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안지호는 아주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양 어지러움을 느꼈다.
조금 전에 HS가 뭐라고 했더라-?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만들다가 만 것 같다고 한 것 같은데.
“방금….”
다시, 다시 확인해 보자.
“뭐라고 하셨어요?”
안지호는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되물었지만.
“그냥 만들다가 만든 것 같다고 했는데?”
HS는 건조한 어투로 다시 한번 되짚어 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양 뒷머리를 긁적이며 첨언했다.
“이 곡으로 갔다간 또 망할걸?”
저리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HS는 자신을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지호는 그 점도 자존심이 상했다.
무슨 놈의 작곡가가 이렇게 배우처럼 반듯이 잘생긴 외모에 모델 같은 키를 지닌 건지.
아마.
다른 멤버들이나 대표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나 같이 HS의 얼굴 위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게 그 반증이었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HS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쉽사리 범접하지 못한 채 망설이기도 잠시.
“그럼.”
안지호는 HS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 도발하듯 덧붙였다.
“작곡가님이 완성 시켜 보시든가요.”
“내가?”
“네, 그래야 저도 납득하고 인정하죠.”
자신의 도발에도 HS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흠.”하고 작게 침음을 흘려 보였고.
이내.
연습실 구석에 놓여 있던 건반을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당장 미디 장비가 없으니까, 건반으로 간단하게 편곡해 봐도 되겠지?”
그의 물음에 안지호는 당황스러웠지만, 짐짓 아닌 척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저 욱하는 마음에 도발해 본 건데, 이렇게 바로 해 보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분명, 제 곡을 한 번밖에 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HS의 여유로운 표정이 허세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 ♬♬♬
HS는 건반 몇 개를 손가락으로 톡톡 눌러 보더니,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자,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 ♬♬♬
그래, 자신이 만든 곡의 도입부였다.
다만.
원곡과 달리, 다소 빨라진 템포에 ‘그럼 그렇지.’하고 넘겨짚기도 잠시.
‘잠깐, 잠깐….’
단조 위주였던 곡에 변환 화음을 준 걸로 보아, 아예 곡의 분위기를 장조로 전환 시키려고 템포도 일부러 미세하게 조정한 듯 보였다.
아주, 조금의 변화만으로 곡이 탈바꿈을 끝냈다.
‘음?’
HS는 제 곡의 반주자라도 되는 양, 편곡된 연주를 자연스레 이어 나가다 말고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 명씩 시선을 맞췄다.
그래.
너는 여기를 부르면 될 것 같다. 넌 여기, 아무래도 여기는 네가 잘 어울리겠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뿐이랴?
멤버들의 목소리가 지닌 특징에 따라 조금씩 연주 방식을 바꿔가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안지호는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다 못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소문만 무성한 HS의 실력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있노라니….
경외감이 해일처럼 밀려온 까닭이었다.
음악을 해 온 사람이라 해도, 딱 한 번 들어본 곡을 악보도 없이 연주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근데 지금 제 앞의 남자는 그걸 해내는 것도 모자라, 아주 짧은 순간 안에 편곡을 거치고, 파트까지 분배했다.
하물며.
지금 들려오는 건반 소리가 원곡보다 더 좋게 느껴졌다. 아니, 더 좋았다.
이 편곡에 맞춰….
그가 나눈 파트대로 부르면 아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리가 나올 테지.
땅-.
마지막 건반 소리가 울리자, 멤버들은 유명 피아니스트의 공연이라도 본 것마냥 HS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짝짝짝짝짝-!
아마 작곡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곡이 한결 듣기 좋아졌다는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설령 모두가 그 점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한들, 제 곡이니 자신은 무조건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다만.
속상한 마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일 년 넘게 많은 품과 노력을 들여 만든 자신의 곡이 폐기될 텐데, 속이 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쿵-!
결국 안지호는 파르르 떨려오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사무실을 아예 벗어나 버렸다.
한편.
연습실에 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HS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혹여.
그가 기분이 상해, 곡이고 뭐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맘을 졸이며 주위를 맴돌았고.
그때.
건반 앞에 앉아 있던 HS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을 가로질러 문으로 향했다.
“저, 저기-!”
최정혁이 HS를 다급히 불러세웠고.
“이대로 가 버리시는 건 아니죠?”
사람들이 제 눈치를 살핀다는 걸 깨달은 HS는 가볍게 폰을 흔들어 보였다.
“전화 와서 그래요, 전화.”
* * *
현승은 실제로 제 여동생에게 온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을 나온 참이었다.
“여보세요.”
─ 오빠, 바빠?
“어, 왜?”
─ 나 여행지 골랐어!
현승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갑작스레 생긴 윤제이의 작업부터 더문의 작업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당장 여행을 가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미리 말한다는 게….
정신이 없는 통에 아직 여동생에게 말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어, 어딘데?”
─ 나 유럽 가고 싶어!
“유, 유럽?”
─ 응, 유럽 여행 말이야!
현승은 난처함에 얼른 통화를 종료하고자 다급히 말했다.
“지금은 좀 바쁘니까, 조만간 얼굴 보고 얘기하자.”
─ 오빠 바빠서 갈 수는 있는 거 맞아?
일순간 풀이 팍 죽은 현아의 목소리에 차마 못 갈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응, 갈 수 있지.”
─ 진짜? 대박! 나 그럼 알아보고 있을게!
현승은 알겠다며 대강 얼버무리고는 통화를 끝냈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으니, 얼른 더문 프로젝트를 끝내버리고, 여행을 가는 수밖에.
더문 애들이 힘들기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 최대한 일정을 타이트하게 쪼여서 작업을 끝내 보겠노라 맘먹은 찰나였다.
“야.”
한층 더 높은 비상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던 안지호를 발견하고는 그를 불러세웠다.
그러나.
안지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노력으로 다 될 거라 믿었는데 ‘재능’이란 벽에 부딪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작곡가도 아니야.’
자책과 동시에, 실력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쩌겠어.’
안지호는 그룹의 리더였다. 그룹을 살리는 길을 택해야만 하는 리더 말이다.
‘들어가서 도발했던 거 사과드리고, 부탁해 봐야지.’
생각을 끝낸 안지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 말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도로 앉았다.
“으어억-!”
바로 몇 칸 아래에 서 있던 현승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까닭이었다.
“혹시 저를 따라 나오신 건가요?”
“나오니까 있던데?”
“그러면 그냥 다시 들어가세요.”
안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투로 맞받아치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깔끔히 인정하고 정중히 부탁해 보겠노라고 마음먹은 지 몇 초나 지났다고 어깃장을 부렸다.
그룹을 지키는 일에 비하면 제 곡이 폐기되는 건 그깟 일임을 알면서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난 리더로서도 자격이 없어.’
안지호는 제 못난 모습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여기서 우는 꼴까지 보여 주면….
‘그거야말로 최악이지.’
안지호가 제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덧붙였다.
“금방 들어갈 테니, 못 본 척해 주세요.”
그런 안지호를 내려다보던 현승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야.”
안지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 오고 있던 까닭이었다.
“너 설마 우는 거냐?”
“아닙니다.”
“에이, 우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요.”
현승은 난처하다는 양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뭐라고 말해 줘야 하나.’
마치 장난치다 짝꿍을 울려 버린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무래도,
지금 안지호는 곡을 폐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많이 낙담한 것이겠지?
‘굳이 폐기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자신이 폐기를 지시한 것마냥 되어 버린 이 상황에 마음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곡을 들었을 때 폐기해야 할 정도의 퀄리티는 아니었기에 폐기한다고 해도 말릴 생각이었고.
“네 곡이 만들다 만 것 같은 건 맞는데….”
안지호는 확인 사살에 고개를 휙 치켜들고는 소리쳤다.
“알아요, 안다고요-!”
어깃장을 받아 줄 만큼 곰살맞지 못한 현승은 더욱 단호한 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끝까지 들어.”
“…….”
“성질부려 봤자, 너만 손해일 텐데?”
안지호는 입매를 꾹 닫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
자신이야 리더로서 멤버들의 실력과 노력을 알고 있으니 높이 평가한다지만, 더문은 인지도가 낮아 아무도 찾아 주질 않는 무명 그룹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온갖 문을 두들겨가며 자신들을 알아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처지다.
안 그러면 더문은 사라질 테니까.
안지호는 오늘 자신이 부린 자존심의 대가로 당장 이 상황을 수습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곡을 받아 내야만 한다. 항상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표님을 위해.
그리고 성공에 굶주려 있을 멤버들을 위해.
“죄송합니다. 약속대로 제 곡은 폐기하고, 작곡가님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됐어.”
현승은 낯간지러운 사과에 짤막한 단어로 일축하고는, 넌지시 말을 이었다.
“네 곡, 폐기 처리해야 할 쓰레기는 아니었어.”
“그럼요?”
“뭐, 깨끗이 사용한 재활용 쓰레기 정도는 돼.”
“재활용이요?”
“응, 그래서 오늘 내가 네 곡 재활용해 줬잖아.”
그리고는 덤덤한 어투로 덧붙였다.
“요즘 작곡돌이라면서 까부는 애들보단 실력이 좋더라.”
“칭찬인 거죠?”
“응, 그러니까 더 노력해 봐.”
현승이 잠시 텀을 두고는 재차 부연했다.
“그저 그런 작곡가보다는 잘할 수 있겠더라.”
그때 별안간 비상계단의 불이 툭 하고 꺼져 버렸고.
“어….”
계단에 앉아 있던 안지호는 현승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집요하게도 바라봤다.
모두가 인정한다는 실력의 작곡가가.
요즘 최고 주가를 달리는 작곡가가.
자신에게 경외감을 안겨 준 작곡가가.
대중이, 업계가, 온 세상이 몰라주던 제 실력을 인정해 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지난 몇 년의 노력이 보상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다 울었지?”
현승의 물음과 동시에 다시금 불이 켜졌고.
“윽.”
안지호가 갑작스러운 불빛에 인상을 찡그리기도 잠시.
“이만 가자.”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있던 현승을 보고는 따라 웃어 보였다.
“네-!”
이윽고.
둘은 차가운 비상계단을 벗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 * *
안지호에 이어 HS까지 나가 버린 연습실은 적막이 흘렀고.
“왜 안 오지…?”
한참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점차 사람들의 얼굴 위로는 걱정이 드리웠다.
‘확실히 그룹이 유지해 온 색깔과는 달랐어.’
그중,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찬영뿐이었다.
‘근데 오히려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지금 이찬영은 머릿속으로 재차 HS의 곡을 상기시키며, 무대에 오른 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달콤한 상상이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팬들의 환호성.
이찬영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그만하겠다며 어리광을 많이 피우기도 했지만, 사실 그만큼 간절한 탓이었다.
멤버 중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가수의 꿈을 품고, 오랜 시간 연습생 시간을 거쳐 왔기에 성공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 더 들끓었다.
그리고.
지금 ‘성공’이란 희망에 한 발자국 다가설 기회가 쥐어졌다.
다른 이들은 혹여라도 없던 일이 될까 불안해했지만, 이찬영의 생각은 달랐다.
‘지호 형이 이런 기회를 날릴 사람이 아니지.’
멤버 중 가장 투덕거리던 둘인 만큼, 안지호라는 사람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늘 잡아 주던 리더를 굳게 믿고 있었다. 분명 그룹을 위한 선택을 할 거라고.
그룹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니까.
끼이이익-.
이찬영이 한참 상념을 이어 나가던 찰나, 연습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고.
“지호야.”
안지호가 멋쩍은 미소를 띤 채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HS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들어섰다.
꿀꺽.
김효섭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그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HS가 입술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버, 벌써 가신다고요?”
“네, 볼일 다 봤으니 가야죠.”
일순간 안지호를 비롯하여 장내에 모든 이들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특히 안지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였다.
‘설마 나 때문에….’
잘 풀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탓에 곡은 주지 않기로 하신 건가? 설령 그렇다고 한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작곡가님, 잠시만요!”
안지호가 그를 잡으려 다급히 다가가던 찰나였다.
“당분간 스케줄 싹 비워 놔.”
HS가 멤버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무심히 덧붙였다.
“내일부터 내 작업실로 와서 연습해.”
그 말을 들은 안지호는 땅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굽혀 보이며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