았으므로 가수끼리 말싸움을 해 댈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담당자들 간의 싸움으로 번져 버렸다.
당시 자신은 막 실장직에 오른 상태였고 하필 상대 가수의 담당자로는 본부장이 왔었더랬다. 기세에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던 찰나….
“겁도 없이 우리 애를 건드렸네?”
박 전무가 나타났었다. 그와는 1팀과 2팀으로 명확히 갈려서 실적과 성과를 가지고 총성 없는 전쟁을 이어 나가던 사이였기에, 도와줄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정말.
진심으로 그때는 박 전무가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다.
그때 그 본부장이 어떻게 됐다고 했었더라? 박 전무가 업계에서 매장해 버렸다던가?
이후로 그의 소식을 아예 듣지 못한 걸 보면 마냥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은 아닐 터였다.
“아아….”
성질도 포악하거니와, 제 눈 밖에 난 사람이라면 밥그릇은 물론 젓가락 한 짝까지 모조리 박살 내 버리는 박 전무도 무섭지만, 사실 더 무서운 건 그 뒷배였다.
그의 등 뒤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 뒷배가 누구던가?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인 여타 기획사의 한낱 로드들도 한 번쯤 소문으로 들어 봤다는 전남일 대표가 아니던가?
김우석은 무려 10년이란 세월을 LS 엔터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일을 둘러싸고 떠도는 흉흉한 괴담 같은 이야기가 낭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현재 김우석의 입장에선 박 전무가 됐든, 전 대표가 됐든, 둘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이득 될 게 하나 없었다.
“전무님, 제가 속이 좁은 사람이라 우현이한테 괜한 어깃장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결국 김우석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자존심을 내려놓기에 이르렀다.
“선임이었던 사람으로서 이런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우현아….”
그리고는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사과를 거듭했다.
“박 전무님, 부디 너른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제발 전 대표님만큼은….”
김우석을 바라보던 박 전무의 얼굴 위로 수심이 드리웠다. 그래도 어느 때인가는 같은 식솔이었다.
비록 다른 팀이었다고는 하나, 어느 날인가는 공동체인 것처럼 협력도 더러 했었던 관계이지 않나?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게 영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곁눈질로 살펴보니….
당사자인 김 실장 또한 마냥 통쾌하다는 표정도 아니었고.
‘음.’
박 전무가 제 허리춤에 올려놓았던 손에 힘을 풀었고.
“야, 우석아.”
정수리가 보이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우석을 넌지시 불러 세웠다.
“남이 얻어 낸 이득을 탐하고, 남의 식구를 탐내면 너 자신만 괴로워질 뿐이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뒷말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고, 속으로만 꿀꺽 삼켜 냈다.
얼마 전.
1팀의 작곡가가 HS의 미공개 음원을 표절한 걸 알게 된 날, 심경이 복잡해져 홀로 술을 기울였었다.
그날 마셨던 술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머리털 나고 마셔 본 술 중에 가장 쓰고 맛이 없었다.
하지만, 꾹 참고 연거푸 들이켰다.
그래도 기나긴 새벽 동안 미련하게 술을 마셔 댄 짓이 헛된 짓은 아니었는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탐내지 말 것.’
질투와 시기는 사람을 아둔하고 몽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자신은 너무나 뒤늦게, 지천명의 나이가 다 되어서야 알게 된 깨달음이었다.
“우석아, 각자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마지막 경고이자, 조언이었다.
“이제 할 말 끝났으니까 가.”
“예?”
“그만 네 새끼 챙기러 가라고.”
“네….”
그런 박 전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승은 내심 생각했다.
‘오, 좀 멋진데?’
자신과 마주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속된 말로 좀 재수도 없고 짜증 났었지만, 의도치 않게 같은 편에 서게 되니 제법 든든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 우리를 싸고돌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쪼록 김 실장을 귀찮게 하던 똥파리를 조속히 쫓아 버려 준 건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윽고, 현승이 먼저 조곤조곤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내 박 전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안 어울리게 감사는 무슨.”
이번에는 김 실장이 끼어들어 감사를 표했다.
“괜한 이야기로 힘 빼고 있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오해 마라, 원래 벼르고 있던 놈이라서 나선 거야.”
“예, 나서 주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오해 말라니까? 나 너네 싫어해. 너희 상상 이상으로.”
그러고는 강하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하준아, 볼일 끝났으니까 이만 가자.”
말을 마친 박 전무가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얼른 와, 하준아. 얼굴 도장 찍으러 가야지.”
강하준은 벌써 저만치 떨어져 자신을 부르는 박 전무와 현승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전했다.
“그럼, 좀 있다가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