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장. 언제부터 의심한 거야?
“좋은 차를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겠지.”
“하하.”
호교아는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갇혀 있던 호미아는 이 장면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언니, 반칙이야!”
하지만 그녀의 외침 소리가 들릴 리 있겠는가? 그녀는 조급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치졸했다. 언니의 실력이면 육체 경지의 무인 정도는 쉽게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만약 정상적으로 대화한다면 호미아는 양준이 절대 추태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언니가 몰래 수단을 쓴다면 모를 일이었다.
호교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한 걸음씩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뒤돌아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줄 게 있어.”
“그래.”
양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뭐가 문젠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침대 옆까지 걸어간 호교아는 허리를 숙이더니 침대에 반쯤 꿇은 자세로 뭔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작은 비명이 그녀의 입안에서 흘러나왔다.
“왜 그래?”
양준은 안색이 변하면서 다급히 앞으로 다가갔다.
“벌레가 있어!”
그녀는 두 손으로 양준의 옷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두려움에 떠는 작은 새 같았다.
양준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디 있는데?”
“저기…….”
호교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정말 벌레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인이나 돼서 한낱 벌레 한 마리에 이렇게 놀라다니.’
그는 손을 뻗어 벌레를 눌러 죽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이미 죽였어.”
“분명 더 있을 거야…….”
호교아는 연기에 점점 물이 올랐다. 그녀는 말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없어.”
양준은 지금 상황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 뛰어 들어와 그녀와 자신이 이런 모양새로 있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변명해도 오해를 풀기 힘들 것 같았다.
“정말 없어?”
호교아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양준이 정말로 예의를 잃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양준이 위급한 상황을 틈타 자신에게 손을 댈 줄 알았다.
방금 전, 양준이 정말로 그녀를 건드렸다면 그녀는 분명 양준의 팔다리를 분질러 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순순히 양준의 몸에서 떨어졌다.
양준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호교아를 바라보았다. 호교아는 빨개진 얼굴로 절뚝거리며 그의 곁에 와서 앉았다.
“너 발이 왜 그래?”
양준이 물었다.
“방금 전에 놀라서 넘어질 때 삐끗한 것 같아.”
호교아는 방금 전의 수가 먹히지 않자 또 새로운 수를 썼다.
‘오늘 이 누님이 끝까지 희생해 주지. 반드시 네 본색을 확인하고 말겠어.’
“내가 좀 볼게.”
양준은 꿇어앉아 호교아의 한쪽 발을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발목이 정말 빨갛게 부어오른 것이 보였다. 삐끗한 것이 틀림없었다.
양준을 떠보기 위해 호교아의 이번 희생은 참 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
양준은 당부하고 나서 손을 뻗어 품에서 단약 한 병을 꺼냈다.
이 단약은 능소각의 어혈연고였다. 약병을 꺼낸 양준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뒤, 그는 약병을 열고 안에서 연고를 덜어 세심하게 호교아의 발목에 바르기 시작했다.
미약한 원기도 같이 흘려보내며 약효가 빨리 돌게 했다.
호교아는 속으로 손해를 많이 보았다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비록 억울한 감이 들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양준의 진지한 모습을 보자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듬직함이 느껴졌다.
“양준…….”
색다른 목소리가 호교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양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호교아가 촉촉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 나랑 다른 거 하지 않을래?”
호교아는 홍보석 같은 입술을 꽉 깨물고 최후의 반격을 했다.
만약 양준이 지금 그러자고 한다면 그녀는 절대 양준을 가만두지 않으려 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할까?’
호교아는 긴장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빠져나올 수 있게 양준이 거절하기를 바랐다. 또 동생과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게 거절하기를 바랐다. 이런 긴장감은 그녀의 마음을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이때, 감금된 호미아 역시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도 소용없는 외침을 멈추고 뚫어지게 양준을 쳐다보며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렸다.
양준은 마음이 움직인 듯, 호교아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호미아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양준의 입에서 ‘좋아’라는 말이 나올까 몹시 두려웠다.
순간, 양준이 미소를 짓더니 느긋하게 어혈연고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었다.
“낭자.”
양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응?”
호교아는 긴장한 나머지 양준이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방금 전,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치료하라고 발라 준 어혈연고는 저한테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예요. 비록 값이 비싸지는 않지만 제가 사람에게서 따스함을 느꼈던 뜻깊은 물건이지요.”
“무슨 말이야?”
호교아는 그만 멍해졌다.
‘하겠냐, 말겠냐를 물은 것인데 지금 나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무슨 깊은 의미라도 있나?’
양준은 몸을 일으키고 호교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이 소중한 연고를 써서 당신의 상처를 치료해드렸으니, 낭자께서도 방금 전 제가 범한 실례를 잊어주십사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호교아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네.”
‘설마 내가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어. 분명 그는 육체 경지 9단계밖에 안 되는데 무려 진원 경지인 내가 부린 수단을 어떻게 알아보겠어? 심지어 난 동생과 똑같이 생겼는데 말이야. 목소리나 생김새로나 전혀 다른 점이 없다고. 혈전방의 오래된 사람들도 종종 나와 동생을 헷갈려 하는데 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재주가 있겠어?’
양준은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낭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인정하기 싫으시다는 건가요?”
“인정할 게 뭐가 있어? 난 정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호교아는 최후의 발악을 했다.
양준은 이마를 문지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말할게요. 낭자, 낭자는 호미아가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그녀의 쌍둥이 언니겠군요.”
호교아는 잠깐 멍해졌다가 곧이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이번엔 그녀도 억지로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자신이 어디서 들켰는지 궁금했다. 만약 양준이 논리정연하게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도 그저 말로 떠보는 것일 테다.
‘아마 그도 지금 그저 의심할 뿐,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걸 거야. 그래서 나더러 인정하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
호교아는 속으로 짐작했다.
“낭자께서는 제 눈썰미를 시험하시는군요.”
양준도 화를 내지 않고 소리 내 웃더니 돌아서서 탁자 옆으로 갔다. 그리고 방금 전에 마셨던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저도 처음엔 당신이 호미아가 맞는지 아닌지 헷갈렸어요.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어요. 당신은 호미아가 아니에요.”
호교아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꼭 깨물었다.
‘방금 전에 한 말이 정말 떠보는 것이었잖아! 진원 경지인 내가 고작 육체 경지 수준인 녀석의 속임수에 당하다니.’
더 이상 부인하는 것도 재미없을 것 같아 호교아는 깔깔 웃으며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요염한 몸매가 드러날 듯 말 듯했다. 그녀는 양준을 훑어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의심하기 시작한 거야?”
“차를 마실 때부터요.”
양준은 손에 든 찻잔을 두드렸다.
“비록 차의 향이 감미로우나 찻잔에 묻은 여인의 향기를 덮을 수는 없죠. 그리고 찻잔에 묻은 옅은 입술 자국을 보고 방금 전 누군가 쓰던 찻잔이겠다 싶었죠. 그 사람이 바로 호미아일 거고요.”
“그것만으로 내가 미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호교아는 깜짝 놀랐다.
“물론 이것뿐만이 아니죠.”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로 의심스러운 것은 당신의 분위기였어요. 전 보름 만에 한 여인의 분위기가 이렇게 많이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호미아는 앳된 구석이 있지만, 낭자는 성숙함이 물씬 풍겼죠.”
“그 말은 마음에 드네.”
호교아는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계속해, 또 없어?”
“세 번째로 당신과 호미아의 체향은 매우 흡사하나 자세히 맡으면 또 달라요. 호미아의 향기는 달콤한데, 낭자의 향기는 약간 우아하죠.”
“못된 놈!”
호교아의 얼굴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양준의 노골적인 말에 그녀는 품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방금 전, 양준을 떠보기 위해 그녀가 한 희생을 떠올리니 호교아는 눈앞에서 나불거리는 이 남자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네 번째…….”
양준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호교아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또 있다고…….”
호교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겨우 육체 경지 단계의 무인인 양준이 이렇게 많은 허점을 알아챘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네 번째는 낭자 발의 상처였어요. 이 상처는 보기에는 삐끗해서 다친 것 같지만, 실은 낭자 스스로 내공을 움직여 다친 거잖아요. 이게 가장 큰 허점이었어요. 호미아는 비록 소녀지만, 무인인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다치겠어요?”
“그건 내가 방심했네.”
호교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그녀는 양준을 속일 생각만 하느라 이렇게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보니 양준이 아직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호교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허점이 있었다고 말하지 마.”
호교아는 몹시 언짢았다. 그녀가 완벽하다고 여겼던 일이 왜 그에게는 허점 투성이로 보였다는 말인가? 그것도 일리 있게 분석해서 반박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이 녀석 정말 짜증 나! 또 무슨 허점이 있다고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사람이 눈치도 없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