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89화 (89/118)

88화

TOP 10, 아니지, TOP 11을 결정짓는 날인 만큼 지금까지의 경연과는 달리 무대가 더욱 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이번 선발 라운드의 별칭은 데스매치.

말 그대로 총 스무 명의 참가자가 대진표에 따라 일대일로 경연을 치르고, 무대가 끝나면 곧장 탈락자와 진출자가 판가름 나는 데스매치였다.

비록 당일 선발전은 탈락과 합격 여부는 정해져 있었지만….

으레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기획사와 투자사 같은 거대세력과 수많은 이해관계가 뒤엉켜지기 때문에 완벽히 공정할 수만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는 건.

탈락 내정자들은 자신이 탈락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죽을 각오로 무대를 선보였고.

진출 내정자들은 제 데뷔 무대라 여겨, 완벽에 완벽을 가한 무대를 선보였다는 거였다.

그 누구도 설렁설렁 준비한 이는 없었다.

물론.

강력한 우승 후보랄 수 있는 강하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아예 암전 처리해 주시고….”

강하준은 자신의 차례가 되기 직전임에도 조명팀을 붙잡고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스포트라이트는 조도를 조금 더 높여서….”

데스매치 상대인 유하인이 가요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는 포크송을 락 버전으로 편곡하여, 장내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음에도….

“좀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 건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녀석, 참….’

박 전무는 그런 강하준을 보고 있노라니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으레 이 바닥에 처음 입문한 사람이라면, 소속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휩쓸려 다니기 마련이다.

하나.

강하준은 달랐다. 극 초반에만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도움을 받았고, 이젠 알아서 해 보겠다며 자신의 경연 무대를 사 측의 도움 없이 스스로 준비해 나가기에 이르렀다.

너무도 대견하지 않은가?

박 전무가 유달리 강하준에게 애착을 갖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주 갸륵해….’

한참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강하준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찰나였다.

“강하준 참가자-!”

스태프 한 명이 다가와 큰 목소리로 호명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이제 유하인 씨 무대 곧 끝나서 얼른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내 박 전무가 강하준의 등을 힘차게 두들기며 답했다.

“예, 우리 하준이 지금 올라가요.”

그의 말에 일순 분위기는 싸해지고, 민망함은 남은 둘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럼 강하준 씨, 이만 가시죠….”

“예, 그러죠….”

강하준과 스태프는 눈을 마주치며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유하인이 무대를 끝내자, 스태프들은 다급히 무대 세팅을 바꿔 놓기 시작했다.

“야, 그 악기 조심히 옮기라고-!”

“연결된 앰프부터 빼야지.”

“스탠딩 마이크 높이 맞춰 봤어?”

한바탕 무대 위가 소란스럽더니….

세팅되어 있던 악기를 금세 철수시키고, 스탠딩 마이크 한 대만을 세워 놓았다.

세션을 총동원했던 유하인의 무대에 비하면 단출하고 텅 빈 느낌을 자아냈다.

‘하준이 녀석,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는데 세션도 빵빵하게 부르고, 특수효과도 좀 넣어 달라 하고 그러지….’

박 전무가 무대 세팅에 대한 아쉬움 입맛을 다시기를 잠시.

멈췄던 촬영이 재개되고.

스태프의 사인을 받은 MC가 다시금 마이크를 잡았다.

“바로 이어서 데스매치 무대를 선보여 줄 참가자는…….”

그리고는 한 차례 텀을 두더니, 오른손을 쭉 뻗어 무대 뒤편을 가리켰다.

“패자 부활로 살아 돌아온 강하준 참가자입니다!”

스탠딩 마이크 앞으로 유유히 걸어 나온 강하준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HS와 만나기로 한 날은, 마치 어린이집을 처음 등원하는 어린애마냥 잔뜩 긴장한 기색이더니….

지금은 어떤가?

잘하던 사람도 절게 만든다는 경연 무대에 올라, 수많은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아주 태연하고, 평온해 보이지 않나?

담소한 건지, 담대한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모쪼록 잘 해내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하준아, 잘해라!’

이윽고.

무대 위로 어둠이 내려앉으며, 잔잔한 선율이 들려왔다,

─ 서러운 마음이 갈 곳을 잃었죠.

머지않아 강하준이 첫 소절을 내뱉자 조명이 천천히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와….’

무대 오르기 직전까지 조명팀을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던 이유가 이거였던 걸까?

직선으로 머리에 내려 꽂히는 조명 탓에 강하준의 얼굴 위로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록.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점이 도리어 더 좋게 다가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무대….

실루엣을 만들어 내는 옅은 조명 사이로 묘하게 반짝이는 이마와 콧잔등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 오늘따라 더 서글퍼지네요.

도톰하게 자리한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목소리가 장내를 채워 나갔고.

─ 내 하루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어요.

아무런 퍼포먼스도, 화려한 연출도, 단 한 번의 조명 체인지도 없었다.

오로지.

목소리가 가진 힘으로만 이끌어 간 무대는 암흑(暗黑)과 함께 끝이 났다.

“…….”

어둠에 깊게 잠식당하듯, 장내는 그의 목소리에 잠식당해 지독히도 고요함을 유지했다.

“…….”

장내는 숨소리조차 허락지 않는다는 듯 적막만이 감돌았다.

짝, 짝짝.

이내 그런 무대 위로 박수 소리가 점차 얹혀지기 시작했다.

짝, 짝짝, 짝짝짝-!

“이 녀석, 정말….”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이내 다시 환하게 밝혀진 스튜디오 내부로 귀가 찢어질 듯 힘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짝짝-!

박 전무는 강하준의 무대가 왠지 도전처럼 느껴졌으므로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촬영 중이니 가벼운 박수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혼자 잘 컸네.

그래.

정말 잘 컸어.

지금, 이 순간 박 전무는 강하준이 몹시 장하고 기특할 따름이었다.

* * *

무대 중앙으로는 MC와 두 참가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유하인 대 강하준, 강하준 대 유하인의 데스매치 무대가 끝이 났습니다-! 두 분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무대를 선보여주셨는데요.”

MC는 큐카드를 한번 흘깃 보더니 유려하게 말을 이었다.

“특히나 강하준 참가자는 중도에 다시 패자 부활로 살아난 만큼 다른 참가자에 비해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정말 완벽한 무대를 보여 주셨어요. 연습을 정말 많이 하셨나 봐요?”

강하준은 한번 탈락의 쓴맛을 보기 전에도, 본 이후에도 죽을 듯이 노력했으므로.

“네, 다시금 기적적으로 쥐어진 기회인 만큼 정말 죽을 각오로 연습했습니다.”

어깨를 쫙 펼치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조금 예민한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혹시 본인이 이길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땀 흘려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따라오리라 생각합니다.”

MC가 작게 호응을 보이고는 곧장 시선을 옮겼다.

“그럼 유하인 참가자는 이번 매치에서 본인이 이기고 TOP10에 진출할 거라고 예상하시나요?”

질문을 받은 유하인이 강하준의 옆얼굴을 흘깃 바라보며 마이크를 잡았다.

“강하준 씨가 워낙 좋은 무대를 보여 줬습니다만….”

그리고는 잠시 텀을 두고 강하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흡사 고대 그리스 조각가가 수십 년에 걸쳐 정성스레 깎아 만든 작품 같은 얼굴이었다.

그뿐이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양 당당하고 꼿꼿한 자태에선 일련의 귀공자 같은 기품이 뿜어져 나왔다.

‘얼굴만 믿고 설치는 놈….’

유하인은 그런 강하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소 좀스러워 보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잘난 놈’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건 당연한 감정이었다.

“저 또한 후회 없는 무대를 보여 드렸기 때문에 쉽게 지진 않을 겁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아득바득 버티고 올라왔는데.

유하인은 속으로 거듭 자신이 질 리 없다고, 절대 질 수 없다며 표독스럽게 되뇌었다.

그리고는 강하준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왠지 녀석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 모습마저 눈꼴 시리게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래,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자, 그럼 이제 이번 데스매치의 승자이자, TOP 10 진출권을 따낼 참가자를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분명 강하준은 낙오자가 되어 있을 거다.

이번 자신의 무대는 완벽했으니까.

제 무대에 대한 심사위원 반응도 좋았고.

근데, 왜일까?

“이번 데스매치의 승자는-!”

이상하게 자꾸만 장마철 비 오듯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만 갔다.

* * *

강하준과 유하인의 데스매치가 끝이 나고 잠시 테이프를 갈기 위해 쉬는 타임을 가졌다.

두 참가자 중 데스매치의 승자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내정자였던 강하준이 차지했다.

“유하인이 못한 건 아닌데, 강하준이 너무 잘한 거예요.”

“하준 군이 이번에 진짜 칼을 갈고 나온 모양이야.”

“노래하는 내내 뭔가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더라니까요?”

하나.

쉬는 시간을 틈타 강하준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는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보아, 내정자라는 타이틀을 빼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터였다.

‘응, 잘하긴 했지.’

현승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폭 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이 좌절을 겪으면 성장한다고 했던가?

다른 심사위원들처럼 호들갑을 떨 성미도 안 되거니와, 제 귀를 홀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강하준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만큼은 확실히 알게 해 준 무대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여름 시즌곡 또한 충분히 잘 소화해낼 수 있으리라고 짐작만 해 왔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준 무대기도 했다.

한 마디로 제법이다?

물론 심사평은 “예,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짤막한 한마디만으로 끝냈지만.

그때.

이영아가 마이크 체크를 위해 올라온 스태프를 붙잡고 물었다.

“이제 마지막 데스매치 맞나?”

“네, 맞아요.”

“근데 이거 아무리 PPL이라지만….”

그리고는 제 앞에 놓인 커피에 볼을 비비며 투정 부리듯 얘기했다.

“커피 너무 맛없어. 진짜, 정말이야.”

그녀의 농담 섞인 투정에 현승을 제외한 다른 심사위원들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혹시 HS 씨는 이거 먹을 만해요?”

“저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마셔 본 적이 없는데요.”

그 말에 이영아가 입을 작게 벌리며 탄식했고.

“아…….”

이내 기회라는 양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카메라 안 돌아갈 동안에라도 벗고 마셔요.”

“아닙니다.”

“계속 말한다고 목도 마르실 텐데.”

“괜찮습니다.”

“이 맛없는 걸 저 혼자만 먹을 수는 없죠.”

이영아는 재차 권유하며 빨대를 들이밀었고.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 주지, 그래.”

“맞아, 좀 마셔 줘요.”

김광진과 원진섭이 거들며 말했다.

사실.

현승은 누구보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꿀꺽.

원래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데 촬영만 오면 헬멧이라는 제약 때문에 커피는커녕, 물도 마시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심사평이 간결하다 못해, 짤막하게 해 버릇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목구멍에 가뭄이 났을 터였다.

어차피 이 사람들이 제 얼굴을 찍어서 유포할 것도 아닐 테고.

‘마실까?’

빨대가 자신을 유혹하듯 고글 너머에서 넘실거렸다.

‘말까?’

현승이 고민하고 있단 걸 눈치챈 이영아가 빨대를 거의 고글에 닿을 정도로 들이밀었다.

“좀만, 좀만 마셔 봐요.”

베일에 꽁꽁 싸여 있던 ‘HS’의 민낯을 처음으로 볼 기회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영아는 결코 쉽게 포기할 성향의 여자가 아니었다.

결국.

현승은 못 이기는 척 그녀가 건네든 커피를 집어 들었다.

“제가 마시겠습니다.”

그 순간.

심사위원들은 물론이고, 체크를 다 끝내고 돌아가려던 스태프도 걸음을 멈추었고.

‘드디어 얼굴을….’

이영아는 노골적으로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눈만큼은 계속 현승을 바라보았고.

‘정말 벗는다고?’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승을 향하던 찰나였다.

─ 촬영 재개합니다!

현승은 곧장 헬멧을 벗으려던 손을 내려놓았고.

“아, 진짜-!”

이영아는 타이밍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데스매치 무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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