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화 (4/853)

제 4장. 금빛 해골

양준은 한참 뒤에야 허리를 굽혀 검은 책을 주워 들었다.

자세히 한 번 살펴보니, 검은 돌베개가 확실히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책 속에는 아무것도 쓰인 게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책의 재질도 알 수 없었다. 손으로 살짝 찢어 보았지만 전혀 찢기지 않았다.

‘일 년 넘게 베개로 쓰다가 오늘에서야 본모습을 알게 되다니. 그런데 글씨 하나 없는 검은 책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양준은 검은 책을 요리조리 돌려 보았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첫 장을 펼쳤다.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어 두 눈을 부릅뜨고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책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신을 모으는 사이, 방금 전 꿈속에서 느꼈던 스산한 기운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금박으로 새긴 커다란 글자들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혈위인(以血爲引), 금신강림(金身降臨), 신공불성(神功不成), 금신불멸(金身不滅). 피를 바치면 금신이 강림하고, 신공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금신은 불멸한다.]

양준은 검은 책을 후딱 덮었다. 손발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깊게 몇 번 심호흡을 하자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양준은 이 검은 책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흑풍산맥에서 주워온 이 물건이 심상치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고 나서야 다시 검은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첫 장에 금박으로 새겨진 큰 글자 몇 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보니… 꿈이 아니군.’

그리고 다른 몇 줄의 글자도 서서히 나타났다.

[오골금신(傲骨金身), 패자횡란(覇者橫攔), 불굴지혼(不屈之魂), 반능강지(方能降之). 많은 강자들이 금신을 노리고 있으나, 불굴의 의지만이 금신을 항복시킬 수 있다.]

여덟 줄로 된 서른두 개의 글자가 책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양준은 물론 글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검은 책의 출처가 분명치 않아 꺼림칙했다.

‘혹시라도 함정이면 어쩌지?’

양준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멋쩍게 웃고 말았다.

‘나는 지금 능소각의 예비 제자에 불과해. 누가 애써 나를 함정에 빠뜨리겠어?’

글 뒷부분의 뜻만 본다면, 검은 돌베개가 검은 책으로 바뀐 것은 아마 오늘 꿈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돌베개를 일 년 남짓 베고 잤는데 그동안 아무 변화도 없다가 하필이면 딱 오늘, 검은 책으로 변했다. 이는 꿈속에서 자신의 심경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의 심경 변화가 검은 돌베개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었다.

‘내가 검은 책의 변화를 이끌어 냈으니, 검은 책은 나를 위해 생긴 거네. 그럼 내가 바로 검은 책의 주인이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양준은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검은 책에는 분명 피를 바쳐야 금신을 부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시험해 보려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깨문 다음, 다시 검은 책 첫 장으로 가져갔다.

양준의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똑똑 떨어졌다. 처음에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검은 책에는 겹겹의 검은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양준은 원래부터 몸이 약한 데다, 오늘은 앞서 부상까지 당했었다. 그리고 또 한바탕 들볶다 보니 어질어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피는 계속 흘렀고, 책장 위 검은빛도 점점 더 강해졌다.

그제야 책장에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쏟아지던 검은빛이 한바탕 꿈틀거리며 수축하더니 드디어 책장의 한가운데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생겼다.

곧이어 소용돌이 속에서 금빛 한 줄기가 나타났다. 양준은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눈앞의 변화를 눈여겨보았다.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반질반질 윤이 나고 금빛이 반짝이는 물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책장에 진짜 물건이 있었구나!’

비록 피를 떨어뜨리기로 결정하면서 내심 기대를 했지만, 설마 정말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상황은 책장에 적힌 글자가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피를 바치면 금신이 강림한다! 도대체 어떤 금신일까?’

창백한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뒤, 반질반질하고 윤이 나는 물체가 눈앞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양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금신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약 반 자 정도 높이의 금빛 해골이었다. 가장 먼저 보였던 윤이 나는 부분은 뜻밖에도 두개골이었다. 금빛 해골은 가부좌를 한 채 검은 책 위에 떠 있었다. 해골의 뼈마디마다 금빛을 뿜어내는 바람에 오두막은 휘황찬란해졌다.

책장 위의 검은색 소용돌이가 점차 사라지고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양준은 금빛 해골을 바라보며 한동안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책장에는 어떻게 금신을 강림시키는지만 적혀 있고, 금신이 강림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양준은 해골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의 금빛 해골은 분명 눈도, 입도 없었다. 그런데 왠지 해골이 자신을 훑어보며 비웃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런 느낌이 드는 순간, 양준은 분노하여 금빛 해골을 덥석 잡아챘다.

‘해골 따위가 감히 건방지긴!’

그가 손을 대는 순간, 금빛 해골이 정면으로 날아와 그의 손을 뚫고 가슴팍에 부딪쳤다.

이는 너무나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해골은 양준의 몸에 부딪치자 곧이어 강력한 금빛을 발산했다. 금빛 해골은 작은 빛들로 변해 양준의 사지를 포함한 온몸의 모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양준은 몸을 웅크린 채 한동안 경련을 일으켰다.

일순간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사실 이는 착각이 아니었다. 만약 양준이 자기 몸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뼈는 정말 깔끔하게 부서졌다. 부서진 뼈마다 겉면에는 금빛이 둘러싸여 부서져 내리는 골격을 끊임없이 보정했다. 그러나 보정 속도가 파괴 속도보다 훨씬 뒤처진 탓에, 보정하는 순간 다시 부서졌다.

사람의 뼈에는 골수가 들어있다. 골수에는 신경이 있어 약간의 접촉이라도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이 순간 양준이 얼마나 큰 시련을 겪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어느 한곳만 끊어진 것이 아니라 온몸에 성한 뼈가 하나도 없었다.

설령 실력이 양준보다 몇천 배가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고통 속에서는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은 쓰러지지 않았다. 극심한 통증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더 맑게 했다. 이에 따른 대가로 몇천 배 더 큰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오두막에서 새어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고 있던 능소각 제자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허둥지둥 도망쳤다.

은연중, 양준은 금신의 의도를 알아챘다.

‘내 의식을 없애고, 내 몸을 차지하려는 거야.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지. 움직일 수 없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절대 금신에게 내 몸을 빼앗기지 않을 거야.’

금신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금신은 거듭 뼈를 부서뜨리며 골수 속의 신경을 건드려 그를 기절시키려 했다.

하나는 금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몸이었다. 승부는 마지막에 이르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양준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사활이 걸렸음을 알고 있었다. 이는 동문 사이의 도전과는 전혀 달랐다. 만약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더는 양준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아파도 반드시 이겨내야만 했다.

양준의 의식과 금신의 파괴력, 양자는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전장은 바로 양준의 몸이었다. 양자는 주거니 받거니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준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점차 가라앉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고 기운이 넘쳐났다.

금신은 양준의 뼈를 부서뜨린 뒤, 거듭해 보정했다. 부서뜨리고 보정하는 과정에서 양준의 몸은 금신의 요소를 구비하게 되었다. 그의 골격은 점점 더 강해졌고 금신의 힘은 점점 더 약해졌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통증도 점차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 금신이 온전히 양준의 몸속에 스며드는 순간, 이 싸움은 끝나는 것이었다.

승리의 저울추는 점점 양준 쪽으로 기울어졌다. 견딜 수 없었던 통증은 점차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다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으로, 끝내는 비할 바 없는 쾌적함으로 바뀌었다. 이 느낌은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온몸의 무수한 모공이 모두 활짝 열리게 했다.

몸속의 금신이 마지막 힘을 모아 끝까지 완강하게 버티려는 것이 느껴지자, 양준은 욕을 한마디 내뱉으며 의식으로 단숨에 뭉개 버렸다.

양준의 몸은 드디어 평온해졌다.

귓가에 탄식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탄식 소리에는 대견함 가운데 후련함도 섞여 있었다.

양준은 조용히 한 시진 정도 바닥에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방금 전에 있던 싸움으로 그는 이미 모든 체력을 소모했다. 한 시진 전의 일들을 떠올리자 양준은 그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몰래 자신의 몸을 꼬집어 보니 좀 아픈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검은 책의 정체는 또 뭐고?”

양준은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신의 몸의 변화를 알아챘다. 하루 세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데다 닷새에 한 번씩 모질게 매질을 당하다 보니 그는 줄곧 몸이 약했었다. 그런데 지금 양준은 몸에 생기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뜨뜻한 기운이 몸 안에서부터 밖으로 발산되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개운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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