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현아가 제 오빠를 매섭게 바라보며 물었다.
“세 달?”
그 말에 현승이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두, 두 달?”
“두 달-?!”
“하, 한 달.”
“응, 좋아!”
이내 현아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답변이 나오자, 아주 흡족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 현아가 원하는 대로 한 달 뒤에 유럽 여행을 가는 것으로 협상이 종결된 듯 보였다.
‘하, 한 달이면 너무 빠듯한데….’
현승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뒷머리를 긁적였으나.
“아, 비행기부터 알아봐야겠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올라간 여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현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돈은 여유롭게 넣어 둘 테니까, 비행기랑 숙소만 좀 알아서 예약해 놔줘.”
“그럼! 내가 아주 완벽히 세팅해 놓을게-!”
“돈 아끼지 말고, 비행기도 퍼스트로 예약하고, 숙소도 제일 좋은 곳으로 잡아 놔.”
“헐, 퍼스트 짱 비싸지 않아? 비즈니스 정도면….”
“너 유럽 가는데, 몇 시간 걸리는 줄 알아? 싫으면 혼자 불편하게 비즈니스 타고 가던가.”
“아, 아냐! 오빠 부담될까 봐 그랬지.”
거세게 손사래를 쳐 보이는 현아를 바라보던 현승이 무언가 재밌는 게 생각났는지 입꼬리를 들썩였다.
“오빠 부담 덜어 주고 싶으면, 다이어트 좀 해 놔.”
“그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있지, 퍼스트는 몸무게별로 요금 다르게 받잖아.”
“또, 또 뻥 친다-!”
“진짜야, 우리 일본 갈 때 수화물도 무게 재서 돈 받았잖아.”
“어? 어, 그랬지…?”
“퍼스트 칸은 특히 무게에 예민하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정, 정말-?”
“응, 오빠가 이런 걸로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
현승은 최대한 측은한 표정으로 여동생의 어깨를 다독이며 덧붙였다.
“오빠가 요즘 벌이가 생각보다 시원치 않아, 그러니 네가 가세에 보탬이 되도록 다이어트 좀 열심히 해 줘.”
이내 현아는 풀이 죽은 채 “그럴게.”하고 대답하고는 빠르게 휴대폰을 켜 들었다.
“오늘부터 바로 다이어트 식단 알아봐야겠다.”
“그래, 아주 좋은 자세야.”
“어라? 오빠, 이제 아이돌도 키워?”
“너 하나 키우기도 벅찬데, 무슨 아이돌을 키워?”
현아가 제 휴대폰을 보여 주려던 찰나였다.
지이이잉-!
현승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진동했고.
[ 계진성이 뭘 봤는지 몰라도, 헛소리를 끄적여놨어. ]
[ 정정 기사 낼 거니까 신경 쓰진 말고. ]
[ 아무튼 현재 이런 상황이라는 것만 알아두고 있어. ]
김 실장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지이이잉-!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착한 문자에는 링크가 실려있었다.
[ [단독] HS의 아이돌, ‘The Moon’ 컴백 임박! ]
─ 데뷔 3년 차에 접어든 ‘The Moon’은 LS 엔터로 둥지를 옮기며, 화려한 컴백을 앞두고 있다. LS 엔터 전속 작곡가인 HS가 그들의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중략)
HS는 앞서 침체기를 겪던 서지니와 퇴출 연습생 출신인 정아린을 반열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서 능력을 입증한 바 있다. 그가 이번에도 그룹 The Moon을 소생시킬 수 있을지 귀추가 집중… (중략)
기사의 맨 아래에는 ‘계진성 기자’라는 이름과 함께 이메일이 반듯이 적혀 있었다.
따질 게 있으면 연락해라, 이런 건가.
물론.
오보라고 정정 기사만 내면 될 일이긴 한데.
“하-.”
현승은 복잡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야.”
현승은 기사 맨 아래 적힌 계진성의 이름을 빤히 들여다보다 중얼거렸다.
“이걸 역으로 이용해 봐?”
이윽고.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쓱 훑어 낸 현승이 결심한 듯 김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 그냥 헛소리 더 하게 내버려 두죠. ]
* * *
“아니, 대체 왜 LS 엔터 정도 되는 곳이 이런 오보 기사에 반박을 안 하는 거지?”
안지호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양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 [단독] HS의 아이돌, ‘The Moon’ 컴백 임박! ]
휴대폰 액정 위로는 계진성이 올린 오보 기사가 떠올라 있는 채였다.
그때.
최정혁이 무언가 잠시 생각하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되물었다.
“근데 뭐, 아예 오보는 아니잖아? 작곡가님이 우리 소생시켜 주는 건 맞지.”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 가만 보면 정혁이가 팀 내 브레인이라니까?”
주우민이 최정혁의 말을 받아치며 장난을 치기도 잠시.
“저는 솔직히….”
잠자코 있던 이찬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이걸로 우리 이름 한 번 더 기사에 올라갔잖아요.”
“그렇지?”
“심지어 지금 LS 엔터라던가 HS의 아이돌이라는 키워드를 얻으면서, 관심을 받게 됐고.”
“아주 뜨겁지!”
“안 그래도 우리는 홍보도 못 하는 실정인데, 되레 잘된 일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요?”
“이야, 역시 우리 팀의 브레인은 막내 찬영이였어-!”
대화를 듣고 있던 최정혁이 “브레인은 나라며!” 장난스럽게 소리쳤지만….
‘아무래도….’
안지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멤버들의 곁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김효섭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불안하신 거겠지….’
천운이 따라 줘서 HS가 곡을 준다고는 했지만, LS 엔터 같은 대형 엔터가 자신들을 영입할 리가 없을 텐데, 그런데도 김효섭의 얼굴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물며.
이찬영의 말 중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었으니, 더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가 LS 엔터로 둥지를 옮긴다 해도 붙잡지 않을 테지.
그래.
늘 그랬던 사람이니까.
“정말, 우리 찬영이가 아주 야무진 구석이 있어! 정말 이번에 대박 나서, 우리 애들 영입하고 싶다고 눈독 들이는 거 아냐? 그럼 진짜 초대박인데-!”
역시나.
김효섭은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그럴 리가요….”
그제야 멤버들도 김효섭의 눈치를 살피며 입매를 다물었다. 차마 “그렇게 되면야 더할 나위 없겠네요!”하고 너스레를 떨어 보일 수는 없던 까닭이었다.
그 너스레 속에는 진심이 섞여 있을 테니까.
그래.
진심이 섞인 말이라, 더욱 듣는 이가 아플 걸 알기에 입매를 다물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님.”
그때 안지호가 단호한 투로 적막을 깨부쉈다.
“대표님,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김효섭은 말을 더듬다 말고,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냥 그만큼 잘됐다는 거지….”
물론.
안지호도 LS 엔터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잘 알고 있다. 거기서 영입 제안이 들어온다면 김효섭의 말대로 초대박이겠지. 무엇보다 영입이 들어온다면 안 흔들릴 자신?
그딴 자신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분명.
뒤흔들리고,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하겠지.
요즘 아이돌 판은….
실력, 비주얼, 유머 감각은 물론이고. 언론과 홍보를 움직여 잘 판매될 수 있도록 브랜드 마케팅을 해 놔야만 그나마 승산이 있는 살벌한 전쟁터다.
그런 마케팅도 없이 어쩌다 떡상했다?
‘기적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그런 기적이 더문에게도 찾아왔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작곡가 중 하나랄 수 있는 HS에게 곡을 받게 되었으니, 더문은 빛을 보게 될 거다. 그의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번 앨범은 성공할 거라는 자신도 생겼고.
다만.
이번 성공이 우리의 상황을 180도 뒤바꿔 놓지는 못할 터였다. TM 엔터는 너무도 영세했고, 부채가 쌓일 대로 쌓여 있었기에 그걸 처리하기도 급급할 테니까.
그래.
LS 엔터에서 영입 제안이 온다면, 넙죽 엎드려 옮기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다른 멤버들이 둥지를 옮긴다 해도, 말릴 수 없을 테고.
하지만.
안지호만큼은 고민 끝에 결국 TM 엔터… 아니, 김효섭의 곁에 남는 길을 선택할 터였다.
김효섭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더문을 놓지 않고, 믿음으로 지지해 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맞아.’
TM 엔터도 언젠가 국내 대형 엔터 대열에 오르면 될 일 아닌가? 그래, 그렇게 만들면 될 일이지.
이번 앨범이 그 걸음의 시초가 되어 줄 테고.
지금은 이찬영의 말대로 LS 엔터와 HS라는 네임벨류를 이용하여 더문을 최대한 홍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우리 연습 갈 시간이다.”
안지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멤버들에게 얘기했다.
“어, 어….”
“우리도 이만 가자.”
멤버들은 하나씩 눈치를 보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김 대표님.”
이내 안지호는 사무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나지막이 김효섭을 불러 세웠다.
“우리도 꼭 사옥으로 이사 가요.”
“어? 사옥?”
“LS 엔터 사옥보다 더 큰 사옥으로.”
김효섭이 벙 찐 표정으로 안지호의 뒤통수를 바라보기도 잠시.
“그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러자.”
이윽고.
“사옥으로 옮기면 구내식당도 있겠지?”
“그건 당연하지.”
“연습실 옆에 샤워실도 있으면 편하겠다.”
“그럼 난 영화 시청실-!”
“야, 그딴 게 왜 필요하냐?”
멤버들은 한껏 들뜬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하드 트레이닝의 시간이 찾아왔다.
“잠깐 쉬었다 가자.”
현승의 말이 끝나자, 안지호는 바람 빠진 풍선마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작 서서 노래를 복창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나 힘이 소진되어 버리는 건지.
“후우-.”
안지호는 머리에 맺힌 땀을 털어 내며, 제 뺨을 톡톡 두들겼다.
‘정신 차리자.’
고작 이 정도로 지쳐 쓰러지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었다. 트레이닝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부족한 점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음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
지속되는 적막감에 안지호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묵묵히 서 있던 현승을 바라봤고.
“저 작곡가님.”
현승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뭔데?”
“혹시 기사 보셨나요?”
그 물음에 현승이 “어”하고 단답형으로 말하고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저 반응은 뭐지?’
안지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가 아직 그 기사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줄 알았다. 아니면 이미 정정 기사를 준비 중이라던가.
물론.
기사를 확인했을 때는, 편승이라도 좋으니 더문의 이름을 한 번 더 알리기 위해 이용하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LS 엔터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빛의 속도로 기사가 다 내려갈 거라고.
그런데.
아예 대처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저 반응은 무어란 말인가?
“보셨는데 왜 대처를 안 하세요?”
“뭔 대처?”
“아시겠지만, 명백히 오보잖아요.”
“그래서?”
“LS 엔터가 못 막을 곳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안지호는 되레 반문해 오는 현승에게 “예?”하고 되물었고.
“덕분에 너희 이름 한 번 더 기사에 실렸잖아.”
“그렇긴 하지만….”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뻐끔거렸다.
“말을 해.”
현승의 보챔에 애꿎은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어 대기도 잠시.
“혹여라도 우리 애들이 헛된 기대를 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헛된 기대?”
“네, 정말 LS 엔터에서 영입 제안이 오는 건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요.”
그 말에 현승이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얼씨구? 단체로 오바한다.”
“알아요, 오바인 거.”
“그럼 오바 안 하면 되겠네.”
별안간 안지호의 고개가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궈졌고.
“저도 안 하고 싶어요.”
이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며 차분히 부연했다.
“지금 소속사를 떠날 생각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자꾸 올라와서 억누르기 힘들어요. 안 흔들릴 자신도, 혹하지 않을 자신도 없어요.”
그리고는 혼잣말하듯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저도 이런데, 멤버들은 오죽하겠어요.”
현승은 잠자코 듣고 있다 말고 “음”하고 침음을 흘려 댔다.
이윽고.
굳게 닫혔던 입술을 열었다.
“너도 이 바닥에 대해 알 만큼 아는 놈이라 느꼈는데, 내 착각이었나?”
현승은 “예?”하고 되묻는 안지호를 정확히 주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앞에서 이렇게 말랑말랑한 모습 보여 주지 마. 재미없어지려고 하니까.”
그리고는 차분하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어투로 되물었다.
“제아무리 내 곡이라지만, 언론 플레이 하나 없이 너희한테 성공이 가당키나 할 것 같아? 판 깔아 줬으면 뭐라도 하나 더 빼먹을 기세로 덤벼들어야지. 리더라는 놈이 그렇게 약한 소리나 하고 나자빠져 있을 거냐?”
안지호는 쏟아지는 비수들을 받아 내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날이 바짝 서 있는 말들에 아팠지만,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자신은 주어진 기회에 만족하지 않고,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하나라도 더 얻어 내고자 악착같이 달려들어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 투정이나 부리고 있는 꼴이라니.
“그리고 LS 엔터가 아무나 영입하는 줄 아냐? 이상한 망상 그만하고, 계속 지적받는 구간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나 생각하지, 그래?”
현승의 독설이 끝이 나고.
“죄, 죄송합니다.”
안지호는 밀려드는 수치심에 겸연쩍어졌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죄송할 시간에 연습이나 하라니까.”
제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그저 곡을 잘 만들기만 하면 되는 작곡가다. 그런데 직접 보컬을 지도할 수 있을뿐더러, 자신보다 더욱 돌아가는 실정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충고해 주었다.
‘대체 이 사람 정체가….’
분명 얼굴만 봐서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무관심하면서도 노련한 그의 태도는 왠지 모르게 위압감을 조성하며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오늘 잠잘 생각 하지 말고.”
“네….”
“이제 곧 녹음 들어갈 거니까.”
“네… 예?!”
“뭘 놀라? 내년에 컴백 할래?”
“아, 아니요.”
“그래, 그러니까 연습이나 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녹음 첫 타자는 너다.”
모쪼록 나쁜 사람은 아닌 듯 보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