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장. 호교아의 속셈
양준은 머뭇거렸다.
그날 그와 호미아 사이에 있었던 일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그도 철저하게 그녀에게 밉보인 셈인데 지금 무슨 염치로 도움을 청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만약 그녀를 찾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도 없었다.
양준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흑풍시장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비록 씨앗을 찾기는 했으나 양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양준은 하는 수없이 이를 악물었다.
‘됐어, 창피해도 어쩔 수 없지. 아무튼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두려워할 게 뭐 있어?’
호미아가 있다는 나무 집은 세 문파의 고수 제자들이 지키며 수련하는 곳이었다. 호미아는 혈전방 방주의 막내딸로 실력은 강하지 못하나 신분이 낮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안에서 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무 집 부근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 오는 무인들은 이 나무 집 안에 있는 강자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가판대를 나무 집 부근에 설치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판대 주인이 가리킨 나무 집에 도착한 양준은 입구에 멈춰 섰다.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에, 방 안에서 갑자기 교태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누구야?”
그 목소리는 호미아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양준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양준이야.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양준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안에는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둘은 얼굴도 매우 흡사했고, 심지어 분위기나 몸매도 똑같았다. 얼핏 보면 방 안에 거울이 있어 하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거울에 비친 것으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양준의 목소리를 듣고 그중 한 사람의 얼굴에는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동생, 저 사람이 네가 말한 그 양준이지?”
질문을 받은 여인은 바로 호미아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지?”
그녀는 그날 헤어진 뒤로 다시는 양준과 그 어떤 접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사람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네가 말한 것처럼 여자를 돌로 보는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남자들 중엔 일부러 고상한 척하며 너 같이 순진한 소녀들을 유혹하는 놈들도 있어.”
호미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화를 냈다.
“언니, 양준은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호교아(胡嬌兒)는 키득키득 웃더니 말했다.
“아니라면 왜 널 찾아왔겠어? 분명 네가 자신을 잊지 못하는 것을 알고 널 손에 넣으려고 일부러 찾아온 거야.”
호미아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언니는 항상 사람을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만약 양준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호수 옆에서 이미 순결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가 그런 유혹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도대체 왜 날 찾아온 거지?’
호미아는 언니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속으로 궁금해졌다.
그녀의 표정을 본 호교아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된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조만간 크게 데일 거야.”
호미아는 짜증이 났다.
“언니와 말하지 않을래. 분명 급한 일로 날 찾아온 걸 거야. 내가 가서 물어봐야겠어.”
일어나려고 하는 호미아를 호교아가 잡아서 앉혔다. 호교아는 눈을 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동생, 나랑 내기할래?”
“무슨 내기?”
“저 사람이 위선자가 맞는지 아닌지 내기하는 거야! 만약 정말 네가 말한 대로 그런 사람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를 혼내줘도 원망하지 마.”
이렇게 말하는 호교아의 눈에는 음산한 빛이 서렸다.
이 몇 년 동안 호미아가 밖에서 휘젓고 다니면서도 순결을 잃지 않은 것은 이 언니의 공로가 컸다. 호미아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강수를 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의문스러운 죽임을 당했다.
언니의 수단에 대해 호미아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언니의 표정을 보고 그녀도 언니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언니, 뭘 하려는 거야?”
호미아가 놀라서 물었다.
“넌 얌전히 보고나 있어!”
호교아가 맨손을 휘젓자 빛이 호미아의 몸에 드리워지며 맴돌았다. 호미아의 몸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결국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언니, 제멋대로 굴지 마!”
호미아는 열심히 소리쳤지만,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반경 일 장 되는 범위를 벗어날 수도 없어, 그저 방 안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호미아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양준은 문밖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호미아가 문을 열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그날 정말 미움을 단단히 샀군. 그녀가 화가 난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 어떤 여인이라도 나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면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없을 거야. 관두자.’
양준은 애초부터 별로 기대를 품지 않고 왔다. 호미아가 자신을 상대하기 싫어하니 당연히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준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호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양준은 멍해졌다. 그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결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자, 문밖의 떠들썩한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고요함만 맴돌았다.
양준은 고개를 들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이 나무 집의 크기는 소안이 묵는 곳과 비슷했다. 그러나 안의 진열품들은 소안이 묵는 곳보다 훨씬 화려했다. 소안의 방은 아무것도 없이 쓸쓸한 나무 집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심지어 침대도 하나 있었는데 그 위는 얇은 분홍색 휘장이 걸려 있었다. 방 안에는 소녀의 옅은 향이 풍겼다.
이곳은 소안의 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호교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탁자 옆에 앉아 양준이 들어오는 방향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발그레한 두 볼은 매혹적이었다.
양준은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 왠지 오늘의 호미아는 더욱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다만 그녀의 미소에 양준은 어색해졌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호미아는 동그랗고 납작한 천 부채를 들고 우아하게 부채질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느긋하고 우아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부채에는 한 사녀도(仕女圖)가 그려져 있었다. 그 사녀는 몸매가 풍만하고 요염하며 매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양준은 그 모습을 힐끗 보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간이 크군. 다른 여자였더라면 저런 부채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할 것 같은데, 호미아는 심지어 부채질까지 하고 있다니.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보름 넘게 보지 않았을 뿐인데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한 것 같지?’
비록 그녀가 계속해서 양준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양준도 전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날 양준은 호미아의 추태를 다 본 셈이었다. 그녀의 약점을 쥐고 있는 꼴인데 다시 마주했을 때, 그가 무서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양준이 계속 쳐다보자 호미아로 가장한 호교아는 순간 좀 당황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미인을 보고도 시선을 피할 줄도 모르고, 예의도 모르는군. 하지만… 눈빛이 참 맑아 보이네.’
탁자 옆까지 온 양준이 공수하며 말했다.
“보름 동안 보지 못했더니 더 매혹적으로 변했군.”
양준의 말을 들은 호교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첨할 줄도 알아?”
그녀는 양준에 관해 호미아를 통해 전부 전해 들었었다. 그래서 호교아는 양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정체가 들통날까 걱정할 일은 없었다.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야.”
그는 말하면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큰 돌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잘 됐네.’
“내가 오늘 찾아온 건…….”
양준은 자신의 용건을 바로 말하려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실되어 보일 것 같았다.
“급하게 용건부터 말하지 말고…….”
호교아는 부채를 내려놓더니 천천히 일어나서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 양준 옆으로 가서 그에게 한잔 따라주었다.
“밖의 날씨가 더우니 먼저 차를 마시면서 목 좀 축여. 조금 쉬었다가 말해도 늦지 않아.”
“그래, 고마워.”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순간,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호교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앉고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여유 있게 그를 바라보았다.
“차 맛이 어떤 것 같아?”
양준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찻잎이 납작하고 가늘며, 빛깔이 고운 것이 좋은 차인 것 같군.”
호교아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차에 대해 잘 알아?”
그녀조차 모르며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준이 이렇게 유창하게 읊자 그녀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금 아는 정도지, 잘은 몰라.”
“그럼 이 차와 날 비교했을 때 어떤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