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135화 (135/853)

제 135장. 기절한 꼬마 사저

한참 뒤에야 양준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소안이 들고 내려온 사람이 하응상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뒷모습이 좀 눈에 익다 했어.’

하응상은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얼굴에 여전히 면사포를 두르고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이 그저 기절한 것 같았다.

“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에요?”

양준은 도저히 사태가 파악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야심한 밤에 소안이 찾아온 것도 의외였는데, 기절한 하응상까지 데려오다니. 이건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전투 소리를 떠올린 양준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소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저가 기절시킨 거예요?”

소안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다치게 하지는 않았어. 이 여인이 며칠 동안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내가 널 찾아오고 싶어도 못 오잖아. 그래서 잠깐 기절시킨 거야…….”

양준은 이마를 짚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소안과 하응상은 비록 모두 진원 경지였으나 한 사람은 이미 진원 경지 3단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진급했다. 정말로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하응상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소안이 그녀를 기절시킨 것이라고 말한 것을 봐서 기습한 것이 분명했다.

하응상은 그나마 심성이 온순하여 상대하기 편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해명을 한다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몽무애가 알게 된다면 그의 막무가내인 성격으로…….

양준은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인은 널 아주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잘 아는 사이야?”

소안은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양준도 부인하지 않고 하응상을 안은 채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돌침대에 눕혔다.

푹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본 양준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다치지 않았어. 만약 다쳤더라면 어떻게 뒷수습을 해야 할지 골치 아플 뻔했어.’

소안은 말없이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예요?”

양준은 침대 옆에서 소안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소안은 불편한 듯, 몸을 비틀며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그런 거 없어.”

“제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양준이 웃으며 물었다.

소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참기 힘들면… 다른 여인을 찾아가도 돼.”

소안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그 정도로 밝히진 않아요.”

양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안은 양준의 품으로 몸을 기대더니 또 옆을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 하 사매는 아주 좋은 후보지. 하 사매는 널 아주 신경 쓰는 것 같던데. 비록 면사포를 하고 있지만 분명 예쁜 사람일 거야. 실력도 나쁘지 않고, 마음씨도 착한 데다 성격도 부드러우니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 봐. 네가 참기 힘들 때, 내가 옆에 없다면 널 다독여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뒷감당이 아주 힘들다구요.”

양준은 몽무애만 떠올리면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양준은 지난번 구음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랬었군. 내가 하 사매에게 고마워해야겠는걸.”

양준의 얘기를 들은 소안은 하응상에 대해 호감이 생겼다. 양준이 그녀에게 준 구음응원로는 하응상이 나눠 준 것이었다.

“그녀가 깨어나면 사과라도 하세요. 하 사저는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양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럴게.”

두 사람은 야밤까지 끌어안은 채로 마음속의 말들을 많이 나누었다.

*사경(四更: 새벽 1시~3시)이 되자, 소안이 일어나며 말했다.

“나 갈게.”

소안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녀에게도 이것은 마음의 수련이자 시련이었다.

“잠시만요!”

양준은 그녀를 이끌고 동굴 입구로 와서 옆에 뿌리를 내린 음양요삼을 가리켰다.

“이것에 원기를 좀 넣어 주세요.”

“이게 뭔데?”

소안은 쪼그리고 앉아 의아한 얼굴로 음양요삼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이 날 보고 웃어. 천지 영물인 거야?”

“네, 음기와 양기를 흡수하며 살아가는 천지 영물이에요. 이곳에는 양기밖에 없어 음기는 사저가 보충해 줘야 해요.”

소안도 머뭇거리지 않고 손을 뻗어 음양요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몸속의 진원을 그것의 안에 넣어 주었다. 음기가 몸속에 들어오자, 천지 영물의 표정은 더욱 만족스럽게 변했다.

잠시 뒤, 소안은 손을 거두고 일어서더니 양준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바로 몸을 돌려 동굴을 떠났다.

양준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잡지 않았다.

소안의 몸이 사라지려는 순간, 양준은 뭔가 떠오른 듯 다급히 물었다.

“참, 하 사저는 언제 깨어날 수 있는 건가요?”

“날이 밝을 때.”

소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녀가 하응상을 데려가지 않고 일부러 동굴에 남겨둔 것은 양준이 하응상과 많이 접촉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었다. 하응상이 깨어난 뒤, 양준이 뭐라고 말할지 그녀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양준의 지혜로는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꾸며내도 손쉽게 하응상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양준의 동굴을 떠나 곤룡골 위에 도착한 소안은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온통 죄책감과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소안이 곤룡골 위에서 자책하고 있을 때,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양준도 아주 심란했다. 잠깐 생각해 본 그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소안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미약으로 하응상을 기절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소안은 하응상이 무슨 체질인지 모르고 있지 않는가!

약령성체! 몸 자체만으로 가장 좋은 약로(藥爐)였다. 그녀가 수련한 공법까지 더하면 천지간의 모든 원기를 단약으로 만들 수 있는 체질이었다.

약을 제련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하응상은 종사(宗師) 같은 인물인데, 어떻게 한낱 미약에 기절할 수 있겠는가?

만약 기절했다 하더라도 절대 날이 밝을 때까지 깨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특수한 체질로는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깨어났을 것이다.

‘설마…….’

양준은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몸이 굳은 채로 동굴 입구에 서서 무려 한두 시진 동안이나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양준은 땅굴을 파고 숨어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참 뒤에야 양준은 기계적으로 몸을 돌려 한 걸음씩 돌침대가 있는 석실로 걸어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하응상의 숨결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아주 미세하여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었지만, 양준은 신경을 온통 하응상에게 쓰고 있는 탓에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 없었다.

‘정말… 어색해 죽겠네.’

양준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하응상의 옆에 천천히 앉았다.

이 꼬마 사저는 돌침대에 눕혀진 뒤로 줄곧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자그마한 몸은 돌침대의 한쪽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길고 곧은 다리를 감싼 초록색 긴 치마는 이 텅 빈 석실에 봄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양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하응상의 호흡이 또 달라지며, 심장도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은 미세하게 떨렸고, 얼굴에도 옅은 홍조가 나타났다.

“어휴…….”

양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굽혀 하응상의 귓가에 대고 가볍게 불렀다.

“꼬마 사저, 꼬마 사저…….”

하응상은 정말 기절한 것처럼 움직이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양준은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면사포를 벗길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녀를 알고 나서 지금까지 양준은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응상은 나타날 때마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심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양준은 이런 얄팍한 술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하면서 손으로 면사포를 살짝 들고 천천히 위로 들췄다.

그러면서 양준은 줄곧 하응상의 표정 변화를 관찰했다.

하지만 면사포가 전부 벗겨질 때까지 하응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말 잘 참네!’

양준은 감탄했다.

또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가 정말 깨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양준은 면사포를 내려놓았다.

하응상은 살짝 몸을 움찔거리며,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눈에 보일 정도로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정말 기절한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양준이 그녀를 오랫동안 협박했지만, 그녀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요, 정말로 기절한 거로 해요.”

하응상과 한참 겨루기를 한 양준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꼬마 사저, 푹 쉬세요. 날이 밝으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양준은 일어서서 동굴 입구로 가, 계속해서 수련에 매진했다.

날이 밝을 때가 되어서 또다시 하응상을 보러 온 양준은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참 고생이네. 이 자세로 하룻밤 동안 꼼짝하지 않고 유지하다니. 몸이 저리지도 않나 몰라.’

잠시 생각한 양준은 그녀의 몸을 뒤집어 돌침대 위에 옆으로 눕게 했다. 그리고 양준은 전에 만들어놓은 길을 통해 곤룡골 위쪽으로 올라왔다.

양준은 하응상에 대해 걱정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깨어 있든, 쓰러졌든 이 꼬마 사저는 심성이 단순하여 그와 소안의 사이를 알게 되어도 협박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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