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장. 집법당과 대치
밀실 밖으로 나온 양준은 여전히 소안의 부축을 받은 채 비틀거리며 앞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상한 듯 고개를 돌려보고는 소안을 힐끔 보며 물었다.
“사저가 저들에게 손을 썼나요?”
소안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래, 너는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운천 무리들도 데리고 나와야 돼요.”
“소무영은?”
소안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양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소무영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어요. 아마 돌려보냈을 거예요.”
그 말에 소안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감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자, 얼마 안 돼 이운천 일행을 가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양준이 소안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만약 소 사저와 저렇게 가까이 서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맞아 죽어도 원이 없겠다!’
이운천 일행은 부러워 죽을 것 같았다.
“다들 나오거라.”
소안은 손을 휘둘러 감방의 열쇠를 끊어버렸다.
“네…….”
그들은 얼른 대답하며 멀뚱멀뚱 걸어 나왔다. 열몇 쌍의 눈이 양준과 소안을 훑어봤다.
소안이 아무리 심성이 무디다 해도 그들이 이렇게 바라보니 표정이 어색해졌다.
“가자.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나가겠다.”
소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양준을 부축하고 앞장서 걸었다. 이운천 일행은 뒤를 따랐다.
얼마 안 돼 그들은 감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감옥 밖에는 이미 백여 명의 집법당 제자들이 진을 치고 출구를 꽁꽁 포위하고 있었다.
“장관이군!”
양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저, 이 자들은 아마 사저를 상대하기 위한 거겠죠?”
소안은 아무 말 없이 담담하게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여전히 양준을 부축한 채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지나는 곳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출구를 막고 있던 집법당 제자들은 모두 두려운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모든 눈동자가 앞에서 걷는 소안과 그녀가 부축하고 있는 양준을 향해 있었다.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수많은 시선들이 그들에게 꽂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짙은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지금까지 소안이 이렇게 남자를 가까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같은 핵심 제자들도 이런 영광을 받아보지 못했다.
소안이 수련한 공법은 빙심결(冰心诀)로, 그녀는 마음이 오랫동안 얼어버린 상태였다. 평소에는 다른 남자와 가까이하기는커녕 말을 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능소각의 많은 제자들은 실력이 높든 낮든, 신분이 고귀하든 비천하든, 그녀 앞에서는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스스로 개원 경지 3단계밖에 안 되는 소년을 부축하고, 옥처럼 맑은 손이 그 소년의 허리를 잡은 채 얼음처럼 깨끗한 얼굴에 홍조를 띤 모습은 너무나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전에는 도도하여 감히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들과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능소각 남제자들은 모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자신들 마음속에 높게 받들고 있던 여신이 마치 누군가에게 모독을 당한 것 같았다. 게다가 여신을 모독한 자가 지금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여신의 부축을 받으며 아무도 누리지 못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어디서 살기가 느껴지는데요.”
양준은 입가에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자약하게 소안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왠지 호가호위(狐假虎威: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리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앞에 그림자가 언뜻 스쳐 지나가더니 용모가 수려한 남자가 소안과 양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안을 바라보는 이 자의 두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깊은 질투와 불쾌감이 숨어있었다.
소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상대방을 쳐다봤다.
“비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쌀쌀맞은 소리가 들려왔다. 담담한 표정에서는 그녀의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지금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매, 나를 난처하게 하지 마. 나도 직책을 다하는 것뿐이야.”
이 자는 능소각 젊은이들 중에서 서열이 두 번째인 해홍진(解紅塵)이었다.
“비켜.”
소안은 여전히 그 말뿐이었다. 마치 한 글자도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해홍진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사매, 이 자들은 아직 감옥을 나갈 수 없어! 이들은 문파의 규칙을 어겼어. 장로회에서 결정하기 전에 누구도 이들을 여기서 데리고 나갈 수 없어.”
“문파의 규칙?”
양준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사형에게 물을게요. 저희들이 문파의 규칙 중 어느 조항을 어긴 건가요?”
해홍진은 경멸하는 눈초리로 양준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싸우고, 흉기를 휘둘러 사람을 죽이고, 집법당을 무시했다. 어느 조항이든 너희들을 능소각에서 쫓아내기에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싸웠다고?”
소안이 말을 이었다.
“누구와 싸운 거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싸웠다면 상대가 있을 텐데 왜 집법당에서는 한쪽만 잡은 거지? 상대는?”
해홍진은 낯빛이 어두워지고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싸운 상대가 위장 일행인데 그들이 어찌 감히 잡을 수 있을까?
“흉기를 휘둘러 사람을 죽였다고? 그럼 죽은 자의 시체는 어디 있지?”
해홍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설명했다.
“흉기를 휘둘러 사람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집법당에서 막았기에 큰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문파의 제자들은 무술을 연마할 때 생사는 각자 책임져! 네 말대로라면 서로 겨루는 제자들은 모두 상대를 죽이려는 거 아닌가? 집법당 제자들이 매우 한가한 모양인데, 능소각의 모든 제자를 다 잡아넣지그래?”
소안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말투가 싸늘했다.
“집법당을 무시했다고 하는데 집법당이 만약 진짜 공정하다면 누가 감히 무시하겠어? 종규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집법당이 이미 어떤 사람들의 권력을 뺏는 도구로 전락되었을 까봐 걱정되네. 스스로 자신의 위엄을 무너뜨렸으니 남들이 짓밟아도 탓할 거 없어.”
“사매.”
해홍진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고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꼭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야겠어?”
“시비곡직(是非曲直: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은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해홍진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매, 나는 너를 진심으로 대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나를 난처하게 하는 것이냐?”
소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 말을 만약 조 사매가 들었다면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조비설(趙飛雪)은 해홍진, 소안과 같은 능소각의 핵심 제자였다. 그러나 이 여인과 해홍진의 관계는 줄곧 원만하지 않았다.
해홍진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소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원망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바로 눈길을 돌려 양준을 바라봤다.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양준은 태연자약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마주 봤다.
“네가 양준이냐?”
해홍진은 마음속의 아픔을 억지로 누르며 물었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친밀하게 다른 남자를 부축하고 있는 걸 봤다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네, 저한테 할 말 있습니까?”
“이번 일이 너 때문에 일어난 거란 걸 알고 있다. 만약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시끄러운 상황도 없었겠지. 소 사매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면 고분고분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라. 내가 손쓸 필요 없게.”
해홍진은 담담하게 명령했다. 그는 소안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또 소안에게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결국 만만한 게 양준이었다.
양준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왜 웃는 거지?”
해홍진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양준은 지금 피투성이라 매우 초라했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었다. 웃으며 천천히 자신의 다른 손을 내밀어 자신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소안의 손을 잡더니 가볍고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안을 바라보며 살뜰하게 말했다
“저도 사저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사저가 저를 진심으로 대하니 저는 사저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사저가 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에요.”
해홍진의 낯빛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소안은 더욱더 멍한 표정을 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운천 일행도 턱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목구멍까지 하고 싶은 말이 올라왔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백여 명의 집법당 제자들은 모두 바보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사저, 제 말이 맞죠?”
양준은 주변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펄펄 끓는 기름에 소금을 뿌렸다.
해홍진은 잔뜩 긴장해서 소안을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
소안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남자도 그녀를 이렇게 경박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순간 그녀는 화가 나, 하마터면 당장 양준을 날려버릴 뻔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양준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범하게 인정했다.
“맞아!”
그녀는 대답하면서 원기를 흘려 양준의 경맥을 공격했다.
양준이 신음 소리를 내더니 코피가 흘러내렸다.
“왜 피를 흘리느냐?”
소안이 하얀색 비단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양준을 닦아주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양준은 속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저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만만치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