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124화 (124/853)

제 124장. 기회는 단 한 번뿐

해홍진은 음침하고 악랄한 얼굴빛을 하고 심하게 헐떡거렸다. 그는 계단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단약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전승은 내 거야. 여기 있는 모든 게 다 내 거야. 이곳의 전승을 얻기만 하면, 이 해홍진이 세 종문의 제자 중에서 일인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능소각을 다른 두 종문 위에 군림하게 할 수 있어. 심지어 그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지. 나를 의심하는 모든 이들을 처참하게 응징할 거야. 양준, 네가 첫 타자야! 하하하, 나야말로 천하의 패자란 말이다.”

해홍진은 약간 실성한 상태였다. 체내 원기가 뒤죽박죽 되어 크게 요동을 쳤다. 실력이 그의 정도에 이르면 보통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모습은 분명 기동 경지 무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세 종문의 제자들이 거북 요수와 맞서 싸우던 광경이 줄곧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의 눈에는 세 종문의 제자들 간의 단합과 용감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 대한 그들의 혐오와 멸시만 보였다. 거북 요수는 그가 건드렸으나 결국 양준이 나서서 큰 타격을 입혀 세 종문의 제자들이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나 소리 없는 비난은 그의 마음속 분노와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지난날 그를 숭배하고 존경하던 많은 사제들이 그를 보는 눈빛이 전과 같지 않았다.

해홍진은 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볼 수 없어! 아무도!’

해홍진보다 몇백 층 더 높은 계단에는 방자기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자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는 겨우 체내에 스며든 냉기를 해소시켰고, 눈썹 끝마저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어휴, 좀 쉬어야지.”

방자기는 의외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역시도 전승은 기연에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력의 높고 낮음이 일정한 관계는 있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이곳의 전승에 눈독을 들여도, 해홍진처럼 미친 듯이 집착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양성과 냉성의 공법을 수련한 사람들을 위한 시련으로 보이는군.”

방자기는 품 속에서 단약을 꺼내 입속으로 집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젠장. 그럼 시간 낭비잖아? 차라리 사매들을 데리고 전승동천에서 다른 보물이 없는지 찾아보는 게 낫겠어.”

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방자기는 벌떡 일어나더니 더는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재빨리 몸을 날려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지면으로 내려와 보니, 마침 두억상이 어두운 표정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어, 두 사매, 너도 내려왔어?”

방자기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두억상은 차갑게 그를 흘겨보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방자기의 경박한 행동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은 또다시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콧방귀를 뀌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 자, 사형이 같이 갈 사람을 찾던 중인데, 네가 마침 여기 있네.”

방자기는 앞으로 다가가 다짜고짜 두억상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야?”

두억상은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그러나 어떻게 방자기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방자기의 손 하나가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고 있었다. 뜨거운 남자의 기운에 두억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서 놔. 안 놓아주면 확 물어 버릴 거야!”

두억상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마치 성난 호랑이처럼 무섭게 날뛰었다.

“남자가 하는 일에 여자는 입 다물고 그냥 따르기만 하면 돼.”

방자기는 패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두억상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전에 몸부림치던 것에 비해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이천 층이 채 안 되는 계단에서 혈전방의 용준도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 종문의 제자들 가운데서 실력이 엇비슷했다. 때문에 올라간 층수도 큰 차이가 없었다.

해홍진의 광기, 방자기의 담담함과 달리 용준은 긴장한 가운데, 한 가닥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가 순조롭게 정상에 도착해 전승을 받을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자신이 얻으면 좋겠지만, 그는 별로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세 종문의 제자 가운데서 실력이 뛰어났지만 나이가 남보다 좀 많았다. 솔직히 말해 자질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맨 앞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대부분 천 층 안팎에 있었다.

양준과 호씨 자매는 중하위에 위치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천 층 아래에서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많은 원기를 소모하다 보니 오랫동안 쉬어야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간신히 걷는 것도 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이 계단이 주는 시련은 전승할 사람을 선발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물러서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일종의 정신적 수련이기도 했다.

남초접도 팔구백 층 되는 계단에서 힘겹게 걷고 있었다. 빼어난 몸매,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은 이 순간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조금도 낙담하지 않았다.

양준의 아무 감정도 지니지 않은 차디찬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헐떡이며 새로운 계단에 올라섰다.

그녀는 확실히 야심이 있고 또 강자에게 의지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잘못인가? 그녀는 한낱 여자에 불과했다. 자질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능소각에 입문해서 지금까지 고생스럽게 수련했지만 겨우 기동 경지 7단계 실력밖에 안 되었다. 이 정도 실력은 강자들의 눈에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녀가 강자에게 붙으려는 것은 단지 의지할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이는 일개 여인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일 뿐이었다.

그녀는 만인의 주목을 받는 기린아 소안이 아니었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두뇌밖에 없었다.

남자들이 탐내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몸매가 남이 보기에는 그녀의 장점일 수도 있지만, 남초접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녀는 지금의 몸매와 용모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십여 일 전, 양준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는 말없이 침묵하면서 그를 돕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그녀가 한마디 말이라도 했다면, 나중에 양준이 그런 눈빛으로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양준도 참 옹졸해! 좀 너그러우면 안 되나? 결국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스스로 강해져야만 해.’

이때, 한 줄기 기운이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남초접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그녀는 뜻밖에도 경지를 돌파해 기동 경지 8단계에 도달했다.

남초접은 눈을 감고 돌파한 다음의 변화를 느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서 더 빨리 강해지자.’

다시 걸음을 떼자 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가벼워졌다. 남초접은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반나절 동안 휴식한 뒤, 양준과 호씨 자매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 층 다음부터, 느껴지는 압력이 전과는 뚜렷하게 달라졌다. 계단마다 내재된 원기가 훨씬 강해졌다. 처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호씨 자매는 별로 쉬지 않았으나 뒤로 갈수록 멈추는 시간이 길어졌다.

양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양결을 수련했지만 아직 실력이 너무 낮았다. 소안처럼 담담하게 계단을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피차 간에 누가 되는 일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이천 번째 계단에 이르러서야, 세 사람은 다시 한번 멈추고 쉬었다.

걷는 내내, 오백 층 계단을 단위로 내재된 원기가 달라졌다. 냉기와 열기가 번갈아 교차되면서 금방 적응할라 하면 정반대 성질의 원기로 변했다.

이는 기력의 소모가 클 뿐만 아니라, 일종의 심신에 대한 시련이기도 했다.

호씨 자매는 모두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반면 양준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 역시 원기 소모가 크기는 했지만, 단전 내 저장된 양액으로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힘들지 않아?”

호교아는 참지 못하고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계단에 오르고 나서 지금까지 양준은 줄곧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궁리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얼마 전에 기연을 얻지 못했다면, 호미아는 절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없었다. 일찍이 천 층 이하에서 이미 가로막혔을 것이다.

양준도 호미아와 같은 개원 경지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올라오는 내내 단약 한 번 복용하지 않고, 평온하게 올라왔다.

‘체내에 저장된 원기가 어떻게 저리 많을 수 있지?’

“괜찮아.”

양준도 계단에 앉아 체력과 정신을 회복하면서 대답했다.

“괴물이야!”

호교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반나절 쉰 뒤, 세 사람은 다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 우뚝 선 건축물이 땅에 내려온 지 사흘째 되었다. 세 종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계단에서 내려왔다.

정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들 모두 의기소침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흥분과 기쁨이 가득했다. 각자 이번 시련에서 다소 이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직면한 경지를 돌파했기 때문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더 많은 이들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열기에 싸여 있거나 또는 오들오들 떨면서 냉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들은 아래에서 회복한 뒤에 다시 빛의 장막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써도 더는 빛의 장막을 뚫고 끝없는 계단을 오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 놓치면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없었다. 이에 적지 않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만약 안에서 조금만 더 버텼다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다들 후회할 뿐이었다.

눈앞의 시련이 이러할진데, 인생의 많은 일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기회는 언제나 단 한 번뿐이다. 그때 제대로 잡지 못하고 놓치면, 그냥 후회만이 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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