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7화 (67/853)

제 67장. 벽혈현양화

“이젠 사제가 물어봐.”

의혹을 풀게 된 하응상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양준은 어혈연고를 조심스럽게 다시 품 속에 넣은 뒤에야 물었다.

“몽 주인은 고질병이 재발해서 올 수 없는 게 아니죠?”

하응상은 순간 우물쭈물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수줍게 말했다.

“내가 약을 써서 기절시켰어.”

양준은 아연실색하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하응상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날 밤 갑자기 나보고 오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기절시킨 거야.”

양준이 계속 웃자 하응상은 참지 못하고 그를 가볍게 주먹으로 몇 번 쳤다. 때리고 나서야 너무 친밀한 게 아닌가 싶어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난 쉴 거야. 너 혼자 천천히 웃어.”

하응상은 부끄러워서 더는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훌쩍 날려 다른 나무줄기에 옮겨 가더니 더는 양준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둘은 며칠 동안 계속 흑풍산 속을 걸었다. 놀랍게도 가는 내내 어떤 위험한 요수도 만나지 않았다.

양준은 본래 걱정이 태산 같았다. 흑풍산 내부에는 강한 요수들이 득실득실했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정말 요수를 만난다면, 자신은 하응상의 짐이 될 뿐이었다.

하응상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그녀는 양준을 데리고 산속의 맹수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두 사람이 걷는 길도 종잡을 수 없었다. 때로는 동으로 갔다, 때로는 서로 갔다, 그리고 아주 크게 에둘러 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리저리 에둘러 다니니 의외로 아주 안전했다. 간혹 2~3급의 요수를 몇 마리 만났지만, 하응상은 몇 수만에 쫓아 버렸다.

반나절이나 자세히 눈여겨보고서야 양준은 하응상이 손목에 낀 녹색 팔찌로 강한 요수의 위치를 탐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요수가 앞쪽에서 길을 막고 있으면, 그녀의 팔찌는 녹색 빛을 뿜었다.

그녀는 이 팔찌를 전에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었다. 이마의 파란 보석이 그녀의 유일한 장신구였다. 이 팔찌는 이번 여정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틀림없이 비보일 거야. 아마 몽 주인이 준 거겠지.’

양준은 그래도 안목이 있는 편이었다.

‘몽 주인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양준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몽 주인은 겨우 공헌당의 주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하응상 같은 천재 제자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비보도 주었다. 이 팔찌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품급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급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런 등급의 비보는 능소각에서도 보기 드물었다.

*양준과 하응상이 손쉽게 흑풍산 내부로 들어간 것에 비해, 그들의 뒤를 따르는 혈전방 일행은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를 열몇 번이나 치렀다. 혈전방 제자들의 실력이 괜찮은 편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 요수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문비진은 진원 경지 5단계 강자였지만, 이 시각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방금 전에 그들은 5급 요수를 정면으로 마주쳤다. 5급 요수는 진원 경지의 고수와 실력이 맞먹었다. 물론 문비진의 실력보다도 몇 단계 더 높았다.

곧이어 힘든 접전이 이어졌다. 수적 우세로 요수를 쫓아 버렸으나 혈전방 쪽에서 이합 경지의 고수 한 명을 잃게 되었다.

문비진은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이번에 혈전방에서는 도합 여덟 명이 왔는데, 그중 진원 경지는 문비진 한 사람뿐이었다.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이합 경지가 네 명, 나머지는 모두 기동 경지였다. 그중에서도 기동 경지 1단계인 용휘의 실력이 가장 낮았다.

원래는 양준과 하응상의 뒤를 멀리 따라가기만 하면 그다지 큰 위험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두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요수들을 피했는지, 오히려 그 뒤를 쫓던 자신들이 매번 요수를 맞닥뜨렸다.

지금은 더욱이 이합 경지의 고수를 한 명 잃게 되었다. 문비진이 어찌 노하지 않겠는가?

이제 와서 빼도 박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이미 한 사람을 잃은 마당에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잠시 쉰 뒤, 문비진은 노랑에게 가차 없이 말했다.

“앞에서 걸어. 출발해야겠다!”

노랑은 땅바닥에 떨어진 반쪽 팔을 보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방금 전 접전 가운데 혈전방 쪽에서 한 사람을 잃었다. 그런데 풍우루 제자들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풍우루의 제자 두 명도 5급 요수에게 먹힌 채, 팔 반쪽만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노랑은 비로소 그날 밤 왜 찜찜한 느낌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혈전방 무리들은 좋은 마음으로 그를 데리고 양준을 쫓아온 게 아니었다. 분명 자신들을 탐색용 미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마음속으로 이를 깨달았다고 해도 감히 대적할 수도 없었다. 반항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앞에서 길을 살펴도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지금 반항하면 오직 죽음뿐이었다.

노랑은 창백한 얼굴로 풍우루 제자들을 이끌고 앞쪽에서 걸었다. 등 뒤에서 문비진의 지시가 들려왔다. 그들은 때로는 동으로, 때로는 서쪽으로 가면서 양준과 하응상을 놓치지 않고 뒤따라갔다.

*같은 시각, 하응상을 따라 길을 재촉하던 양준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희열이 느껴졌다.

“왜 그래?”

하응상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저쪽은 위험한가요?”

양준이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위험하지 않아. 요수의 흔적은 못 느꼈어.”

하응상은 고개를 숙여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한 번 가 보죠.”

양준은 다짜고짜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응상은 양준이 무슨 일로 기뻐하는지 모르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백 장을 채 못 걸어서 하응상은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는 듯한 따가움에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눈을 떠 바라보니 그곳에는 뜻밖에도 손바닥만 한 붉은 꽃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꽃의 양도 적지 않았다. 대충 짐작해도 열몇 송이는 되어 보였다.

양준은 한창 꽃을 꺾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꽃송이들을 모조리 꺾었다.

잠시 뒤, 양준이 그것들을 가득 챙겨 가지고 와서 입을 열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벽혈현양화(碧血玄陽花). 지급 하품의 재료야. 이거 때문에 왔구나.”

하응상은 문득 깨달았다.

“지급 하품!”

양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그래도 괜찮네.”

그는 벽혈현양화마다 양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양과 못지않았다. 방금 전, 가슴의 양원인이 반응하여 와 본 것인데, 과연 큰 수확을 얻게 되었다.

이곳은 이미 흑풍산의 안쪽에 속했다. 천재지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온 목적은 하응상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양준은 천재지보를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찾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또한 큰 위험도 뒤따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근처에서 감지했으니 놓칠 수가 없었다.

“단약으로 만들어 줄까?”

하응상이 물었다.

“지금은 필요 없어요. 저녁에 쉴 때 만들어 주세요.”

하응상의 단약 제련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단약을 제련하는 데는 원기가 소모되었다. 산속에서 걷고 있으므로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낭비하지 않는 게 좋았다.

“좋아.”

하응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2~3일만 더 가면 도착할 거야. 시간은 충분해.”

그리고 가는 길에 행운이 이어졌다. 앞서 며칠은 여러 날을 걸어서야 양원인이 반응을 했는데, 벽혈현양화를 찾은 뒤에는 하루가 지나 또다시 양기를 띤 천재지보를 찾게 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운이 저번보다 못했다. 뜻밖에도 그 약초를 3급 요수 한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하응상이 나서서 요수를 쫓아버린 다음에야, 양준은 약초를 채집할 수 있었다.

이날, 두 사람은 숲을 꿰뚫고 지나다가 거대한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하응상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제, 도착했어.”

눈앞의 산골짜기는 매우 컸다. 면적은 사방 몇십 리 정도로 짐작되었고, 원형의 골짜기였다.

양준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골짜기 아래쪽은 지금 서 있는 위치와 거의 삼십 장 정도의 낙차가 있었다. 아래쪽은 울창한 것이 바깥쪽 수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또한 산 좋고 물 좋은 것이 경치도 아름다웠다.

하응상은 고개를 숙이고 팔찌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기쁨에 겨워 외쳤다.

“운이 좋아. 여긴 별로 강한 요수가 없어.”

말하는 사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는 길에 길을 막는 요수들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만약 이 산골짜기에 강한 요수가 있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바로 그녀가 찾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평범한 곳인데요.”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때가 안 됐을 뿐이야.”

하응상은 방그레 웃었다.

“예전에 사부님과 함께 이곳을 지나갔던 때가 마침 7월 7일이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의 비밀을 몰랐을 거야. 바로 그때부터 사부님께서 나한테 구음응원로를 제련시키려고 한 거야.”

“그런데 몽 주인은 왜 갑자기 오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며칠 전에는 줄곧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한 지금, 아무것도 모르면 안 되지 않는가. 만약 때가 되어 구음응원로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 큰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그러니 먼저 확실하게 물어보고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때 가서 알려줄게.”

하응상은 바로 알려주지 않았다.

양준은 의문이 들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모양이었다. 전에 몽 주인의 태도도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그때 가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면 그뿐이었다.

“이리 와.”

하응상이 양준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양준은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왜요?”

“데리고 내려가려고.”

하응상은 큰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여기 아주 높아.”

“저 혼자 내려갈 수 있어요.”

양준은 단칼에 거절했다.

‘나도 어쨌든 남자란 말이야. 어떻게 여자한테 안겨 내려갈 수 있어. 그게 무슨 꼴불견이야.’

말을 마치고 양준은 곧바로 뛰어내렸다. 양준의 행동에 놀란 하응상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처럼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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