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7화 (27/853)

제 27장. 소무영의 전서

양준의 말을 들은 십일 장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보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러 온 것이란다.”

“사람이요?”

십일 장로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늙으니 말이 많아지는군.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해 주마. 수련을 열심히 하되 절대 이 아래로 내려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아래에는 위험이 많아 나라도 쉽사리 내려가지 못하는 곳이란다.”

말을 마친 십일 장로는 홀연히 떠났다. 양준은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양준은 다시 바닥에 앉아 계속해서 진양결을 운행했다. 다시 진양결을 운행하자 양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전보다 빨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시진 뒤, 양준은 갑자기 경맥이 붓는 느낌이 들었다. 단전까지도 꽉 찬 것이 밥을 과하게 먹어 체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득 찬 건가?’

양준은 놀라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더욱 열심히 수련하기 시작했다.

반 시진 뒤, 경맥과 단전이 가벼워지더니 붓는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몸의 원기가 이 순간 전부 단전 안으로 들어가더니 뜨거운 액체가 만들어졌다. 심지어 양준은 찰랑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양액이야!

그는 드디어 첫 번째 양액을 만들어냈다!

아직 신식(神识)의 경지까지는 수련하지 못했지만, 양준은 단전 안의 양액의 존재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여러 날 동안 고생해서 겨우 양액 한 방울이 만들어졌지만, 양준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흥분된 마음을 안고 더더욱 노력하여 곤룡골에서 또 하룻밤 수련하였다.

새벽에 깨어난 양준은 수련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았다.

그동안 줄곧 이렇게 식음을 전폐하며 수련하다 보니 실력은 많이 강해졌지만, 몸에 과부하가 왔다. 수련하는 길은 팽팽하기도 하고 느슨하기도 해야 그 어떤 폐해도 남겨 두지 않을 수 있었다.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턴 양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오두막에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오두막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양준은 의아했다. 분명 그는 가기 전에 문을 잘 잠근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밀고 안을 힐끗 살펴본 양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그림처럼 현실 같지 않고 몽환적이었다.

그의 오두막 안 유일한 침대 위에 한 사람이, 그것도 한 여인이 잠을 자고 있었다.

달빛이 지붕에 난 구멍을 뚫고 오두막 안으로 쏟아져 마침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여인의 몸을 비추었다. 달빛을 빌려 양준은 이 여인이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포개 놓은 것이 보였다. 또 눈처럼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이 달빛에 투명하게 빛났다. 늘어뜨린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냘픈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누워 있는 탓에 양준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에 아주 얇은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매끈한 이마 위를 장식한 하늘색 보석은 그녀의 몸에 있는 유일한 장신구였다. 귀중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맑음과 고결함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몽롱한 달빛은 그녀에게 안개에 휩싸인 듯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마치 월궁(月宮)에서 떨어진 선녀처럼 온몸에 잡티 하나 없었고, 신성한 고귀함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양준은 왠지 마음이 시큰거렸다.

양준은 스스로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 그의 마음을 절절하게 울렸다. 세월이 흘러 수십 년 뒤에도 그는 영원히 이 장면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귀신에 홀린 듯, 양준은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놀랄까 봐 가쁜 호흡 소리와 심장의 두근거림을 억눌렀다.

침대 옆에서 일 척 되는 거리에 멈춘 뒤, 양준은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가 예상한 대로 이 여인은 그날 공헌당에서 그와 부딪힐 뻔한 그 사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이 면사포를 봤을 때부터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고개를 들어 지붕에 난 구멍을 본 양준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줄곧 메우지 못한 구멍이 오늘 좋은 일을 한 셈이었다.

그가 웃는 바람에 침대에 누워 있던 하응상이 깨어났다. 양준이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사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커다란 두 눈에는 먼저 당혹감이 보이더니 곧이어 수줍어하기 시작했다. 거의 눈 깜짝할 새에 하응상의 귓불은 또다시 빨개졌다.

다행히 밤이라서 양준은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응상은 몹시 어색해졌다.

한 사람은 침대 위에서, 다른 한 사람은 침대 밖에서 그렇게 마주 보고 있었다.

하응상은 자신의 뺨을 쳐서라도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멍청하게 여기서 잠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흠흠…….”

양준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인자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사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 말을 하는 양준의 목소리는 좀 들떠 있었다. 야심한 밤에 남녀가 한 방에 있는 환경에서 듣기에는 좀 이상했다.

호색가 기질이 다분한 말투였다.

하응상은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여전히 조신하게 침대에 앉아서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 씨야…….”

하응상은 차마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너무 창피했던 것이다.

“하 사저였군요. 하 사저께서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용건이 없다면 이 선녀같이 고귀하신 분이 어찌 나의 누추한 오두막에 납셨겠어?’

양준이 묻자 그제야 하응상은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히 옆에서 보따리를 꺼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흑풍산 아래의 사냥꾼이 널 찾아왔어. 하지만 등불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도 네가 돌아오지 않자 조급해하더라고. 내가 가서 물어보니 너에게 목숨을 빚졌는데 나더러 이 물건을 넘겨주라고 하더라. 앞으로 시간이 나면 다시 직접 감사를 표하러 오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듣고, 양준은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사냥꾼 장산이었다! 지난번 흑풍산에서 약초를 캐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 부자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양준은 손을 뻗어 보따리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하응상은 살며시 시선을 들어 그를 힐끔 훑어보고는 또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의 부탁을 받고 여기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어. 그래서 기다리다가…….”

그녀는 기다리다가 잠들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 자기까지 했다.

양준은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확실하게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사저께서 고생하셨군요. 다음부터 반드시 일찍 돌아오겠습니다.”

하응상은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일부러 노린 건지 이 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마치 남편이 외출 전에 아내에게 하는 말 같았다. 가볍게 입술을 깨문 하응상은 여전히 불만스럽게 말했다.

“일찍 오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지. 보따리를 넘겨주었으니 난 이만 가겠어.”

말을 마친 그녀가 엉덩이를 돌리고 발을 구르자 그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향긋한 내음만 남아 방 안에 맴돌았다.

‘이 사저는 참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군.’

방금 전의 모습을 떠올리자 양준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장산이 남긴 보따리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청색 장삼(長衫) 두 벌이 들어 있었다.

이 장삼은 한 땀 한 땀 손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 정교한 기교에 양준은 이 옷들을 장산의 아내가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선물을 주다니.’

지난번 얼룩등거미와 싸우면서 그의 옷은 요수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었다. 바로 그 때문에 장산이 그에게 옷 두 벌을 지어 준 것이었다.

양준은 슬며시 웃고는 물건을 잘 챙기고 침대에 누웠다.

이날 밤, 양준은 달콤하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양준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연 양준은 문밖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멀리서 익숙한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운천의 그림자였다.

‘저 녀석 뭐 하는 짓이지?’

양준은 의아했다. 바로 그때, 그는 편지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편지를 열어 본 그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편지에는 피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형께서는 보시오. 며칠 보지 못했더니 사형이 몹시 그리워 흑풍림(黑風林)으로 초대합니다. 사형께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 소무영이 직접 올립니다.]

이 붉은 글씨는 피로 쓴 것이 분명했다. 다만 닭 피로 쓴 것인지 다른 피로 쓴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을 뿐이었다. 양준은 소무영이 자신의 피로 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뒤에도 한 줄이 더 있었다. 그러나 앞쪽의 예의 바른 문구와는 달리 이 글은 더욱 거칠고 직설적이었다.

[겁먹은 게 아니라면 꼭 와!]

이 글은 필체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있어 도발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소무영은 자신의 초대가 양준에게 무시당할까 걱정되어 마지막에 한마디를 더 쓴 것이었다. 소년이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극 요법이었다. 소무영은 직접 여러 번 체험해 보아서 경험이 풍부했다.

혈서로 된 전서를 손에 들고서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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