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1화 (21/853)

제 21장. 이운천의 계획

이운천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몹시 반가운 듯 진심 어린 말투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운천은 붙임성이 좋게 양준의 손을 덥석 잡고 힘껏 흔들었다.

“양 사형, 어제 조호 그 녀석을 실컷 혼내줬다면서요? 정말 마음이 통쾌해지네요.”

“왜? 너 그 자와 원한이라도 있어?”

양준이 그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운천은 차가운 낯빛으로 말했다.

“원한이 있죠. 그놈은 인면수심에다 졸렬해요. 전에도 저에게 수치를 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넌 왜 복수를 하지 않은 거야?”

양준이 의심쩍어 하며 물었다.

“전 자면서도 늘 복수하고 싶죠. 하지만…….”

이운천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양 사형께서도 아시다시피 조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고작 조호 하나라면 제가 어찌해 볼 텐데 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은 제가 감히 건드릴 수가 없어요.”

“그렇지.”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무영에게는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 제자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양 사형께서 어제 조호를 혼내 준 것이 저를 대신해 분풀이를 해 준 것입니다.”

이운천은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동문끼리 겨루어 본 것뿐이야.”

양준이 미소를 지었다.

이운천이 또 말을 이었다.

“조호를 이긴 걸 보니 사형께서 실력이 좋으신가 봐요.”

양준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별것 아니야.”

이운천은 속으로 냉소를 하였다.

‘어쩌다 바른 말을 하네. 어제 네가 꼼수를 부리지 않았다면 조호가 졌을 리 없지.’

하지만 그는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양준의 의심을 산다면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사형, 겸손하시긴요. 사실 저는 평소 다른 사람과 겨루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양 사형에게 은혜도 입은 데다 오늘 마주치기까지 했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죠.”

이운천은 한참 빙빙 돌리더니 이제야 찾아온 의도를 밝혔다.

양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와 겨루어 보겠다는 거야?”

이운천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사형께서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사형이 어제 어떻게 조호를 혼내줬는지 그 실력을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이유가 참 억지스러웠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난 평소 사람들과 겨루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이운천은 애가 탔다.

“그럼 안 되죠. 사형께서는 오늘 꼭 저랑 겨루셔야 돼요!”

양준은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운천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방금 전, 마음이 너무 급한 탓에 말투가 좀 과격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다급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무예를 미친 듯이 좋아해서 하루라도 누군가와 겨루지 않는다면 몸이 근질거리거든요. 사형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양준은 다시 한번 거절했다.

“왜 아닌 것 같다는 건가요?”

“아무 이유도 없이…….”

이운천은 양준의 마음이 살짝 움직인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동문끼리 겨루면서 서로 배운 것을 검증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요? 우리 둘에게 모두 좋은 거예요.”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되겠어. 안돼, 안돼.”

양준은 연신 손을 내저었다.

이운천은 속으로 조급해졌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사형께서는 혹시 결투에 져서 공헌치가 깎일까 봐 그러시는 거죠?”

이운천의 질문에 양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운천이 자기가 맞춘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사형,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둘의 실력이 비슷할 테니 누가 이기고 지고는 확신할 수 없죠. 만약 정말 운이 좋아 제가 이긴다면 사형이 손해 본 만큼 제가 배상하죠.”

“정말?”

양준은 좀 뜻밖이었다.

“당연하죠!”

이운천은 양준이 속아넘어간 줄 알고 권법을 펼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소무영이 멀지 않은 곳에서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양준을 단단히 혼내서 소무영의 화풀이를 해준다면 그의 체면은 크게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양준은 또 한 번 미간을 찌푸렸다. 이운천은 하마터면 화가 나 욕설을 퍼부을 뻔했다.

‘이 사형은 우물쭈물하는 것이 참 짜증 나게 하네. 조호는 왜 이런 사람에게 패한 거지?’

“사형,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이운천은 이미 폭발할 한계에 도달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너와 겨루고 싶지만 어제 이미 다른 사람에게 도전 당했어. 또 싸우려면 며칠 기다려야 해.”

‘이 사람은 바보인가!?’

이운천은 하마터면 답답해서 숨이 멎을 뻔했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사형, 저한테 도전할 수 있어요. 전 이 며칠간 누구에게 도전 당한 적이 없어요. 능소각의 제자는 매일 남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요?”

“아, 그렇지!”

양준은 깜짝 놀라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여태까지 누구에게 도전해 본 적이 없어서 규칙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이운천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치 마음속의 분노를 토해내려는 듯싶었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사형, 그럼 지금 바로 겨루기를 시작하는 거죠?”

양준이 또 머뭇거렸다.

“사제, 만약 내가 진다면 정말 내 공헌치를 배상해 줄 거지?”

“배상할게요! 반드시 배상할게요. 그것도 열 배로 배상할게요!”

이운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못 믿겠어. 아니면 먼저 공헌치를 나에게 줘.”

“어떻게 공헌치를 지금 바로 줍니까?”

이운천은 갑갑해 죽을 것 같았다. 공헌치는 모두 장부에 기록되는 것이지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형은 너무 쩨쩨하잖아. 설마 내가 잡아떼고 주지 않을까 봐 이러는 거야?’

이운천은 안색이 여러 번 변했다.

“그럼 공헌치 대신 다른 걸로 배상해 줄 수 있어? 내가 사제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양준은 주저하며 말을 하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운천이 어찌 그의 뜻을 모르겠는가. 그는 속으로 양준을 경멸했지만 계획을 위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사형.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금방 바꿔 올게요. 꼭 기다리세요.”

이운천은 말하면서 다급히 뛰어갔다.

사라지는 이운천의 뒷모습을 보면서 양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찾아와 얻어맞으려고 사정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말로는 먹히지 않자 뭔가를 주면서까지 사정하는군. 그래도 이렇게 당장 급한 불을 끄게 되었으니 다행이야. 이런 수도 한 번밖에 쓸 수가 없으니 좀 아쉽군. 다음에는 못 쓰겠지?’

순간, 양준은 좀 후회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큰 걸 요구할 걸 그랬어. 이운천의 급박한 모습을 보면, 내가 좀 더 과한 요구를 했어도 다 들어줬을 것 같은데.’

소무영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었다. 그는 이운천과 양준이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몰래 즐거워했다. 두 눈 크게 뜨고 재미있는 볼거리를 즐길 생각이었는데 잠시 뒤, 이운천이 다급히 떠나는 것을 보고 소무영은 어리둥절해졌다.

‘어제 계획에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이운천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소무영은 의아해하며 다른 수하에게 상황을 알아오게 했다.

잠시 뒤, 이운천에게 갔던 수하가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소무영에게 말했다.

“소 공자, 이운천이 말하기를, 양준이 먼저 공헌당에 가서 약초 열 포기를 바꿔다 주면 이운천과 겨루겠다고 했답니다.”

“너무 쩨쩨한데?”

소무영은 입이 떡 벌어졌다.

“양준은 예비 제자에 불과해서 싸움에서 패한다고 해도 공헌치를 1점밖에 손해 보지 않는데 왜 약초를 열 포기나 배상하라는 거야?”

“이운천이 먼저 열 배로 배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답니다. 그래서…….”

“이런 멍청이!”

소무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괜찮아, 양준을 혼내줄 수만 있다면 약초 열 포기가 뭔 대수겠어.”

약초 열 포기라고 해도 공헌치 10점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소무영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상황을 알게 된 뒤, 꼼짝도 하지 않고 애타게 기다렸다.

반 시진 뒤, 양준이 빗자루질을 거의 마칠 무렵, 이운천이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달려왔다. 공헌당과의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공헌당의 몽 주인이 잠을 자고 있었던 탓에 문을 한참이나 두드려서야 그를 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몽 주인은 야한 꿈을 꾸고 있던 중, 잠에서 깨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운천은 양준을 혼내기 전에 먼저 몽 주인에게 된통 당했다. 범급 하품 약초를 공헌치 20점을 써서야 겨우 바꿔올 수 있었다.

이운천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는 반드시 양준에게 이자까지 쳐서 대갚음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약속한 곳에 도착하니 양준은 떠나지 않고 빗자루를 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운천은 성큼성큼 걸어가 숨을 헐떡이며 양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약초 열 포기를 건네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 세어 보세요.”

“하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양준은 약초를 받고는 보지도 않고 빗자루와 함께 땅에 두었다.

“사형, 그럼 이제 겨루어 볼 수 있는 거죠?”

이운천이 물었다.

“그래.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사제의 말이라면 사형으로서 당연히 믿었을 거야.”

양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운천은 화가 나 하마터면 뚜껑이 열릴 뻔했다.

‘먼저 약초 얘기를 꺼낸 것도 너고, 믿을 수 없다던 것도 너잖아. 좋은 말, 안 좋은 말 다 혼자서 하네. 내가 아침부터 바빠서 밥 한 술 못 먹었는데 지금 헛걸음을 한 거야?’

이운천은 숨을 씩씩 거리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오늘의 목표 절반을 이룬 셈이었다. 양준이 그에게 도전하기만 한다면 그는 절대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