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3화 (3/853)

제 3장. 검은 돌베개

양준은 먼저 도전한 적이 없었다. 147번 모두 다른 제자가 그에게 도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닷새 간격으로 도전을 받아왔고, 이런 생활이 이 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응상(夏凝裳)은 바닥에 누워 있는 양준을 바라보며 고운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녀는 양준이 왜 이처럼 인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비 제자로 강등되었으면 생계도 어려울 텐데 왜 계속 능소각에 남아있는 거지? 이곳을 떠나면 생활도 훨씬 좋아지겠구만.’

이 가냘픈 몸의 소년은 마음속에 어떤 끈기를 품고 있기에 147번을 연패하고도 여전히 낙담하지 않는 것일까.

하응상이 양준을 주목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는 암당 제자로서 이 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양준이 매번 도전받고 얻어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지켜봤다. 한두 번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녀는 육체 경지 3단계밖에 안 되는 이 소년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소년이 도대체 언제까지 버티다가 능소각을 떠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의 자질이나 수련 속도로는 강호에 남는 것이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일반인의 세계야말로 소년의 안식처였다.

아래쪽은 이미 결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뒤였다. 양준만이 기절한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 사람들이 오갔고, 시간도 하염없이 흘렀다.

하응상은 번쩍하더니 나뭇가지에서 사라졌다.

*양준이 다시 깼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온몸 중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좌우를 둘러보니 지금 있는 곳은 기절했던 위치가 아니었다. 이곳은 기절한 데서 가까운 큰 나무의 그늘 밑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설마 오늘은 어느 동문이 선심을 써서 나를 여기까지 업고 온 건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양준은 눈썹을 찌푸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의식이 흐릿해진 가운데 희미한 그림자가 눈앞에서 일렁이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러나 기억이 모호한 탓에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곳과 쓰러졌던 곳 사이의 뚜렷하게 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는 사람을 땅바닥에 끌고 오면서 생긴 흔적이 틀림없었다.

곧이어 등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화끈화끈하고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양준은 멍해 있다가 이내 속으로 분노했다.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은인에 대한 호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쪽에서 자신을 끌고 온 게 분명했다. 아니면 등이 쓸려 피가 날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그 자리에 내버려 둘 것이지!’

양준은 한창 속상해하고 있던 중, 갑자기 오른손에 무언가가 쥐여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의문이 들어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니,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빚은 작은 자기병 하나가 있었다.

‘이게 뭐지?’

이 자기 병은 절대로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나머지, 입고 있는 옷 외에 가진 거라곤 빗자루밖에 없었다.

자기 병에는 글자가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양준은 이름표를 눈여겨보고서 중얼거렸다.

“어혈연고!”

양준은 어혈연고에 대해서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는 능소각에서 외상을 치료하는 데 쓰는 연고였다. 비록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까지는 아니지만 외상 치료 효과가 뛰어났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제자들마다 모두 하나씩 몸에 지니고 다니는 약이었다. 귀한 연고인 만큼 능소각 보급처에서 파는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공헌치 10점에 한 병을 살 수 있었다.

양준은 한 달 동안 빗자루질을 하여 고작 공헌치 10점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손에 든 연고의 값은 그가 한 달 동안 빗자루질 한 값과 맞먹었다.

‘누구지?’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등의 통증도 갑자기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능소각에 온 지 어언 삼 년이 되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양준은 문파 제자들 사이의 무정함과 세상의 냉정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 다친 그를 위해 어혈연고 한 병을 남겨 주었다. 이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능소각의 제자들이 모두 각박한 건 아니었군.’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한 병의 외상 연고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양준에게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양준은 감동하는 한편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더 희미해질 뿐이었다. 오히려 은은하고 상큼한 향기가 코를 간질이며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연고가 향기로운 거였구나!”

양준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어혈연고를 조심스럽게 가슴팍에 넣었다. 그러고는 빗자루질을 계속했다.

안팎으로 모두 쓸다 보니 점심때가 되어서야 오늘의 일을 끝마쳤다. 양준은 지치고 허기진 몸을 이끌고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싸우면서 생긴 상처는 아직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배고픔을 참고 먼저 상처부터 치료했다.

입고 있던 청색 옷을 벗고, 맑은 물을 떠와 몸부터 닦았다. 만약 누군가 옆에서 양준의 몸 상태를 봤다면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양준의 몸은 비쩍 말라 갈비뼈가 훤히 보일 지경이었으며, 온몸에 살도 별반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영양실조가 분명한 몸 곳곳에는 멍과 상처들뿐이었다.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다.

닷새마다 한 번씩 도전받고 매번 패했다. 또한 매번 맞아서 기절하다 보니 상처가 미처 낫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그 어떤 사람도 아마 이런 통증은 참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준은 참아냈다. 통증을 참아냈을 뿐만 아니라 매일 빗자루질을 하며 수련을 했다. 그는 상처에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

양준은 몸을 깨끗이 닦은 뒤, 어혈연고를 들고서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 역시 향기로웠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져 머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병 마개를 열고 연고를 조금 덜어 상처 난 곳에 바르려 했다. 그 순간 그는 황급히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급히 물 한 사발을 들고 와 손가락에 묻은 연고를 물에 넣고 꼼꼼히 휘저었다. 그런 다음에야 희석한 약물을 상처에 발랐다.

어혈연고는 외상 치료에 효과가 좋았지만, 물에 희석하는 바람에 약효가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양준에게는 연고가 한 병밖에 없었다. 당연히 아껴 써야만 했다.

약물 한 사발을 다 쓰고 나서야, 양준은 상처 처리를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의문스러운 것은 어혈연고에서는 좀 전에 맡았던 것과 달리 향기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운 향이 났다.

양준은 옷을 입은 뒤, 부뚜막에서 까맣게 탄 구운 고구마를 집어 들고 통째로 삼켜 버렸다. 곧이어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지붕에 뚫린 구멍 몇 개로 흘러드는 빛이 오두막을 훤히 비추었다. 방 안에 가구는 단조로웠다. 침대 하나만 놓여 있을 뿐 탁자도, 의자도 없었다. 심지어 침대 위에도 사슴 가죽 이불과 네모난 검은 돌베개 하나뿐이었다. 이것이 양준의 모든 재산이었다.

사슴 가죽 이불은 사슴을 사냥해 가죽을 벗기고 말려서 만든 것이었다. 비록 두껍진 않으나 추위를 막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검은 돌베개는 능소각 뒤에 있는 흑풍(黑風)산맥에 사냥하러 갔다가 주운 것이었다.

검은 돌은 반듯한 것이 길이는 한 장, 두께는 세 손가락 너비였다. 볼 땐 돌 같지만 만져 보면 석질(石質)이 아니었고, 돌처럼 무겁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베개로 하면 안성맞춤이라 더는 고민하지 않고 주워 왔다.

이 검은 돌베개를 베고 잔 지 일 년 남짓했다. 그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돌베개를 베고 자면 잠이 잘 왔다.

양준은 꿈속에서 오늘 낮에 있었던 결투를 보게 되었다. 그는 번번이 주정군에게 맞아 날아갔지만 번번이 다시 일어섰다. 마음속 불굴의 의지와 끈기가 누적되면서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꿈이 지속됨에 따라 가슴속의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지자, 꿈결이지만 얼굴빛이 고통스러워졌다.

아직 꿈속을 헤매던 양준은 미처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베고 있던 검은 돌베개가 깊고 그윽한 빛 한 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감정 기복에 따라 그 빛은 점점 더 커졌다.

꿈속에서 이른 아침의 대결은 지속되고 있었다. 주정군에게 맞아 거듭 쓰러지던 중, 수천 번째로 다시 일어설 때였다. 마음속에 누적되었던 불굴의 의지와 끈기가 삽시간에 폭발했다. 그는 용감하게 달려들어 주정군을 호되게 쓰러뜨렸다. 주정군이 쓰러지는 순간, 그의 얼굴이 흐릿해지더니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양준은 마음이 평온해졌다. 꿈속에서 상대를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겨내고, 마음속의 두려움과 패배감을 이겨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세상에서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더는 없을 것만 같았다.

현실 속, 머리 아래 놓인 검은 돌베개에서 갑자기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빛은 돌베개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공중에서 몇 번 일렁이더니 양준의 이마의 백회혈(白會穴) 속으로 파고들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스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그것은 마치 파도나 눈사태의 기세를 지닌 듯했다. 누구든지 이 기운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양준은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무서운 기운에 놀라 깬 것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양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 꿈에 내가 놀라서 깨다니. 어이가 없네.’

그는 얼굴을 문지르고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고, 현재 시간을 짐작했다.

‘젠장. 두 시진이나 잤잖아. 벌써 저녁때네.’

양준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사슴 가죽 이불을 깔끔하게 개고는 검은 돌베개도 바로잡아 놓았다. 침대에서 내리려던 중,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검은 돌베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촉감이 다른 거 같은데.’

양준은 의문을 품고서 검은 돌베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손대중으로도 훨씬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돌이 왜 갑자기 가벼워졌지?’

양준은 아무렇게나 돌베개를 위로 던졌다. 그리고 던지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두꺼운 책이 공중에 던져진 듯이 책장이 촤라라락 펼쳐졌다. 양준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돌베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양준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멀찍이 바라만 보았다. 검은 돌베개가 책처럼 펼쳐진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거 돌이 아니었나? 어떻게 책으로 바뀐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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