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장. 무사히 재회하다
“그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원랑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그는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전하려고 하다, 생각을 바꾸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 방어 비보가 내 공격을 얼마나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네!”
만약 자신의 힘으로 하응상을 굴복시킨다면 적어도 천급 비보 하나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비보가 있다면 이 넓은 세상 어디를 못 가겠는가? 굳이 혈전방에 남아서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이 여인은 몸에 비보를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만약 형세가 안 좋아지면 그때 다시 신호를 전해도 늦지 않았다. 아무튼 자신이 이곳의 출구를 막고 있으니 그녀에게 날개가 달려있다 해도 날아가기 힘들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원랑은 웃으며 하응상에게 걸어갔다.
하응상은 순간 당황했다. 비록 그녀는 원기를 2할 정도 회복하여 방어 비보를 작동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원기를 너무나 많이 소모했다. 일단 비보를 사용하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온몸이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녀는 원기를 좀 남겨 양준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어찌 한 번에 원기를 다 쓰겠는가?
어쩔 수없이 한동안 버티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상대방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응상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상대방이 먼저 자신을 공격했는데 그녀라고 타협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하응상도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원기를 몰래 운행시키며 경계 어린 시선으로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원랑을 바라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셈이었다. 한 사람밖에 드나들 수 없는 산골짜기 틈에서는 누구도 상대방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아직 세 장 정도 남아 있었다. 원랑의 웃음기는 점차 사라지고 안색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내, 하응상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먼저 공격을 날렸다. 원랑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랐다. 그녀는 하얀 손가락을 구부려 튕겼다. 차가운 지풍(指風)이 활을 벗어난 화살처럼 원랑에게 쏘아졌다.
원랑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이 여자에게 공격할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가 다치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단약을 복용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는 없는데?’
그는 하응상이 특수 체질이라 단약을 제한 없이 먹을 수 있는 데다, 단약이 몸으로 들어가면 빠른 속도로 흡수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는 단약만 충분했다면 지금 이미 절반 이상의 힘은 회복했을 터였다.
지풍의 차가운 바람이 뼛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마치 날카로운 얼음송곳 같은 느낌이었다. 이는 산골짜기의 음기를 모아 그녀의 특수한 체질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제련한 것으로, 살상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원기의 소모가 아주 적고 공격 속도가 빨랐다.
흐느끼는 바람 소리가 전해지자 원랑은 원기를 폭발시키며 손날로 앞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비운참(飛雲斬)!”
비운참은 장법(掌法)이 아니라 도법(刀法)이었고, 지급 하품의 무공이었다. 이 무공의 위력은 약하지 않았다. 다만 칼이 없어 손바닥으로 대체하자, 그 위력은 많이 감소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응상의 공격은 그의 손바닥에 잘려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하응상의 지풍이 별 살상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원랑은 비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솩솩’ 소리가 들리더니 하응상이 또 지풍을 튕겼다.
원랑은 울화가 치밀어 주먹을 쥐고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창룡음(蒼龍吟)!”
희미하게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위력은 방금 전의 비운참보다 더 강했다.
하응상 역시 그가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두 손으로 번갈아 가며 공격했다. 두 손은 빠르게 움직이며 지풍이 연이어 무서운 기세로 날아왔다.
원랑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다급히 자신의 원기를 모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천주섬(千誅閃), 비봉귀살(飛鳳鬼殺), 천명뢰(天命雷), 화철장(化鐵掌), 참강수(斬鋼手), 영룡권(靈龍拳)…….
그는 이합 경지답게 수련한 무공의 종류도 많았고 모양새도 여러 가지였다. 원랑이 여러 가지 술수로 하응상의 공격과 겨루며, 한동안 힘든 접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하응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무슨 무공을 쓰든 그녀는 여전히 음량 지풍(陰涼指風)을 사용하였다. 제대로 호적수를 만난 셈이었다.
산 틈 옆의 암벽에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의 공격이 부딪혀 생긴 불빛이었다.
한참 싸우던 원랑은 드디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실력이 봉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힘겹게 한기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데다, 연이어 원기를 많이 소모하는 무공을 사용하다 보니 몸이 허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편의 여자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도 빨개지지 않고 힘들어하지도 않는 것이 그녀가 튕기는 지풍은 원기를 전혀 소모하지 않는 듯했다.
하응상이 날린 지풍은 대부분 산골짜기의 서늘한 음기를 모은 것이었고, 체내의 원기를 조금만 사용해도 어느 정도 살상력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원랑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또 한참 싸우던 원랑은 드디어 자신의 상태로는 하응상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창피한 마음에 화가 나 사납게 말했다.
“독한 년, 계속 항복하지 않겠다면 용휘 공자를 부르겠어. 그가 온다면 널 괴롭혀서 죽는 것보다 못한 것이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줄 거야!”
“비겁한 놈!”
하응상이 분노했다.
“헤헤, 용휘의 손에 들어간 여자들 치고 멀쩡한 사람은 없었어. 그냥 순순히 내 말 들어. 내가 잘해줄게!”
“웃기지 마!”
“내가 셋 셀 때까지 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더는 봐주지 않겠어!”
원랑은 차가운 표정으로 최후 통첩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수를 셌다.
“하나…….”
두 사람은 말을 하면서도 손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두울…….”
원랑은 일부러 음을 길게 끌었다.
이때, 하응상의 눈이 갑자기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비록 면사포에 의해 가려졌지만 원랑은 이 여자가 웃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웃으니 정말 예쁘네!’
원랑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는 셋을 세기 좀 미안해졌다.
“마음을 바꾼 거야?”
원랑은 그녀가 생각을 바꾼 줄 알았다.
하응상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넌 너만 사람 부를 줄 안다고 생각한 거야?”
“뭐라고?”
원랑은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사람 부를 줄 안다고.”
하응상은 원랑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울음기 섞인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사제, 왜 이제야 왔어!”
원랑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냉소하였다.
“이런 얄팍한 수로 날 속이려고? 너는 나를 바보로 보는 모양이지?”
“정말 바보 맞네.”
뒤에서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원랑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다급히 뒤를 돌아 상대를 확인했다. 하지만 하응상은 그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맹공격을 펼쳤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게다가 산 틈이 좁아 바로 몸을 돌리지 못해 몸 반쪽이 걸려 버렸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푸슉!
원랑은 등에서 통증이 느껴지며 뭔가가 자신의 몸으로부터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검 끝이 그의 가슴팍을 뚫은 것이었다.
원랑은 심장이 갑자기 수축하는 느낌이 들었고, 온몸의 피가 몸속에서 솟구치며 생기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힘들게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자신의 뒤를 막고 있는 양준을 볼 수 있었다.
“짐승 같은 놈!”
원랑의 얼굴에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매우 아쉽고도 분에 찬 얼굴로 양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준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장검을 그의 가슴팍에서 뽑았다. 뜨끈한 피가 칼을 뽑음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솟구쳤다. 곧이어 양준은 다시 검을 찔러 넣었다.
연속으로 두 번이나 칼에 찔린 원랑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푹 고꾸라졌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져 가더니 죽기 직전에 원랑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참 시기도, 운도 모두 맞지 않는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자신이 이 여자를 산 틈에서 막고 있으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자신도 또 다른 사람에게 앞길이 막히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특별한 지형만 아니었더라면 그가 어떻게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죽임을 당했겠는가?
‘이기지는 못해도 도망칠 기회는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헛된 생각이었다. 사냥꾼도 사냥감으로 전락되는 날이 있었다.
“괜찮아요?”
양준은 고개를 들고 하응상을 바라보았다.
사실 원랑이 하응상을 발견했을 때부터 양준은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원랑이 산 틈으로 들어가서 하응상과 접전하기를 기다렸다가 습격했다.
이런 수법은 좀 비겁했다. 상황을 모르는 하응상이 한동안 마음을 졸일 것이 분명했으나 이것은 시간과 기운을 가장 적게 소모하며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난 괜찮아. 사제는…….”
하응상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만 멍해졌다. 양준의 복부에 난 반 척 정도의 상처와 어깨의 베인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양준은 침착한 안색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강인하여 남자 특유의 듬직함을 풍겼다. 평소의 비실거리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윗옷을 훌렁 벗고 산 틈 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몸은 산처럼 듬직하게 찬 바람을 막아주며 이 좁은 산 틈을 더없이 고요하고 따스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간 하응상은 떨리는 손을 뻗어 양준의 상처를 만지려고 했으나 양준이 아플까 봐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의 눈시울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두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밖에서 어떻게 싸웠기에 이런 모습이 된 거지? 피는 또 얼마나 많이 흘렸길래 피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