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현승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 이제 할 일 다 끝냈어요.”
그 모습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김 실장이 사뭇 진지한 투로 물었다.
“넌 네가 어딜 가든 먹히는 거 알고 있지?”
“예? 뭘 먹혀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그런 말투로….”
“또 어디서 이상한걸….”
현승은 마치 벌레를 내쫓듯 공중에 손을 휙휙 내젓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됐고요, 진짜 다 끝났으니까 휴가 좀 낼게요.”
“응, 얼마나 다녀올 건데?”
“가족끼리 유럽 여행 갈 거라, 2주 정도는 비울 것 같네요.”
김 실장은 별안간 아련한 표정을 짓고는 “유럽 좋지….”하며 중얼거렸다.
“실장님은 유럽 어디 가 보셨는데요?”
“유럽 근처는 가 보지도 못했어.”
“근데 왜 가 보신 것처럼 얘기하세요?”
“회사만 아니면야 다 좋으니까.”
현승이 무언가 깨달은 양 “아.”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자신과 다르게 김 실장은 회사와 떼어 내려야 떼어 낼 수 없는 월급쟁이이지 않은가?
하물며.
일 년 넘게 그가 하루라도 편히 쉬는 날을 본 적이 없는 걸로 봐선,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이거, 혼자 가려니 마음이 영 불편한걸.
“실장님도 가실래요?”
“뭐? 어디를?”
“유럽 여행 말이에요.”
일순간 김 실장의 눈앞으로 피사의 사탑과 에펠탑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한 번은 꼭 배낭을 메고 유럽 여행을 떠나겠노라 버킷리스트에 끄적여 보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현승이 주는 도움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제아무리 천문학적인 저작권료를 벌어들이고 있는 현승이라 할지라도, 제 능력으로 벌어 낸 거다.
‘절대 부러워도 말고, 욕심내지 말고, 얻고자 하지 말아야지.’
더불어 사람 관계에서 ‘당연함’이라는 감정이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내가 가족 여행에 낄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아.”
“당연히 제 가족 여행에는 안 껴 드리죠.”
“엉? 근데 왜 갈 거냐고 물어봤어! 어른 놀리냐!”
“언제는 형이라더니, 이럴 땐 또 어른이래.”
둘이 동시에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잠시.
“실장님은 그럼 어머님하고 따로….”
현승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 김 실장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잠시 망각하고 입을 잘못 놀린 탓이었다.
이걸 어쩐담.
눈치를 살펴보니, 김 실장도 이미 어머니라는 단어를 듣고 조금 불편해진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뭉개고 넘어가 봤자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수습이라도 잘해 봐야지.
“제가 다 지원해 드릴 테니, 어머님하고 꼭 더 늦기 전에 유럽 여행 가세요.”
그 말에 김 실장은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짐짓 아닌 척 웃음기 섞인 어투로 대답했다.
“얼씨구? 이제 여행도 강제로 가야 하는 거야?”
“회사만 아니면 어디든 좋으시다면서요?”
“어, 맞지. 그럼 유럽 말고 크루즈 여행으로 부탁해.”
“꼭 배를 타면 극적인 끝을 맞이하던데….”
장난스레 말꼬리를 흐리는 현승을 보고는, 김 실장이 눈매를 찢으며 되물었다.
“무슨 타이타닉이냐? 아-, 천하의 민현승이라도 크루즈 여행은 보내 주기 부담되나 봐?
“예? 부담이요? 제일 잘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세요? 확인 겸 잔고 좀 보여 드려요?”
김 실장이 현승의 휴대폰을 밀어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어, 보면 배만 아프지. 하여간, 재수 없다니까?”
“맞아요. 저 재수 없을 만큼 돈 많아요.”
별안간 현승은 웃음기 서렸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꼭 제 돈으로 유럽이던, 크루즈던 어머니랑 꼭 여행 가시라고요.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제 매니저 역할 해 주신다고 고생하는데, 제가 그 정도는 해 드려도 되잖아요.”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김 실장의 표정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눌러 담고 있는 양 일그러졌다.
“짜식….”
이내 현승의 머리칼을 난잡스럽게 헤집어 놓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알긴 알아?”
“근 일 년간 좀 폭삭 늙으신 것 같기도?”
“야, 어디 가면 아직 이십 대 소리 듣거든?”
현승이 들릴 듯 말 듯 “허언…?”하고 중얼거렸으나, 다행히 김 실장의 귀까지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김 실장이 힘을 실은 손으로 현승의 다부진 어깨를 다독였다.
“나는 네가 잔뜩 벌려 놓은 일들 정리하고 나중에 갈 테니까, 먼저 잘 다녀와.”
“네, 그럼 실장님한테 뒤를 맡기도록 할게요. 항상 말하지만 제 손을 떠난….”
“네 손을 떠난 이상, 성과는 모두 회사가 하기 나름이라고? 알아, 안다고.”
현승은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듯, 손길을 마다하지 않은 채 가볍게 웃음 지어 보였다.
톡톡.
순식간에 불어난 일들이 넘실거리고 있으니, 이젠 댐의 문을 개방할 때가 되었다.
‘얼마나 또 떠들썩해지려나.’
김 실장의 입가에 설렘이 담긴 미소가 내려앉았다.
아마.
둑 터진 강물처럼 성과가 쏟아져 나올 테지. 설령 당장 터지지 않더라도, 언젠가 빛을 낼 곡들일 터였다.
그때.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더문 컴백이 생각보다 빠르던데, 준비 잘하고 있대?”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안 그래도 연습 기간도 짧은데 그러다가 네 노래 가져다가 개판 내놓으면 어쩌려고 그래.”
“별걱정을 다 하신다. 걔네는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숨 쉬듯이 연습만 해 온 애들이에요. 알아서 잘하겠죠.”
그 말을 들은 김 실장은 “그래도….”라며 중얼거렸다. 강하준이나 윤제이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지만, 더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다르니 노파심이 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서지니나 정아린은 그래도 LS에서 밀어 주기라도 했다지만….’
그래.
비빌 언덕 하나 없는, 팬덤마저 무시당하는 더문의 컴백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지금 HS의 네임과 문범재 콘서트 무대에 오를 게스트 가수라는 점으로,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 나가고는 있다지만 마냥 그 점만 믿어 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사실 김 실장은 현재 팔불출의 마음이 들끓고 있었다.
‘현승이 커리어에 흠집을 내놓는다면 가만 안 두겠어.’
이내 김 실장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지이이이잉-.
현승이 진동 소리에 피식 웃어 보였다.
“얘네도 양반은 못 되나 보네요.”
그리고는 안지호로부터 온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녹음을 끝낸 이후로 매일같이 자신들이 짜 놓은 안무에 맞춰 라이브로 노래하는 영상을 녹화하여 보내왔다.
안무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전문 안무가가 만든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나 했는데, 노래에 집중하고 싶어서 일부러 단순히 만들었다던가? 핑계가 제법 그럴듯하여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제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했잖아요.”
“근데 안무는 왜 이래?”
“애썼을 테니까, 그냥 좀 넘어가 주세요.”
동영상이 툭 끝이 날 무렵, 다시 한번 문자가 도착했다.
[ 작곡가님, 오늘도 연습 완료했습니다. ]
[ 오늘은 얘기해 주세요. ]
[ 저희한테 정말 곡을 왜 주신 거예요? ]
하여간.
참 악착스러운 놈이다. 녹음을 끝낸 다음 날부터 매일 같이 연습 영상과 함께 곡을 준 저의를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거라고.
곡을 줬고, 부르게 된 거면 그만 아닌가?
“하아….”
김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현승을 바라보다 흘깃 문자로 시선을 옮겼다.
“음? 난 또,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네. 그냥 니들 팬덤이 하도 괴롭혀서 줬다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어?”
“안지호,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낮은 놈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자신감은 더 구겨질 테고, 자존감은 또 얼마나 더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쳐지겠어요?”
“아니, 뭐….”
“하물며 팬덤 사이에서 올나잇이 극성이라고 유명하다면서요? 걔네가 그걸 모르겠어요? 그 와중에 이 사실까지 알게 되면 죄송 하느니, 마느니 할 걸요?”
현승이 제 양팔을 쓱쓱 문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귀찮아요.”
김 실장은 그런 현승을 넋 놓은 채 바라보다 말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
무심하고 제멋대로인 어린애처럼 보여도, 어떨 때는 그릇이 참 커다랗고 단단한 대인배마냥 느껴졌다. 아니, 사실 그게 어떻게 보면 현승의 본모습이겠지.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면 알 수 있는 따듯한 본모습 말이다.
정말이지….
저럴 때 보면 적응 안 된다니까.
* * *
LS 엔터 사옥 앞에 선 안지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랜만이네.”
매일 같이 연습하러 드나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녹음을 끝낸 지 어느덧 한 달이 흘러 사옥의 자태가 퍽 낯설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래, 가자.”
안지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저 ‘감사 인사’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 곡을 준 이유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노라는 목적을 품고 있었다.
터벅, 터벅-.
몇 걸음이나 내디뎠을까?
“저, 저기-!”
한 여성이 달려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자신의 가슴팍 정도 오는 여성은 급하게 뛰어온 탓인지 거친 숨을 연신 몰아 내쉬었다.
“후, 후우, 저, 저기이….”
“숨 쉬시고, 천천히 얘기하셔도 돼요.”
별안간 달려와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 내쉬는 여성을 보며 안지호는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패, 팬이에요-!”
이내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안지호는 화들짝 놀라며 “팬이요?”하고 되물었다.
“네, 정말 더문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었어요. 공연하실 적에 우연히 본 이후로….”
“와, 길거리에서 팬을 만나 뵙게 된 건 처음이라 놀랐어요. 사인해 드릴까요?”
안지호는 팬이라는 여성이 활기를 띠며 “네!”하고 대답하자, 빙그레 웃어 보이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챙겨 다니길 잘했네.’
여성 팬은 안지호가 펜 뚜껑을 이로 물어서 여는 행위만으로도 작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박, 박아영이요!”
“이름도 너무 예쁘네요.”
박아영은 안지호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혼미해졌으며, 미소 한 번에 피가 다 빠져나가 혼절할 뻔했다.
“가, 감사해요.”
이내 종이를 받아 든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제가 더 감사하죠.”
그저 무명 아이돌 그룹 리더의 사인이 종이다. 굳이 따지자면, 구겨서 버려질 한낱 종이 한 장일 뿐이지.
그런데도.
그 종이 한 장을 쥐고 기뻐해 주는 팬이 있다는 사실에, 안지호는 일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휘감겼다,
그래.
늘 입버릇처럼 더문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최고라고 말해 온 안지호였지만….
사실.
자신도 모르게 더문을 한낱 구겨 버려질 종이 정도 따위로 취급해 왔던 모양이다.
아니, 아니지.
자기 자신을 그 정도라고 여겼겠지.
“저, 혹시….”
안지호가 한참 상념에 잠겨 있기도 잠시.
“LS 엔터에는 HS 작곡가님 뵈러 온 거예요?”
그녀가 제 손에 들린 쇼핑백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에 작곡가님 곡 받아서 컴백하시잖아요! 팬인데 당연히 알죠!”
안지호가 바보같이 “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팬이라고 했지.
“그럼 정말 너무 죄송하지만, 이것 좀 대신 전해 주실 수 있어요? 오늘 오빠를 마주칠 줄은 몰라서, 우선 작곡가님 선물만 챙겨 왔거든요.”
그녀는 쇼핑백을 내밀고는 고개를 돌려 LS 엔터 사옥 입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근데 저기 무섭게 생긴 보안요원이 받아 주지를 않아서, 도무지 전해 줄 수가 없었어요.”
“이게 뭐예요?”
“부탁을 들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올나잇이 작곡가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부탁이요? 무슨….”
“저희가 계속 더문한테 곡 달라고 부탁했었거든요. 조공도 좀 넣고, 편지도 보내고-.”
안지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하고 놀라며 되물었다.
“자, 잠깐만요. 그럼 HS 님한테 저희 곡 좀 달라고 계속 부탁해 왔었다는 거예요?”
“네? 네에…, 작곡가님이 얘기 안 하셨어요? 당연히 얘기하셨을 줄 알았는데….”
일순간 귀 너머로 세상이 아득히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돌이켜 보면 아무도 몰라주던 ‘The Moon’이라는 그룹을 찾아 준 것만으로도 이상했다.
그땐 그저 유명 작곡가가 곡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이유도 모른 채 마냥 좋아했었더랬다.
이런 줄도 모르고….
곡도 받고, 도움을 받은 것도 모자라 문범재 콘서트 게스트 가수라는 명예스러운 기회까지 얻게 된 마당에….
자신은 첫 만남부터 철없이 자존심이나 부리고, 껄끄러웠을 그의 속도 모르는 채 연신 추궁해 왔다.
‘쪽팔려….’
당장 떠오르는 말은 그뿐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코끝이 뜨겁게 울려 오는 탓에, 안지호는 고개를 땅에 박을 기세로 푹 숙여 인사를 전했다.
물론, 단순히 코끝 때문만은 아니다.
이 감사한 마음을 다 전하기엔, 이 정도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진 까닭이었다.
“정말 열심히 할 테니까, 앞으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세요.”
그저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팬들이다. 그런 소중한 팬들이 작곡가를 찾아가 애걸복걸했을 걸 생각하면 사무치도록 속상하고, 자존심 상할 일이다.
하나.
지금의 안지호는 그만큼 더욱 잘해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다.
“이제 그런 부탁할 일 없도록, 더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도록 더 잘할게요.”
안지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팬이 전해 준 쇼핑백 손잡이를 꽈악 부여잡았다.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