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장. 양준을 구해주세요!
양준은 이런 변고가 생길 줄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실험을 거쳐 금신이 양기 외의 기운도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빨리 구음응원로를 절반이나 흡수할 줄은 몰랐다. 이 물건은 하응상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고개를 돌리고 양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하응상이 향긋한 바람과 함께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사제, 조금만… 참아.”
하응상이 갑자기 면사포를 내리더니 천천히 입을 내밀었다.
양준은 놀라서 굳어버렸다.
천지 영물은 거둬들이는 방법이 천태만상이었다. 영성이 있는 보물들마다 흡수 방식이 달랐다.
그는 구음응원로를 어떻게 거둬들이냐고 물었을 때 몽 주인과 하응상이 얼버무리고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려고 한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갑자기 양준이 아,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깨문 거예요?”
양준은 입안에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하응상은 지나치게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가까스로 누르며 한참 후에야 말했다.
“미안해. 구음응원로는 너의 순수한 양기와 혀끝의 피 한 방울이 있어야 돼.”
구음응원로를 거두려면 순수한 양기가 필요했다.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좋았다. 양준이 수련한 진양결이 그 조건에 딱 맞았다.
구음응원로를 제련하려면 선천적으로 순수한 양기와 혀끝의 피가 필요했다.
순수한 양기는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는 사내들마다 태어날 때부터 체내에 가지고 있는 신비한 힘인데, 여인과 친밀한 행위를 가진 후면 사라졌다. 이 기운은 평소에는 별 용도가 없고 잃어버린다고 해도 신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쓸모가 있었다.
양준의 체내에서 용솟음치며 구음응원로의 차가운 기운을 감싼 것도 순수한 양기였다.
몽 주인이 그래서 양준에게 동정인지 물었던 것이다. 오직 동정이어야만 순수한 양기가 있고, 그 동정인 사내의 혀끝에서 추출한 피로 구음응원로를 제련할 수 있었다.
하응상의 말에 양준은 입을 닦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군요, 혹시 지금은 충분한가요? 부족하면 더 드릴게요.”
‘고작 피 몇 방울이잖아?’
하응상은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한 방울이면 됐어!”
“아.”
양준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조금 전의 혀의 촉감을 생각하니 입맛이 다셔졌다.
“사저…….”
양준은 말을 더듬거리며 하응상을 불렀다. 그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하응상은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양준의 말속에 숨어 있는 뜻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사제는 몸을 다쳤으니 우선 치료부터 해. 나도 얼른 구음응원로를 제련할게.”
“네.”
양준은 그제야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구음응원로는 거둬들인 후 한 시진 내에 제련하지 않으면 소멸된다고 했다.
“맞다, 그 물건이…….”
양준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구음응원로를 절반 정도 흡수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의식도 순식간에 몽롱해졌다.
“사제!”
하응상이 대경실색하며 얼른 부축했다. 양준을 잠깐 살펴본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양준의 맥박은 극히 약하게 뛰고 있었고, 생기도 잃어 가고 있었다. 체내의 원기도 거의 다 소모되어 마치 죽기 직전의 상태 같았다.
적지 않게 놀란 하응상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조금 전까지 멀쩡했잖아. 그런데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이렇게 정신을 잃다니…….’
자세히 살펴본 하응상은 그제야 양준이 얼마나 심각한 상처를 입었는지 깨달았다
복부와 어깨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상처를 잘 싸맸지만 격렬한 전투를 겪은 후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가장 심각한 것은 가슴의 상처였다. 흉골이 다섯 개나 부러지고 안으로 움푹 패어서 하마터면 심장과 폐를 건드릴 뻔했다. 문비진의 분노를 머금은 그 일격을 어찌 그리 쉽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하룻밤의 격렬한 전투를 거쳐 양준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하응상은 이 사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불굴의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처를 다른 사람이 입었다면 진작 여러 번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오직 하응상을 보호하고, 마지막 적을 죽인 뒤, 구음응원로를 거둬들이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걸 끝내고 긴장이 풀리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응상은 마음이 시큰거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허둥지둥 양준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단약을 꺼냈다. 그리고 문비진의 몸을 이리저리 수색했다. 단약 몇 병을 더 찾은 그녀는 가지고 있는 단약들을 모두 양준에게 먹였다.
하지만 혼미한 상태인 양준이 단약을 삼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응상은 약을 씹어서 그에게 먹여줬다.
이때, 산골짜기를 봉쇄한 구음팔쇄진이 흔들리더니 붕괴되려고 했다.
날이 밝아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니 구음팔쇄진이 저절로 파괴된 것이다.
하응상은 산골짜기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최선을 다해 양준을 구했다.
한 줄기 강하지만 부드러운 신식이 훑고 지나가자 하응상은 몸을 흠칫 떨더니 고개를 홱 들었다. 곧이어, 어떤 그림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스승님!”
그녀는 마치 동아줄이라도 잡은 것 같았다. 계속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드디어 분출구가 생기자 눈물이 줄줄 흘렸다.
몽무애는 굳은 얼굴로 하응상을 한바탕 꾸짖으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몽무애는 구음팔쇄진 밖에서 밤새 기다리면서 감히 파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 구음응원로를 거두는 데 별다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하응상이 몇 년 동안 준비해 왔던 일이 아니던가. 모든 것이 다 준비되고 딱 한 가지만 필요한 상황이었다. 양준이 잘 따라와 준다면 구음응원로는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다만 사랑하는 제자의 희생이 좀 필요할 뿐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몽무애는 밤새 혼자 화를 삼켰다. 제자의 약에 당한 스승이 어디 또 있을까? 아마 이 세상에 몽무애뿐일 것이다. 그는 제자의 약에 당해서 체면이 깎인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응상이 무모하게 흑풍산에 깊이 들어갔다가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까 걱정하는 마음에 화가 났다.
몽무애는 원래 진이 파괴된 후 하응상을 혼내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놀라서 땅에 내려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바닥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양준을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스승님, 먼저 양준을 구해주세요!”
하응상이 눈물을 흘리며 구슬프게 애원했다.
몽무애도 망설이지 않고 얼른 자세를 낮추며 두 손가락을 양준의 손목에 가져갔다. 신식으로 그의 체내를 훑어본 몽무애가 미간을 찌푸린 채 놀라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다친 것이냐?”
몽무애가 볼 때 양준의 상처는 그냥 심각한 정도가 아니었다. 곧 관에 들어가 있어야 할 정도였다. 가슴에 입은 내상과 몸의 외상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양준은 원기가 불안정하고 경맥 손상이 극히 심각했다.
이런 상처는 치료 단약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치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약이 있다고 해도 의술이 뛰어난 의원이 있어야 했다.
몽무애는 둘 다 없었다.
“스승님, 어때요?”
하응상이 걱정되어 물었다.
몽무애는 제자의 표정을 보더니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액운은 피하기 힘들다더니, 내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응상이 속상해하는 것이 마음 아파 몽무애가 위로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다.”
몽무애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 그 속에 있는 단약을 쏟았다. 그 단약은 온통 금색을 띠고 있어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몽무애가 단약을 꺼내자 하응상의 긴장했던 표정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녀는 그 단약의 효험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쉬운 표정을 한 몽무애가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하응상이 빤히 쳐다보자 어쩔 수 없이 양준의 입을 벌리고 단약을 밀어 넣으려고 했다.
“제가 할게요.”
하응상이 갑자기 손을 쑥 들이밀고 단약을 가져갔다. 그녀는 단약을 입에 넣고 몇 번 씹더니 몸을 낮추고 혀끝으로 단약을 감아 온통 피가 가득한 양준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이고, 내가 아직 여기 있지 않으냐!’
몽무애는 속으로 연신 소리를 지르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제자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한 사내와 가까이하는 모습에 몽무애는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마치 애지중지 키운 딸이 자신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약이 입으로 들어가자 양준의 안색이 좀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몽무애는 주변을 둘러봤다. 약간 혼탁했던 시선이 갑자기 서늘한 한기를 뿜었다. 그는 문비진의 시체와 용휘의 조각난 시체를 발견했다.
의문이 순식간에 해소되었다.
양준이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고 제자가 처량한 꼴이 된 것이 꼭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원인을 찾았다.
몽무애의 가슴에 뜨거운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바로 묻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것들을 물을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제대로 알아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몽무애는 어젯밤에 도착하자마자 구음팔쇄진을 파괴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만약 그때 진법을 파괴했더라면 자신의 소중한 제자와 양준이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