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장. 1승을 거두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주먹질 두 번과 발길질 한 번에 육체 경지 5단계인 조호가 나가떨어졌다. 이게 육체 경지 3단계가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인가?
비록 조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있었다고 하지만 이 힘은 너무나도 강했다. 조호 같은 덩치의 사내가 몇 척의 거리를 날아갔는데 힘없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 속도도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방금 전까지 경멸 어린 미소로 웃던 조호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오두막 앞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두 눈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나무 꼭대기 위에 서서 전적을 기록하던 하응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책에는 양준의 모든 전적이 쓰여있었다. 이 년의 시간 동안 무승 147패를 기록했는데 오늘 그 기록을 다시 쓰게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깔끔하게 이기다니. 하응상은 원래 뛰어난 자태로 나뭇가지를 가뿐하게 밟고 서 있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들이쉬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몸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촤르륵-
얼굴을 가린 여인이 삼척 높이의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야!”
다행히 그녀가 민첩한 몸놀림으로 마지막에 몸을 돌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크게 다칠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엉덩이가 화끈거려서 그녀는 맑고 예쁜 눈에 물기를 머금은 채 입을 앙다물었다.
아픔을 꾹 참고 천천히 일어난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다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응상은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도 자신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런 모습을 남이 보았더라면 정말 망신이었다.
원기(元氣)를 사용해 엉덩이의 통증을 가라앉힌 하응상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생각에 잠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겨우 며칠 만에 양준의 실력이 이렇게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구경하는 사람들의 실력이 높지 않아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도 하응상의 눈썰미가 어찌 보통 사람들과 비할 수 있겠는가?
양준이 공격하는 순간, 하응상은 그의 경맥 중에서 기감이 꿈틀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감을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육체 경지 4단계에 돌입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양준의 실력을 보니 4단계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육체 경지 3단계였잖아? 실력을 감추고 있었구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나무에서 떨어지게 하다니, 정말 괘씸해!’
하응상은 엉덩이의 아픔을 양준에게 뒤집어씌웠다.
양준은 하응상이 몸을 숨긴 곳을 힐끔 쳐다보았다. 방금 전, 하응상의 짧은 외마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뭔가 불만스러운 모습이었다.
양준은 금신을 얻은 뒤, 처음으로 누군가와 겨루는 자리였는데 일시적으로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조호를 날려버린 것이다. 원래 그저 상대방의 몸을 움직이게 할 생각이었는데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더 강한데.’
자리에 있던 소무영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양준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너 꼼수를 부린 거지!”
양준은 느긋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 사제,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내가 무슨 꼼수를 부렸다는 거야?”
소무영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긴 하지. 무슨 꼼수를 부렸다는 거지? 조호가 스스로 으스대며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것이고, 방자하게 세 수를 양보하겠다고 했던 거지. 그런데 정말 세 수만에 조호를 이겨버렸잖아.’
뻔히 사람들 앞에서 발생한 일인데 어떻게 꼼수를 부렸다는 말이고 또 어떻게 꼼수를 부릴 수 있었겠는가?
“소 공자,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듯합니다. 저 녀석의 실력은 육체 경지 3단계가 아닌데요! 아마도 경지가 오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조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눈치 빠른 제자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낮은 목소리로 소무영에게 말했다.
“그런 거였군.”
소무영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호가 너무 방심했어. 제대로 상대했더라면 어떻게 패할 수 있겠어?”
소무영이 생각하기에 조호가 이번에 진 것은 순전히 방심한 탓이었다. 양준이 경지가 올랐다고 해도 육체 경지 4단계에 불과하니 조호와 실력 차이가 있었다. 제대로 싸웠다면 양준이 패할 것이 뻔했다.
“양 사형, 잘도 감추고 있었군!”
소무영은 음산한 시선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오늘 화풀이에 성공하지 못한 그는 여전히 분한 얼굴이었다.
양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앞으로 볼 날이 많을 것 같은데, 다음에는 이렇게 운이 좋지 못할 거야!”
소무영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사람들을 거느린 채 돌아갔다. 그의 수하 한 명은 기절한 조호를 둘러업고 떠나면서 양준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척을 지게 되었지만 양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문파의 규칙에 의하면 그들이 트집을 잡고 싶다면 자신에게 도전하러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도 누군가와 겨루어 보아야 수련의 성과를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양준은 소무영과 척을 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의 겨루기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휴, 만족스럽지 못하네.’
소무영이 사라지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이 년간 한 번도 승리를 맛보지 못했던 예비 제자 양준이 오늘 1승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중에는 요령도 있었지만 이긴 것은 이긴 것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싸움을 구경하던 일반 제자들 사이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소무영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마다 돌아다니며 소문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소무영과 연관된 일인지라 사람들은 눈치껏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못했다. 그저 오늘의 일을 마음속으로만 되새길 뿐이었다.
*오두막 앞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하늘을 보니 양준은 마음이 울적해졌다. 소무영 때문에 지체되다 보니 이미 육체편을 수련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옷을 꺼낸 뒤, 옆에 있는 연못으로 달려가 망가진 옷을 벗고 목욕을 하려고 했다. 며칠 산에서 돌아다니고 또 얼룩등거미와 싸우다 보니 몸에서는 괴상한 냄새가 났다.
하응상은 몰래 오두막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이 사제가 지금 도대체 어느 경지에 도달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방금 전,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잘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두막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두막을 둘러보는 하응상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엉덩이 두 짝이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양준이 옷을 홀딱 벗고 물에 뛰어들려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하응상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비록 그녀는 무공 실력은 뛰어났지만 아직 남녀의 정을 통해 본 적이 없는 소녀였다. 엉덩이는커녕 남자의 허벅지조차 본 적이 없는 그녀인데 갑자기 이런 장면을 보고서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너무 자극적이잖아!’
하응상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여 다급히 몸을 숨겼다.
‘오늘 왜 자꾸… 그 부위와 엮이는 거지?’
그녀는 양준의 비밀을 알아보려는 생각을 접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 못된 사제 같으니라고. 대낮에 이렇게 조심성 없이 훌떡 벗기나 하고. 부끄러움도 모르나!?’
*한편 양준은 목욕을 하면서 몸을 살펴보았다.
그는 육체편을 수련한 뒤로 몸의 근육이 예전보다 많이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비록 여전히 마른 몸이었지만 강인한 느낌이 드는 몸매였다.
그리고 어제 싸움에서 얼룩등거미가 복부에 남겨놓은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있었다. 얼룩등거미에게 관통 당한 팔뚝만 약간씩 아플 따름이었다.
관통 당한 상처인지라 그렇게 빨리 나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것처럼 심하지도 않았다. 상태를 보니 며칠만 치료하면 완전히 나을 것 같았다.
어제 목숨을 건 싸움을 떠올리자 양준은 또 몹시 흥분되었다. 왠지 모르게 위험에 닥칠수록 기운이 샘솟았다. 그는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 내 잠재의식 속에 이렇게 학대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나? 십몇 년 만에 갑자기 각성된 건가?’
급한 일이 많았지만 양준은 목욕을 마친 뒤, 옷을 입고 나서 빗자루를 들고 빗자루질을 하러 갔다. 이는 그가 능소각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이 일을 맡았으니 열심히 해야 했다.
빗자루질을 할 때, 양준은 오늘따라 자신을 바라보는 동문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아침에 양준의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조호를 기절시켰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양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빗자루질을 마친 양준은 오두막으로 돌아와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서 필요한 삼엽잔혼화와 절지고목초를 꺼내고 다른 것은 도로 넣었다.
이 남은 약초들은 딱히 쓸데가 없으면 공헌당에 팔아 공헌치로 바꿀 수도 있었다.
보따리를 쥔 양준이 나가려다가 잠깐 생각하고는 핏자국으로 가득한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또 얼굴까지 잔뜩 더럽히고 나서야 공헌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