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장. 부탁 하나 들어 줄래요?
하응상은 특수 체질이었다. 약령성체는 원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인체 약 가마였다. 아무리 단약을 많이 먹어도 부작용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단약 몇 알을 먹고 하응상은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했다. 양준은 뒤돌아 외부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약 반 시진이 지나서야 하응상은 점차 몸을 회복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양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발생한 일을 떠올리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너무 부끄러워 땅굴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응상의 눈빛을 눈치챈 듯, 줄곧 경계하고 있던 양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하응상이 이미 운기조식을 끝낸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하응상의 눈에 당황하는 빛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급히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응, 하지만 당장 싸울 체력은 없어.”
“괜찮으면 됐어요.”
양준은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민망한 일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로 한 하응상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은 거야?”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아주 은폐된 곳이었다. 몸을 숨기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사제는 야밤에 어떻게 이런 곳을 정확하게 찾은 거지?’
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저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이 부근에서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뜻밖에도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네요.”
하응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푹 쉬세요. 바람이 잠잠해질 때, 제가 사저를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갈게요.”
하응상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못 나가. 내가 구음팔쇄진(九陰八鎖陣)을 펼쳐서 이미 이곳은 진법으로 봉쇄되었어. 날이 밝기 전에는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해.”
양준은 크게 놀랐다.
“전에 자리를 비운 것이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서였나요?”
하응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구음응원로를 얻으려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하는 수없이 먼저 움직인 거야.”
“음기 쇠사슬이 바로 진법의 영향인 건가요?”
양준은 방금 전의 장면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래.”
“그들은 이미 죽지 않았을까요?”
양준은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그 고수들이 다 죽었다면 아직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하응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진법은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야. 그 사람들은 모두 약자가 아니니 절대 죽일 수 없어. 기껏해야 실력이 약한 사람 한두 명 정도 죽었을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양준은 속으로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지만 음기 쇠사슬이 몸속에 들어가면 실력이 대부분 봉인될 거야. 그리고 날이 밝기 전까지 회복하지 못해. 내가 날 밝기 전까지 기운을 회복할 수 있나 보고 우리 함께 이곳에서 도망치자.”
양준은 갑자기 표정이 변하며 하응상을 보고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의 실력이 봉인된다고요? 얼마나요?”
하응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적어도 6~7할 정도지. 진원 경지의 고수는 아마도 8할 정도 봉인되었을 거야.”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전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죠?”
양준의 얼굴에는 확인해 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응상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뭘 하려는 거야? 그들의 실력이 봉인되었다고 해도 네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사제, 함부로 나서지 마.”
그녀는 양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양준은 가볍게 웃더니 잔뜩 기대에 차 말했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아나요? 잊지 마세요. 여기는 구음이 모이는 곳이에요. 그들은 지금 실력이 봉인되었고, 또 음기의 침입도 막아야 해요. 아마 사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약해졌을 거예요.”
“하지만 상대가 몇인데!”
하응상은 양준의 팔을 덥석 잡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충동적으로 나오지 마!”
양준은 가볍게 그녀의 손을 다독이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이곳에 숨어 있는다면 언젠가 발각될 거예요. 일단 독에 든 쥐가 되면 우리는 정말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제가 먼저 나서면 그나마 희망이라도 있잖아요.”
“안 돼.”
하응상은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내가 사저니 넌 내 말을 들어야 해. 네가 지금 나간다면 그 사람들을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산골짜기에 있는 음기 때문에 네 체내의 원기를 다 소진할 수도 있어.”
“사저, 저를 막지 마세요. 사저도 그 용휘라는 작자의 꼴을 보셨잖아요. 만약 그의 손에 잡힌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하응상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굳이 가겠다면 이걸 가지고 가!”
양준이 정말 가려고 한다면 그녀의 지금 상태로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없이 그에게 옥패를 건네주었다.
“저보다 사저가 더 필요할 거예요.”
양준이 거절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저는 개원 경지 4단계지만 원기를 회복하는 방법이 있어요. 산골짜기의 음기는 저한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해요. 오히려 사저가 문제에요. 만약 누군가 이곳을 발견하게 된다면 막을 수 있겠어요?”
“나도 이미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해서 수비 비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어. 그 사람들의 실력도 크게 약화됐으니 나한테 위협이 되지 못해.”
하응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뒷걱정은 없겠네요!”
양준은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드디어 몸을 움직일 때가 되었다. 양준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몇 걸음 가다가 발걸음을 멈춘 양준은 가볍게 말했다.
“사저,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지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혼자서 얼른 도망가세요.”
하응상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알 수 없는 통증이 온몸에 퍼졌다.
양준은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돌아온다면 부탁 하나 들어 줄래요?”
“무슨 부탁?”
하응상은 시큰거리는 마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돌아와서 다시 얘기할게요.”
양준은 싱긋 웃고는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약간의 장치를 해놓은 다음 그 틈을 잘 덮어 두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응상만이 적막감을 가득 안고 홀로 남았다.
날이 밝기까지 아직 서너 시진이 남아 있었지만 적은 열몇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분명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어둠이 드리운 숲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뛰어가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양준은 큰 나무 뒤에 숨어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지금 오고 있는 두 사람이 어느 쪽 사람인지,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먼저 잘 살펴본 뒤, 계획을 짜는 것이 중요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의 실력이 너무 강하다면 양준도 피해야 했다.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 사형, 그들이 어디로 숨었을까요? 왜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는 거죠?”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사제, 조급해하지 마. 노 사형과 혈전방 놈들도 지금 찾고 있잖아. 양준은 분명 오래 숨어 있지 못할 거야. 우리는 대충 찾는 척이나 하면 돼. 어쩌면 그들 쪽에서 이미 양준과 그 여자를 잡았을지도 모르잖아.”
사제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네요. 그 낭자만 불쌍하죠. 얼굴도 예쁘던데 용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괴롭힘 당할지 모르겠네요.”
웅 사형이라 불린 남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휘는 호색가 기질 때문에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게 되어 있어. 앞으로 우리가 성장하면 대갚음해 줄 때가 있을 거야.”
말하고 있는 사이, 그들과 십몇 장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다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웅 사형이 호통을 치며 말했다.
“웬 놈이냐?”
그쪽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날 찾는 거 아니었어?”
“양준!”
웅 사형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자신이 양준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걸려들다니. 찾으려고 할 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더니 자기 발로 찾아온 게 아닌가!
웅 사형이 흥분된 만큼 양준도 기뻤다.
방금 전,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양준은 그들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풍우루의 다섯 명 중, 노랑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개원 경지였다.
양준은 이 경지의 무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 풍우루 제자는 양준과 척을 진 적이 없었으나, 양준을 쫓아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사제가 몇 명이나 죽었다. 차마 문비진에게 보복할 수는 없으니 그 원한을 양준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원수끼리 대면한 이 순간, 당연히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웅 사형은 웃으면서 양준을 훑어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간이 크군. 스스로 걸려들다니. 너랑 같이 있던 여자는 어딨지?”
“날 이기면 알려 주지!”
양준의 주먹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움직이며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웅 사형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사제, 엄호해. 내가 이놈을 혼내 주겠어!”
말하면서 그는 허리춤의 칼집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양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원 경지 6단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양준은 개원 경지 4단계였다. 경지에서 두 단계나 차이 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무기도 있는지라 당연히 스스로 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수는 그저 상대의 실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지 한 번에 양준을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