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장. 도우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야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산골짜기 안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강적들과 대적하니 하응상은 양준과 둘이서 서로 의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런 참상을 보았는데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소녀는 험난한 상황 속에서 영웅에게 구해지기를 꿈꾼다.
비록 이번에 그녀를 구해 준 것은 영웅이 아니고, 호걸은 더더욱 아닌 평범한 개원 경지의 사제였고, 그녀보다도 실력이 한참이나 떨어졌지만 소녀의 마음에 파도가 일렁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별거 아니에요!”
양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참, 제가 구음응원로를 발견했어요.”
“그래.”
하응상은 눈물을 훔쳤다.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지 않았다.
“구음응원로는 어떻게 거둘 수 있나요? 지금 알려줄 수 있어요?”
양준이 물었다.
“이따가 다시 발견하면 도망칠까 봐요.”
“됐어, 이제 필요 없어.”
하응상은 양준의 손을 잡으며 앉으라고 했다.
“네? 왜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힘들게 이곳으로 온 게 구음응원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응상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앉아서 얘기해!”
양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앉았다.
하응상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악물고 양준의 앞에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찢어서 긴 천 조각을 만들고는 약병을 꺼내 연고를 천에 쏟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양준의 복부 상처를 싸매기 시작했다.
양준은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우리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나자.”
하응상은 양준의 상처를 싸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날이 밝으면 구음팔쇄진은 스스로 풀릴 거야. 그럼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이곳으로 온 것은…….”
“필요 없어.”
하응상은 양준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말속에는 거절을 거부하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걸 위해서 이럴 필요는 없어.”
양준은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전 사저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제가 이미 거의 다 해치웠어요. 이제 두 명밖에 남지 않았어요.”
“뭐라고?”
하응상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도 두 명, 우리도 두 명인데 무서워할 게 뭐 있나요?”
양준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들이 먼저 공격했으니 우리도 봐줄 것 없죠! 그리고 구음응원로도 내버려 둘 수 없고요. 중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되죠.”
“날 속이는 거지?”
하응상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사저가 속이기 쉬운가요?”
양준이 나지막하게 웃다가 상처를 건드려 순간 움찔했다.
“정말 두 사람밖에 안 남았어?”
“네, 사저를 다치게 했던 진원 경지의 고수와 용휘만 남았어요.”
양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응상은 순간 멍해졌다. 양준이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니 그녀는 그가 밖에서 추격당한 줄로만 알았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양준은 지금 두 시진 안에 적을 아홉 명이나 죽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이합 경지인 사람도 꽤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만약… 정말 두 사람이 남은 거라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하응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은 날이 밝으면 그 진원 경지의 고수도 실력을 회복한다는 거야. 만약 그가 우리를 끝까지 쫓아온다면 우리는 도망치지 못할 거야.”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법이 풀리면 그의 실력도 회복되나요?”
“응.”
“그럼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양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날이 밝기 전에 진원 경지의 고수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사로잡힐 게 뻔했다.
“하지만 난 지금 실력이 2할밖에 회복되지 못했는걸. 만약 정말 그 진원 경지의 고수를 만난다면 상대하기 힘들 거야.”
하응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꽤 많은 단약을 가져왔어요. 드실 수 있는지 좀 보실래요?”
양준은 방금 전에 죽은 사람들에게서 얻은 단약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뛰어가 원랑의 시신도 수색했다.
여러 병의 단약이 손에 들어왔다. 원랑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부유한 듯했다. 몸에 지니고 있는 단약과 은자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이 회원단이 있다면 4할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충분해.”
하응상은 금방 표정이 밝아졌다.
“먼저 회복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양준도 이 시간을 이용해 회복해야 했다. 비록 몸속의 원기는 끝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체력과 정신력은 휴식이 필요했다.
날이 밝기까지는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양준과 하응상은 숨어 있던 산 틈에서 나와, 산골짜기의 음기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추적했다.
산골짜기 내 음기가 흐르는 방향은 분간하기 쉬웠다. 구음응원로가 산골짜기 내의 음기를 흡수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아주 빨랐기 때문이다. 산골짜기의 음기는 전부 어느 한곳을 향해 급속도로 모여들었다.
그런 기이한 현상은 산골짜기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혈전방의 두 사람은 무조건 이 현상을 알아보러 올 것이다. 양준은 그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명의 기동 경지와 이합 경지의 고수들을 죽였지만 양준은 여전히 전의가 들끓었다. 진원 경지의 강자가 아직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압력이 있는 한 양준의 불굴지오는 계속 작용을 발휘하여 몸과 정신을 팽팽하게 조일 것이다.
다만 이 진원 경지 고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음기가 모이는 발원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밝은 빛이 허공에 떠 있었는데 음기가 이곳에 흘러 들어오자마자 무언가에 삼켜진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양준이 본 적 있는 구음응원로였다.
다만 지금의 구음응원로는 조금 전과 많이 달랐다.
조금 전의 구음응원로는 그저 동그랗게 빛이 날뿐 별다른 형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구음응원로는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았는데 여린 꽃잎들이 똑똑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구음응원로에서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응상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구음응원로는 저 꽃봉오리 안에 있는데 꽃봉오리가 터져야 나타나. 그때가 돼야 저것을 거둘 수 있어. 내가 구음팔쇄진을 친 것도 저것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그 사람들 때문에 미리 작동시킨 거야. 그 사람들이 죽지 않는 한 여덟 갈래의 음기 쇠사슬은 돌아올 수 없어. 이번에는 사제, 너에게 맡길게. 네 진양원기는 저것과 상극이야. 나는 진법이 없으니 너를 도울 수 없어.”
“저게 도망가지 않을까요?”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응. 그래서…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하응상은 또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그 사람들을 다 죽이면 진법을 다시 쓸 수 있는 거 맞죠?”
양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긴 하지만 그 자들이 여기로 오지 않으면 어떡해?”
“그 자들은 이미 여기 왔어요.”
양준은 차갑고 단호한 눈빛으로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봤다.
문비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자식 똑똑하군.”
하응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문비진과 용휘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뜨거운 눈빛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하응상을 주시했다.
다만 한 명은 하응상의 천급 비보를 탐내는 것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를 탐냈다.
양준은 냉정한 표정으로 하응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문비진은 차분하고 느긋하게 두 사람과 이십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너희들이 살아 있는 걸 보니 그 쓰레기들이 정말로 큰일 할 놈들이 아니었구나.”
문비진은 체내에 침투한 음기 쇠사슬을 풀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았다. 쫓아갔던 부하들도 상황을 보고하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와 용휘는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문득 산골짜기의 음기가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그 흔적을 따라 조사하러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문비진과 용휘는 이곳에 오자마자 양준과 하응상을 발견했다. 그들은 뜻밖의 성과에 너무 기뻐 몸도 숨기지 않고 으쓱거리며 다가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문비진은 더 이상 양준에게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휘파람으로 수하들을 불러들이려고 했다.
뜻밖에도 문비진이 휘파람을 불자 맞은편의 소년이 비꼬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문비진은 상대가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길래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양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아무리 휘파람을 불어도 도우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문비진의 표정이 흔들렸다.
“무슨 소리냐?”
“그들은 다 죽었어. 죽은 사람이 당연히 도우러 올 리 없지.”
양준은 크게 웃었다.
문비진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 그는 의아한 듯 하응상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이합 경지의 고수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하응상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낱 양준 따위가 그런 실력이 있을 리 없었다.
‘실책이야, 실책.’
문비진은 하응상에게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몇 시진 전에 그가 하응상에게 장풍을 날릴 때 그녀는 분명 반항할 힘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거지?’
“그들이 다 죽었다 해도 너희들은 내 손아귀를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문비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부하들의 죽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양준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체내의 진양원기가 솟아오르고 피가 끓어올랐다. 그가 전의에 가득 차 문비진을 공격하려고 할 때, 뒤에서 아름다운 그림자가 날아오더니 곧장 문비진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