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장.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양준은 말하면서 회원단 병을 꺼냈다.
“단약으로 바꿔도 되죠?”
흑풍시장에는 물물교환 규정이 있었다. 완제품인 단약도 유통이 가능했다.
“가능해.”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에 회원단 열 알이 있으니 거의 오백 냥이 될 겁니다. 확인해 보세요.”
양준은 회원단을 그에게 던져준 뒤, 가판대에서 양염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양준은 돌을 손에 쥐는 순간, 세차게 끓어오르는 양기의 힘을 느끼고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역시 잘한 거래였어.’
호미아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양준의 이 행동은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그녀가 방금 베푼 호의도 헛짓이 되었다.
주인은 눈치가 빨랐다. 평판이 별로 안 좋은 아가씨가 양준을 꼬시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비록 방금 전 거래는 공정했지만, 아가씨는 그다지 기쁜 내색이 없었다. 주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가판대에서 물건 하나를 집어 들고 말했다.
“별거 아니지만 이 씨앗을 덤으로 주지. 팔아도 어차피 몇 푼 되지도 않으니까.”
“무슨 씨앗인데요?”
양준은 씨앗을 건네받았다. 씨앗에서 뜻밖에 약간의 양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양기가 아주 미약했다.
“삼양과(三陽果) 씨앗이야. 양염석을 캐다가 주웠지.”
주인은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이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은 지급 하품 영과야. 단지 성장기가 좀 길뿐이지.”
양준은 실소했다.
‘씨앗 한 알을 가지고 뭘 하라고? 이걸 심는다고 해도 아마 십몇 년이 지나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텐데.’
그러나 남이 베푼 호의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아무튼 값비싼 물건도 아니고, 받아도 괜찮겠지.’
“감사합니다.”
양준은 씨앗과 양염석을 품 속에 넣었다.
여기서 더 머무를 이유가 사라진 양준은, 한참 동안 소무영 패거리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홀로 흑풍림 쪽으로 걸어갔다.
호미아는 줄곧 떠나지 않고 꼬리처럼 졸졸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 그녀를 떨어뜨려야 했다. 그렇지 않고 호미아가 능소각까지 따라오면 남들이 수상하게 볼지도 몰랐다.
양준은 눈동자를 한참 굴리다가 갑자기 큰길에서 벗어나 흑풍림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걷는 한편, 고개를 돌려 호미아를 보며 냉소를 흘렸다. 그 뜻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너 따라오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사악한 느낌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았다.
호미아는 그의 냉소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양준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망설여졌다. 사실 그녀는 양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따라 들어갔다가, 정말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그날 그녀는 양준의 실력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자신이 상대가 안 되는 줄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짐승 같은 짓을 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그냥 당하고 말 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호미아는 갑자기 발을 구르더니 허리를 하늘거리며 양준을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양준이 자신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호미아가 계속해 따라오자 양준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호미아가 놀라서 물러가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 생각 외로 호미아는 간이 어지간히 컸다. 계획이 허사가 되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조금 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확 혼쭐을 내줘야지.’
양준과 호미아가 차례로 흑풍림 깊은 곳으로 들어간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은 깊은 원한을 품은 채,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에 남에게 얻어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눈빛이 음험했다. 호미아의 비비 꼬는 몸뚱이를 지켜보는 눈은 요상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성 사제, 저런 놈한테 얻어맞은 거야?”
음험한 눈빛을 한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성소봉을 바라보았다.
“네가 비록 이제 막 개원 경지에 들어섰지만, 그렇다고 저자의 적수가 될 리 없잖아. 저자는 아직 육체 경지밖에 안 되는 거 같은데.”
성소봉은 무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당시 방심한 탓도 있죠. 게다가 저놈은 어딘가 이상한 놈이에요. 싸움이 시작되면 그냥 죽기 살기로 덤비거든요. 제가 검으로 찌르자 글쎄 손바닥으로 막더라고요. 장검이 손바닥을 꿰뚫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어요. 제 검을 제어했을 뿐만 아니라 제 한쪽 팔도 잡았어요. 그래서 제가 패한 거죠.”
“그래? 꽤 재미있군. 나하고 비교하면 누가 더 잔인한 거 같아.”
성소봉이 아첨하며 말했다.
“물론 노도(怒濤) 사형이 더 대단하죠. 저자가 어찌 사형과 비길 수나 있겠어요.”
“그의 신분은 제대로 조사해 봤어? 괜히 큰 인물은 건드리지 말고.”
노도가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확실하게 알아보았어요. 능소각에서 예비 제자일 뿐이에요. 아무 배경도 없어요. 이런 자는 죽여도 무방할 거예요.”
“하하, 예비 제자라고? 능소각에는 예비 제자가 열 명도 안 되는 거로 아는데, 저 자가 그중 한 명이라고?”
노도는 무슨 이런 웃기는 소리를 듣는가 싶었다. 그러나 예비 제자라는 말에 그의 걱정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사람은 능소각의 치욕이었다. 자신이 처리하면 능소각을 도와 큰일을 해결해 주는 셈이었다.
“네. 워낙 흑풍림 이쪽은 오가는 사람이 많아 기습하기가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놈이 미색을 탐내 저 요망한 계집과 같이 알아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 주네요. 하늘이 우리를 돕나 봐요.”
노도가 웃었다.
“보아하니, 사제는 이번에 복수도 하고 여자까지 생기게 되었군. 그야말로 일석이조네.”
성소봉도 덩달아 웃었다.
“사형께서 무슨 말씀을. 좋은 일이 있으면 어찌 저 혼자서 누리겠어요. 사형이 좋은 재미를 볼 때, 저는 자리나 지켜드리죠.”
“역시 좋은 사제야.”
노도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가자. 늦어서는 안 돼. 쫓아가서 기회를 보다가 기습하지.”
흑풍림 깊은 곳, 양준은 여전히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냉소를 흘렸다. 호미아는 처음에는 살짝 걱정했지만 지금은 양준이 그냥 술수를 부린다는 것을 알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양준을 따라잡더니 더없이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도대체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나랑 친구해 줘! 그럼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을게!”
주위에 사람이 없자, 호미아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꿈도 야무지네!”
“나 예쁘지 않아?”
호미아가 예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외적으로는 괜찮아. 자랑할 만한 밑천이지. 그런데 내적으로는 차마 봐줄 수가 없어.”
양준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심한 말에 호미아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봐줄 수가 없다고?”
“그래.”
양준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호미아의 예쁜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러고는 코웃음을 날렸다.
“너는 능소각의 예비 제자일 뿐이야. 난 실력이 너보다 못하지만 혈전방의 공주님이고. 내가 너를 좋아해 주면 영광인 줄 알아야지. 그런데 이렇게 무시를 하다니… 너 밖에서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사람들이 줄을 얼마나 섰는지 알기나 해?”
“그럼 그 사람들을 찾아가면 되지. 하필 왜 나한테 와서 치근거려?”
양준의 표정은 담담했다.
“양준, 너무 뻔뻔하게 굴지 마! 내가 아버지께 여기서 너한테 모욕을 당했다고 이르면, 설령 네가 능소각의 사람이라고 해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호미아가 기를 빡빡 써 가며 화를 냈다. 양준의 태도가 그녀를 격노시켰고, 그녀의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신분이 높은 그녀가 언제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이 있겠는가?
양준 역시 냉랭하게 웃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죽이면, 네가 돌아가서 아버지께 일러바칠 기회나 있을까?”
호미아는 이 말에 잠깐 멍해졌다. 방금 전에는 화가 치밀어 이곳이 흑풍림의 깊은 숲속이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만약 양준이 정말로 죽이려 한다면 그녀는 살아서 나갈 기회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사람을 죽여 시체를 처리하기에도 완벽한 장소였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야말로 헛된 죽음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호미아는 급히 양준을 경계하며 몇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지?”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호미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눈에는 굴욕감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감히 성질을 부리지 못했다. 그녀는 양준이 방금 전에 한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호미아가 한창 갈등하고 있을 때, 양준의 얼굴빛이 변하더니 경계 어린 눈빛으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훌쩍 옮겨 호미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큰 나무를 응시하며 소리쳤다.
“나와!”
호미아는 그 말에 의아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두 사람이 갑자기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둘은 냉소를 흘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음산하고 괴이했다. 한 사람은 양준을, 다른 한 사람은 호미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성소봉, 노도?”
호미아는 물론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문스러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금방 알아챘다.
이번에 양준의 처지는 위험할 것 같았다.
호미아는 노도의 거리낌 없는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슬그머니 양준의 등 뒤로 몸을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