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기왕 도와준 거 끝까지 도와줘야지
곧이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얼굴에 생기라고는 없고, 나타나면서부터 줄곧 신음 소리를 내며 당장 황천길로 갈 것처럼 굴던 독에 ‘중독’되었다던 사내가 주먹이 날아오자 날랜 몸짓으로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얼굴의 창백함도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구경꾼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중독이라고? 중독되고도 이런 솜씨를 가졌다니, 탄복할 만한 일이군.”
소년은 두 사내를 비꼬았다.
두 사내는 간계가 까발려지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정말 중독된 것 같았다.
구경꾼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보고 어찌 내막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 두 사내는 무슨 목적에서인지 중독된 척하며 하씨 쌀가게의 명성을 더럽히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의문의 소년에게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한순간 장내는 두 사내에 대한 경멸과 소년에 대한 찬사로 들끓었다. 이 소년은 생김새부터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이번 일을 통해 이곳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양준은 어렴풋이 짚이는 데가 있었다.
‘짜고 치는 연극이나 다름없군. 강자를 제거하고 약한 자를 돕는 의로운 협객 설정에 이어 도움을 줬다고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하겠지!’
쌀가게로 오는 길에 우연히 골목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자신도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두 사내는 거짓말이 소용없게 되자 소년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냐? 감히 남의 일에 끼어들다니.”
소년은 품위 있고 당당하게 말했다.
“능소각의 제자 소무영(蘇木)이다!”
능소각이라는 말에 그중 한 사내가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능소각 제자였군. 어쩐지 비범하다 했어. 오늘은 우리가 운이 없었군. 기다려,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거야!”
‘뭐야?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유치한 대사들은?’
양준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소무영은 냉소하며 말했다.
“잘 가.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지!”
일이 여기까지 진행됐으니 이변이 없는 한, 두 사내는 아마 자리를 뜰 것이고, 소무영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을 것이다. 특히 하 주인은 더욱 감격해할 것이다.
그러나 양준은 하 주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두 사내가 자리를 뜨기 전에 서둘러 외쳤다.
“저들을 그냥 보내면 안 됩니다. 이 소인배들은 비열한 수단으로 착한 상인을 모함했습니다. 오늘은 하씨 쌀가게지만, 만약 혼쭐을 내주지 않는다면 내일은 유(劉)씨 옷 가게나 장(蔣)씨 잡화점이 될 겁니다.”
구경꾼 대부분은 인근 가게의 주인들이었다. 본래는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모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섬뜩해졌다.
‘맞다. 저 두 소인배를 이리 쉽게 보내면 안 돼. 지금 놔주면 내일은 우리 가게로 와서 행패를 부릴 수도 있잖아. 그럼 돈도 잃고 평판도 나빠질 거 아니야. 하 주인처럼 운이 좋아 때맞춰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리도 없고.’
여기까지 생각하자, 길을 내어 주려던 사람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섰다. 모두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내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소무영의 눈빛에서 그가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소무영도 양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소무영은 곧 표정 관리를 했다.
양준은 그에게 가볍게 웃어 보이며 등을 떠밀었다.
“사제, 기왕 도와줄 바에는 끝까지 도와주라는 말이 있지. 우리 둘이서 저놈들을 처치하는 건 어떤가?”
소무영은 말라서 바람이 불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을 한 소년이 뜻밖에도 자신을 사제라고 부르며 나선 데다가 원래 계획도 틀어지자,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누가 당신 사제야!?”
양준이 대답했다.
“나도 능소각의 제자다. 종문에 들어온 지는 삼 년 됐어.”
소무영은 어이가 없었다.
‘진짜 사형이네.’
“쓸데없는 소리는 이만하고.”
양준은 앞으로 나서며 당당하게 말했다.
“강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협심이지. 의협심을 발휘해 의로운 일을 하는 건 우리 본분이고 말이야. 오늘 우리 둘이 협동해서 저 두 소인배를 제압하자. 그래서 하 주인, 그리고 오매진을 위해 정의를 되찾자고.”
이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갈채를 보냈다.
반면 소무영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생면부지 사형이 나를 함정으로 떠미네. 이제는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가 없잖아.’
두 사내도 이쪽을 두리번거렸다. 소무영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언뜻 보았다. 저도 모르게 찝찝했다.
“사제, 가자!”
양준은 소무영의 어깨를 잡고 곧장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소무영은 그냥 울고 싶었다.
‘이건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사형이길래, 남 일을 다 망치는 거야!’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소무영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두 사내에게 달려가는 한편, 그들에게 눈짓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면 기회를 봐서 보내주겠다는 뜻이었다.
두 사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나 모든 게 양준의 눈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하 주인은 양준이 피해를 볼까 걱정되어 저울추를 집어 들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여러분, 구경만 하지 말고 두 사람을 도웁시다.”
하 주인이 나서자, 쌀가게의 점원도 고함을 지르며 따라나섰다. 그는 빈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달려갔다. 방금 전에 그는 두 사내 중 한 명에게 걷어차였다. 당연히 이 기회에 복수하려 했다.
하 주인이 소리치자 구경꾼들은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하씨 쌀가게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두 사내는 처음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보자 금세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굴은 때리지 마!”
이 한마디를 외치고, 두 사람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바탕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 상인들은 모두 일반인이었지만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상인 대부분이 조금씩 돈을 갈취당한 적이 있어 평소 이런 불량배들을 매우 증오했다. 지금 화풀이 대상이 있는데 어찌 가만둘 수 있겠는가?
특히 하씨 쌀가게 점원은 손에 들었던 자루로 각기 한 사람씩 덮어씌우고는 마구 두들겨 팼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더욱 심하게 때렸다. 어차피 두 사내는 누가 자기를 때렸는지 볼 수 없었기에, 나중에 찾아와 보복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힘도 배가 된다. 양준은 자세만 잡았을 뿐 미처 손을 대지도 못한 채 상인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상인들은 슬슬 손을 떼었다. 두 사내만 땅바닥에 웅크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머리에 뒤집어씌웠던 자루도 언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무영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순간, 발바닥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
‘아이고. 이게 뭐냐!’
원래 건장하고 덩치가 큰 두 사내는 얻어터져 얼굴이 부어올라 있었다. 그들의 친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렇게 된 데는 사실 두 사내가 아무 실력도 없기 때문도 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지만 허세에 불과했다. 무인이라면 일반인들의 공격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리고 진정한 고수라면 이리 더러운 짓을 할 리도 없었다.
두 사람을 쓰러뜨린 상인들은 모두 시원하게 화풀이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쪽에 서서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두 사내는 사람들의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중 한 사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소무영을 가리키며 힘없이 소리쳤다.
“소…….”
소무영은 얼굴빛이 크게 변하며 소리쳤다.
“소는 무슨 소, 왜 더 맞고 싶어?”
양준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비열한 소인배들! 이런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상인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지…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양준의 이 말은 너무 부풀린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상인이다 보니 순간 착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씨 쌀가게의 점원이 한마디 덧붙였다.
“퉤, 감히 우리 쌀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맞아 죽어도 싸다.”
점원도 그냥 화풀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준이 곧 그의 말을 이었다.
“맞아요. 이런 사람들은 맞아 죽어도 싸죠. 사제, 우리 한 명씩 책임지고 단칼에 죽이자고. 다신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구현하는 거야.”
이 말에 장내 모든 이가 놀랐다. 땅에 쓰러져 있던 두 사내는 이마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놀란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왜소한 소년이 이렇게 잔인한 심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소무영은 눈을 크게 뜨고 양준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농담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준은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사내는 비록 죄를 짓긴 했지만 죽을죄까지는 아니었다. 양준의 이 말은 너무나 잔인했다.
소무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형, 그건 너무 심한 거 같은데?”
“심하다고?”
양준은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만약 오늘 저자들이 목적을 이루었으면 하씨 쌀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을 거야. 그러면 그들 한집 식구는 무엇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는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은 거잖아. 그런 데도 저들을 죽이는 게 심한 거야?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야.”
원래 상인들은 양준이 사람을 죽이자고 하자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 보니 또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사람을 죽인다 해도 그들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모두 강 건너 불구경하기로 결정했다. 오직 하 주인만이 입을 열려 했으나 양준이 눈빛으로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