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장.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거북 요수와 일 장도 안 되는 거리에 한 쌍의 남녀가 서로 기대고 있었다.
순간 양준과 소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안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의아함과 놀라움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반면 양준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슬픔뿐이었다.
소안은 그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웃어른들은 오직 대견함과 긍정의 눈빛으로, 동년배들은 사모와 존경의 눈빛으로, 후배들은 추앙과 숭배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혹여 누군가는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득한 눈빛은 소안이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능소각의 핵심 제자였기에 아무도 그녀를 이런 눈빛으로 볼 자격이 없었다.
‘지금 나를 안타까워하는 건가? 무엇을 슬퍼하는 거지?’
그 감정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소안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저렸다.
‘너무 따뜻해… 이 사람의 몸은 정말 따뜻하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소안은 이런 따뜻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빙심결을 수련하다 보니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감정을 봉인한 채 살아왔다. 그녀의 세계에는 온통 한기와 냉기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차가움과 따뜻함은 원래 상극이고 대립되는 것으로, 그녀는 양준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를 싫어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안겨 있으니 설령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양준의 옷자락을 손으로 꼭 거머쥐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양준이야!”
호교아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양준이 도대체 언제 뛰쳐나갔는지조차 몰랐다. 방금 전 그녀도 소안이 펼치는 놀라운 공법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곁에 있던 양준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호미아는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켰다. 그러고는 떨리는 눈초리로 거북 요수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원치 않는 광경을 보게 될까 너무나 두려웠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용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어 얼음에 갇힌 거북 요수가 양준의 구부린 등에 부딪쳐 왔다. 양준은 뛰어오를 때, 최대한 몸을 옆으로 치우치면서 피했지만, 위로 튀어 오르는 힘으로 소안의 추락까지 막다 보니, 충돌까지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거북 요수와 양준이 접촉하는 순간, 그의 굽힌 등도 덩달아 앞으로 나아갔다. 양준은 얼마 안 되는 완충 시간을 빌려 자신에게 오는 타격을 최대한 감소시키려 했다.
쾅-
양준과 소안은 마치 포탄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수십 장이나 날아가서야 천천히 지면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꼭 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렇게 십여 장을 굴러가고 나서야 요수에 부딪친 충격이 점차 사라졌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몸이 드디어 멈췄다. 양준의 몰골은 볼품없었고, 얼굴빛이 납빛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몸으로 보호한 소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저 깔끔한 흰옷이 조금 더러워지고 머리가 좀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양준은 선혈을 뿜고는, 이내 온몸의 힘이 빠진 듯 소안의 품에 쓰러졌다.
소안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항상 고요하기만 하던 그녀의 마음이 이 순간 더는 평온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한 손을 내밀어 양준의 머리에 살며시 얹고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양준은 방금 전에 뒹굴면서 몸으로 그녀를 보호했다. 모든 충격의 여파를 양준이 혼자 몸으로 막아낸 것이다. 반면 소안은 몸이 땅바닥에 닿지도 않았다.
찌익-
얼음에 봉인된 거북 요수는 지면에 깊은 고랑을 만들면서 몇십 장을 더 미끄러져 나가고서야 멈췄다. 양준과 소안에게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천지간에 적막이 깃들었다.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땅바닥에 쓰러진 채 꼭 껴안고 있는 남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런 일은 수많은 이들의 분노를 야기했을 것이다. 어떤 남자도 이처럼 소안과 친밀하게 접촉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살갗마저도 모두 신성하고 고귀해서 단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모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한 남자가 그녀에게 기대 있었다. 그러나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누가 화를 낼 수 있겠는가?
그는 목숨을 걸고 소안을 구했다. 이는 임종을 앞두고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잠깐의 혜택이었다.
모든 이들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충격에 양준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해홍진만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눈동자가 달아올랐다.
지난 번 양준이 소안의 손을 잡는 것을 직접 보았을 때도 그는 이미 질투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장면은 악몽처럼 그의 뇌리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매번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심했다. 아예 많은 이들 앞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가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는가.
해홍진은 가슴에 가득 찬 울분과 노기가 둑이 터진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당장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양준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짙은 살의로 뒤덮였다.
소안은 수백 장 거리를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차디찬 눈초리로 해홍진을 바라보았다.
해홍진은 온몸을 흠칫 떨더니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시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가슴속에는 번뇌와 후회로 가득 찼다.
‘방금 전, 목숨을 걸고 소안을 구했다면 지금 저런 행복을 누릴 사람은 아마 나였겠지? 내 실력이면 거북 요수에게 부딪쳐도 기껏해야 중상이었을 텐데.’
중상 정도로 소안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계산해 봐도 이득인 장사였다.
‘왜? 난 왜 그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오직 소안의 거대한 그림자에만 정신이 빠져, 그녀가 위험에 처한 것을 등한시했을까? 이리 좋은 기회를 헛되이 놓치다니!’
광풍이 휘몰아치자 주변이 스산해졌다.
세찬 바람에 소안의 아름다운 머릿결이 휘날리고, 양준의 옷자락이 나부끼며 휙휙 소리가 났다.
모두 제자리에 멈춘 채,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소안은 혼돈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속으로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랫소리는 오직 양준의 귀에만 들렸다.
그녀는 흥얼거리면서 끊임없이 양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아이를 달래 재우려는 어머니의 모습 같았다.
한쪽에는 거대한 거북 요수가 앞발을 치켜든 채, 흉악한 몰골로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아래쪽에 있는 소안과 양준을 짓밟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는 한 편의 수묵화 같은 장면이었지만, 쓸쓸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소안은 한 곡조를 끝마치고 동작을 멈추더니 숨을 내쉬었다. 향기로운 입바람에 양준의 귀밑머리가 흩날렸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복되었으면 이제 일어나지.”
“무슨 노래에요?”
양준은 꼼짝하지 않았다. 담담한 목소리만 들려왔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소안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기억 속에 있던 거야.”
“듣기 좋네요.”
양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소안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 속에 담겨 있던 여러 감정도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뼈에 사무치는 한기뿐이었다.
양준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는 소안이 억지로 마음속의 파문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평온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에게 눈짓했다.
소안은 작은 손을 건네더니 양준이 당기는 힘을 빌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뺨 쪽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귀 뒤로 넘겼다. 지금 소안의 모습은 온몸이 먼지투성이였고, 머리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범접할 수 없는 올곧고 신성한 기질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충격에 빠진 외침이 울려 퍼지더니 곧이어 하나의 함성이 되었다. 모든 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남자는 지금 멀쩡하게 일어나 있었다. 비록 몰골은 처참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