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격찬 환호성과 함께 전광판 위로 Top 2에 오를 두 주인공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승전을 치를 두 주인공은 바로-!”
심사위원들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양 흐뭇한 미소와 함께 가벼운 박수를 보내왔다.
“강하준과 윤제이입니다-!”
강하준은 전광판에 떠오른 제 얼굴을 보고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기는 했다만.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자신의 결승 진출도 물론이거니와, 윤제이의 진출 또한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
오늘 무대를 보고,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타고났다.
HS가 말하는 악기로서의 자질을 말이다.
강하준은 만약 오늘 이영아 심사위원이 건넨 조언이 아니었다면, 또다시 윤제이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무대는 완벽, 그 자체였으니까.
지금은….
그녀를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만.
1위를 순순히 양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준결승에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이 제이블과 HS의 자작곡 중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윤제이가 1위를 할 경우, 무조건 HS의 자작곡을 선택할 터였다. 그러니 준결승만큼은 꼭 1위를 해야만 한다.
HS의 곡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 중 1위는 누구일지, 바로 총점 발표하겠습니다.”
강하준은 간절함을 담아 두 손을 꽈악 맞잡은 채로 1위가 호명되길 기다렸다.
다소 치사한 생각일지라도, 이번만큼은 사전 투표와 문자 투표율로라도 이기고 싶었다.
노래 실력으로 이긴 게 아니라며 욕먹어도 아무렴 괜찮으니까, 이번만큼은 이기길 바랐다.
‘제발….’
옆을 슬쩍 바라보니 윤제이도 자신과 같은 심정인지 두 눈을 질끔 감은 채 두 손을 발발 떨고 있었다.
“과연-!”
이내 둘의 이름이 적힌 점수판에 요란한 효과음이 울려 퍼지며, 숫자가 차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준결승전의 1위를 차지하고, 경연곡 우선 선택권을 거머쥘 참가자는 누가 될까요-!”
꺄아아아아악-!
환호인지, 애끓는 소리인지 모를 희비가 섞인 함성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기도 잠시.
“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라는 단어에 강하준이 반응하며 고개를 황급히 돌려 전광판을 확인했다.
‘이럴 수가….’
전광판 한가득 놀라움과 화색으로 뒤엉킨 윤제이의 얼굴이 떠오른 채였다.
“윤제이가 총점에서 강하준보다 120점이나 앞서며 1위를 차지합니다-!”
강하준은 그녀가 안 믿긴다는 양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저요?”하고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푹 떨궜다.
이럼 안 되는데, 표정 관리 해야 하는데, 축하해 줘야 하는데….
제 옆에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눈물을 훔쳐 내는 그녀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그때.
MC가 상황을 진행 시키고자, 마이크를 들었다.
“자자, 감격의 눈물은 잠시만 참아 주시고-.”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연했다.
“이번 K-싱어스타의 심사위원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곡가죠? 제이블 씨와 HS 씨가 각자 결승 경연곡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말에 윤제이는 다시금 눈을 반짝였다.
“지금 바로 두 분이 만든 경연곡을 15초씩만 들려 드릴 건데요! 1위를 하신 윤제이 양은 잘 듣고, 결승전에서 두 곡 중 어떤 곡으로 부르실지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자신이 1위를 하게 되어 어안이 벙벙하지만, 애타게 바라온 순간이다.
이제 고민할 것도 없이, 곧장 HS가 만든 곡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단-!”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MC에게 집중되었다.
“선택하기 전까지는 누구의 자작곡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에 강하준과 윤제이 둘 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
“네?”
하나, MC는 대꾸하지 않고 정해진 멘트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뛰어난 두 작곡가의 자작곡인 만큼 두 곡 다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본인의 데뷔곡이랄 수 있으니 신중히 선택해 주시길 바랍니다.”
윤제이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번져 나갔다.
‘아…’
한치의 고민도 없이 HS의 곡을 선택하려던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까닭이었다.
아니, 누구의 곡인지 알려 주지 않는다면 곡에 이름을 써 놓은 것도 아닌데 어찌 안단 말인가?
반면.
강하준은 알 수 없는 흥분감에 두 손이 떨려와 뒷짐을 지며 손을 숨겼다.
‘만약 윤제이가 제이블의 곡을 고르면….’
전광판에 윤제이가 1위라고 떠오르는 순간, 포기했던 욕심이 다,시 한번 뜨겁게 들끓었다.
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과 색을 가진 HS가 만든 곡이라지만, 단 15초만 듣고 그의 곡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비록 1등은 놓쳤어도, 윤제이가 제이블의 곡을 선택하게 된다면 제 품 안에 저절로 HS의 자작곡이 굴러들어 오는 셈이지 않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첫번째 경연곡 바로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내 MC에 안내에 따라 스피커를 타고 누가 만든 지 모를 자작곡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두번째 경연곡 이어서 들려 드리겠습니다.”
맛보기처럼 15초 만에 툭 끊긴 경연곡에, 관객들은 아쉬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사실 지금 누구보다 탄성을 내지르고 싶은 건 선택의 갈림길에 선 두 참가자일 터였다.
하물며 하이라이트도 아닌 인트로에서 15초라니….
이 정도만 듣고는 단순히 곡의 분위기 정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게 다였다.
“몹시 어려운 결정이겠지만, 많은 시간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MC는 조금의 여유도 줄 수 없다는 양 곧장 윤제이를 닦달했다.
곁눈질로 살펴본 윤제이의 옆얼굴은 무언가 고심에 빠진 듯 심각해 보였다.
그래, 그렇겠지.
자신 같아도 먼저 선택하라고 했으면 패닉에 빠졌을 거다. 홀짝 게임도 아니고, 운에 맡긴 채 선택해야 하지 않나?
물론.
제이블의 곡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명실상부 현직 국내 탑 작곡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의 반증으로 방금 들었던 두 곡 모두 단 15초 만에 귀를 사로잡을 만큼 황홀한 선율을 자랑했다.
다만….
이렇게까지 HS의 곡을 간절하게 바라게 된 것은 자신이 음악을 시작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어 준 동경심이 점차 애착으로 변하게 된 까닭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중 어떤 곡으로 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MC는 생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스태프의 손짓에 재차 그녀를 채근했다.
“자, 선택의 시간입니다-!”
윤제이가 마이크를 쥔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간 채였다.
이윽고.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갔다.
“네, 저는 다음 결승전에서….”
그리고는 눈을 번쩍 뜨며 말을 덧붙였다.
“두 번째 곡으로 선택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일련의 결심이 묻어났다.
아니, 확신인가?
윤제이가 고른 두 번째 곡이 전광판에서 스르륵 돌아가며 곡의 정보가 공개되었다.
「 I wish time would stop 」
그리고.
「 작곡가 - HS 」
강하준은 몇 번씩이나 눈을 깜빡이며 대문짝하게 새겨진 글씨를 바라봤다. 설마 HS의 곡이라는 걸 알고 고른 건가? 고작 인트로만 듣고?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이 정도면 운이 너무 좋다고 해야 할까? 정말 윤제이는 HS와 운명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걸까?
“자, 윤제이 참가자가 HS 심사위원이 만든 자작곡 ‘I wish time would stop’을 선택하게 되면서, 자동으로 강하준 참가자는 제이블 심사위원이 만든 자작곡으로 배정됩니다.”
다시금 전광판에 떠오른 첫 번째 곡이 스르륵 돌아가며 대문짝한 글씨가 떠올랐다.
「 노래를 부르는 이유 」
결국에는….
「 작곡가 – 제이블 」
이럴 운명이었던 건가?
짝, 짝, 짝짝-.
강하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손뼉을 두들겼다. 이런 제 맘을 알 리가 없는 제작진은 빠르게 정해진 결과를 전광판에 입력했다.
「 I wish time would stop – 윤제이 X HS 」
「 노래를 부르는 이유 – 강하준 X 제이블 」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물론.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 * *
한 남자가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LS 엔터 사옥의 게이트를 넘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흠, 흠-.”
누가 봐도 남자에게 좋은 일이 있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을 만큼 화사한 얼굴색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지나가는 이들로부터 인사 세례를 받는 이 남자는 바로 락의 전설 문범재였다.
“어, 바쁜 볼일이 있어서 이만.”
그는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내게 먼저 전화를 했다라….”
거울 속 비춘 문범재는 흡사 품 안에 꽃다발을 가득 안은 새신부처럼 설렘이 만개했다.
어젯밤.
그는 현승으로부터 작업실로 와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은 이후로 계속 이 상태였다.
띠링-!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거침없이 나아가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현승의 개인 작업실 앞이었다.
똑, 똑, 똑-!
노트 소리마저 명쾌하게 들려오고.
끼이이이익-!
문을 열자마자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닿았다.
“와…!”
문범재가 자리에 우뚝 선 채로 혀를 내둘렀다.
‘또 도전 욕구가 샘솟게 만드는 곡을 만들었군….’
멜로디 라인 위에 무심히 건반을 찍어 낸 가이드 음만 들어도 엄청난 고난도의 곡임이 분명해 보였다. 요즘 프로그램으로 바쁜 줄 알았더니 이런 작품은 또 언제 만든 걸까?
짝, 짝, 짝-!
이내 문범재가 군대마냥 일정하고 힘차게 손뼉을 쳐 보였다.
“선생님?”
그런 그를 발견한 현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하십니까?”
“자네, 정말….”
문범재는 돌연 현승을 품에 안으며 등을 거칠게 두들겼다.
“이런 곡을 어찌 또 만들 생각을 했어-!”
“예? 아, 뭐….”
단단한 그의 품에 안긴 현승이 스페이스 바를 눌러 재생되고 있던 트랙을 멈추며 말을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제발 놔주시죠.”
“아이쿠, 너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문범재가 제 단단한 두 손을 풀고는 현승의 옷을 툭툭 털어 주며 덧붙였다.
“내가 정말 잘 불러 보겠네. 고마워!”
“예?”
“자네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현승이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아아.”
뭔가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저, 선생님….”
아무래도 그는 조금 전 작업실 안에 울려 퍼지던 ‘I wish time would stop’이란 곡을 본인에게 주려고 부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걸 어쩐담.
현승이 겸연쩍은 양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게도 조금 전 곡은 선생님에게 드리고자 만든 곡은 아닙니다.”
“내 곡이 아, 아니었나?”
그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얼룩지더니 이내 멋쩍게 웃으며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난 또, 나에게 주려고 부른 줄 알았네. 그건 그렇고 요즘 프로그램으로 한참 바빠 보이던데.”
“예, 혹시 보셨나요?”
“몇 번 찾아봤지. 강하준이랑 윤제이였나? 그 둘의 목소리가 확실히 귀에 꽂히기는 하더라고.”
현승이 테이블 위에 그가 마실 캔 커피 하나를 올려놓으며 딱딱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그 두 사람이 최종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어, 기사로 확인했다네.”
“선생님이 보시기엔 둘 중에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그 물음에 문범재는 한 차례 텀을 두고는 되물었다.
“기사를 보니, 윤제이가 자네 곡을 부른다지?”
“네, 강하준은 제이블이 만든 곡을 부르고요.”
“그럼 조금 전 그 곡이 윤제이가 부를 곡인가?”
현승이 짧게 “네.”하고 답하자, 문범재는 제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흠.”
그리고는 잘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내저었다.
“윤제이가 확실히 더 좋은 소리를 가지고는 있지만, 대중들은 으레 익숙한 것에 끌리기 마련이지.”
문범재가 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덧붙였다.
“예를 들어… 강하준 같은 목소리 말이야.”
탁.
이내 다 마신 캔 커피 캔을 내려놓으며 단호한 투로 부연했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제이블이라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경연에 걸맞은 곡을 만들어 낼 거야. 그에 반해 자네 곡은 대중들이 말하는 ‘대중가요’ 항목에 드는 곡은 아닌 것 같더군.”
“예, 까딱하면 어렵다고 느껴지겠죠.”
“나 같은 사람들이야 오히려 그런 곡에 더욱 영광할 테지만, 대중들은 아닐 수도 있지. 그거야, 윤제이가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에 따라 또 말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승은 대답 대신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그의 말은 뭐 하나 틀리질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강하준은 벌써 팬덤이 엄청 크다고 하던데? 그런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단순히 참가자의 가창력만 놓고 승부를 가려내는 게 아니니까.”
늘 긍정적인 답을 내놓던 문범재가 이번만큼은 아주 단호함이 벤 어투로 첨언했다.
“차마 윤제이가 이길 거라고 말해줄 수가 없군.”
하나,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현승의 얼굴은 묘하게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예, 저도 선생님 말씀처럼 이번만큼은 경연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확신이 서질 않더군요.”
이내 현승은 대놓고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만약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면요?”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지?”
“그야, 선생님이 잘하시는 거 있잖아요.”
문범재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하는 거…?”
머지않아 문범재가 작게 “아아.”하고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 자신이 잘하는 건 당연히 노래지. 뭐가 더 있겠는가?
‘노래로 도와 달라.’
그 말인즉슨, 피처링을 해 달라는 거지.
“하하하!”
별안간 문범재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곡인 줄 알고 김칫국을 마셨던 제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결국 어떤 형식으로라도 부르게 될 거였나 보다.
“내가 정말 잘 불러 보겠네. 고마워!”
그래.
이럴 줄 알고 자신이 미리 인사를 전했던 모양이다.
“만약 내가 도움을 준다면….”
이윽고.
문범재는 웃음기를 가라앉히며 덧붙였다.
“이기는 그림밖에 상상이 안 가는군.”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뜨거운 시선을 맞췄다.
아무쪼록….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결승 무대가 탄생할 조짐이 보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