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장.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여기까지만 할게요.”
양준이 이렇게 말하자 호교아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는 매서운 눈빛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
“말해!”
“말하지 않을 거예요.”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말하라면 말해. 지금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야?”
양준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제가 말했다가 낭자가 화를 낼까 그러죠.”
호교아는 실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화낸다고? 그럼 좋은 얘기는 아니겠네?”
“그렇죠.”
“그렇다면 더더욱 들어봐야겠는데.”
“그럼 화를 내지 않는다고 약조하세요.”
“네가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화를 낼지 말지 알겠어?”
“그럼 말하지 않을래요.”
“너… 너는 여인과 다툴 때, 좀 양보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호교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녀석, 똑똑해 보이는데 사실은 고지식하잖아. 눈치도 없고 말이야.’
“양보한다면 제가 다칠 것 같은데요. 전… 낭자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요.”
양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정도 눈치는 있네!”
호교아는 우쭐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몸에서 바람이 일더니 침대에서 탁자로 천천히 다가와 나풀거리며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좋아, 절대 너한테 화를 내지 않겠다고 장담할게.”
“절 때리지 않는다고도요.”
“그래!”
호교아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알려 줘. 마지막 허점이 뭐야?”
양준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사실, 허점이랄 것도 없어요. 단지 낭자께서 호미아와 다르게 생겼을 뿐이에요.”
“어디가 다르다는 거야?”
호교아는 의아했다. 자신과 동생은 분명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이 생겼는데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양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낭자의 엉덩이는 짝짝이지만, 호미아는 아니에요.”
이 말을 들은 호교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순간, 그녀의 원기가 맹렬하게 폭발하였고, 방 안은 순식간에 광풍에 휩싸였다.
“방금 전에 약조한 것을 잊지 마세요!”
양준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하게 일깨워 주었다.
호교아의 놀라운 기세가 갑자기 위축되었다. 그녀는 화가 나 이를 갈면서도 화를 내지 못했다. 이를 악물다 못해 이가 다 부서질 지경이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탁자를 치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이 찢어 죽일 녀석이 감히 내 엉덩이가 짝짝이라고 막말을 해? 이게 남자가 할 소리야? 내가 어디가 짝짝이라는 거야?’
호교아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양준은 다급히 위로했다.
“낭자께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호교아는 낯빛이 차가워지더니 살기등등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네 말은 자세하게 봤다는 거야?”
양준은 저도 모르게 목을 가다듬고 어색하게 말했다.
“몇 번 더 봤을 뿐이에요. 아무튼, 이렇게 다른 점이 많은데 낭자와 호미아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죠.”
양준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교아는 화를 가라앉힌 뒤,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양준이라는 남자가 더없이 훌륭한 통찰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방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몇 분 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허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 그녀가 스스로 유혹에 나섰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걸로 봐서 이 사람의 자제력과 성품도 꽤 괜찮아 보였다. 미색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는 마음이 강인한 남자였다.
‘아직 어리고 실력이 약하긴 하지만, 틀림없는 인재야.’
여기까지 생각한 호교아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말했다.
“양준이라고 했지? 방금 전, 네가 나한테 잘못한 게 있으니 지금 내가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무슨 선택이요?”
양준이 물었다.
“첫 번째는 날 만진 손을 잘라버리고 날 본 눈을 파 버리는 거야. 이렇게 하면 방금 전 네가 나한테 범한 실례를 용서해 줄 수 있어.”
호교아가 이 말을 할 때,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고 말투는 부드러워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속삭이는 말 같았다. 하지만 말속에 담긴 뜻은 너무 잔혹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선택지를 들을게요.”
“영리하네.”
호교아는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 선택지는 능소각을 나와, 우리 혈전방으로 오는 거야.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너에게 소대장의 자리를 줄게. 내가 알기로는 넌 능소각에서 가장 말단인 예비 제자에 불과한 데다 갖은 괴롭힘을 당한다면서? 그리고 제대로 된 수련 자원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만약 네가 혈전방에 온다면 대우는 능소각보다 백 배는 좋을 거야. 어때? 내가 건 조건이 아주 좋지?”
“다른 선택지는 없나요?”
“없어!”
“그럼 전 선택하지 않을래요.”
양준은 몰래 진양결을 운행하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호교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호교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생각에 낭자는 진짜로 공격할 것 같지 않아요. 여기가 혈전방도 아니고 전투의 흔적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능소각의 제자도 와서 조사할 텐데… 그러면 낭자도 처리하기 복잡해질 거예요.”
“한낱 예비 제자인 주제에. 내가 널 죽인다 해도 능소각에서 날 어찌할 거 같아? 기껏해야 내가 물건 좀 배상하면 그들도 네놈의 죽음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낭자께서 만약 정말 저를 죽이려고 하셨다면 저와 이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않으셨겠죠.”
양준은 차분한 듯 보였지만 실은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여인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어서 호교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에 사실대로 말한 것을 후회했다. 여인의 말은 정말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특히 미인은 더욱 그랬다.
‘내 경험이 너무 부족했어.’
“그리고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어혈연고로 낭자의 상처를 치료해 드렸어요. 그러니 낭자께서도 제 실례를 더 이상 따지지 말아 달라고요.”
양준은 정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고작 어혈연고로 네 실례를 보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나한테…….”
호교아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하는 수 없죠. 사실 방금 전의 일도 아시다시피 낭자께서 먼저 속이신 거잖아요.”
이 말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호교아는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 그냥 양준을 죽여버리려 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호미아가 감금된 위치를 보니 그녀가 안에서 절박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호교아는 다시 마음이 약해졌고 분노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됐어, 이번 일은 더는 따지지 않을게.”
양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호교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네가 한 말이 다 맞아. 하나만 빼고 말이야.”
“그게 뭔가요?”
양준이 물었다.
호교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저어 감금된 호미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호교아의 실력이 대단한 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손 한 번 내저었다고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분명 진원 경지 이상의 고수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호미아는 자유를 얻고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도 방금 전에 긴장되어 죽는 줄 알았다. 그녀는 언니가 화가 난 나머지 양준을 죽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시 언니를 바라본 호미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에 양준이 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세상에, 언니에게 그런 말을 하는 남자가 있다니. 게다가 그런 말을 하고도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
“언니!”
호미아는 나오자마자 언니를 와락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언니, 화내지 마. 이번 일은 양준을 탓할 수 없어.”
“내가 언제 쟤를 탓한다고 했어!”
호교아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려 양준을 바라보았다.
“넌 한 가지 틀렸어. 나와 미아는 쌍둥이가 아니야.”
“쌍둥이가 아니라고요?”
양준은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눈앞의 두 여인은 정말 다른 점이 없이 똑같이 생겼다. 만약 다음번에 또 양준더러 구분하라고 하면 절대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야, 내가 미아보다 몇 살 많아.”
호교아는 살짝 웃었다. 양준의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자 마음속의 분노가 좀 가라앉았다.
양준은 감탄했다. 비록 자매라지만 몇 년이나 차이 나게 태어났는데 이렇게 똑같이 생기다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경우일 것이다.
“날 몰라?”
호교아는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혈전방 젊은 세대의 고수여서 이름을 떨쳤는데 어떻게 모른다는 말인가?
“몰라요.”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이 적었다.
그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자 호교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양준의 몇 년 동안의 처지를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세상과 동떨어져서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고 지냈다.
“오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호미아는 고개를 돌려 양준은 바라보았다.
양준은 오늘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호미아는 언니를 힐끔 바라보며 허락을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호교아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 하지만 광산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돼.”
“감사합니다.”
양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미아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활짝 핀 얼굴로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양준과 호미아가 떠나자 호교아는 느긋하게 일어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함부로 지껄이다니. 너무 괘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