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장. 경솔했어
양준이 능소각 내부로 걸어가다가 공헌당을 지나칠 때, 몽무애가 열정적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양준……!”
양준은 안색이 변하며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도망치긴…….”
몽무애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지만 양준에게 잘못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준이 어젯밤의 일로 그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몽무애가 알 리 없었다.
“몽 주인, 안녕하세요!”
능소각의 제자들이 공손하게 몽무애에게 예를 올렸다.
전승동천이 나타나기 전까지 몽무애는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가게 주인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그가 대단한 위세를 떨쳐 혼자의 힘으로 혈전방 전체를 납작하게 만든 사실이 퍼지면서, 능소각 제자들은 이 호색한 가게 주인이 드러나지 않은 고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 그의 앞에서 방자하게 굴겠는가?
몽무애가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양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무기각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한 것을 발견했다. 제자리에 서서 한참 귀를 기울인 양준은 어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이번에 전승동천이 열리면서 많은 제자들이 안에서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서로 다른 등급의 무공이나 공법을 얻었다. 그리고 종문은 그들이 얻은 무공이나 공법을 소장하여 무기각에 채워 넣으려고 했다. 만약 자신이 얻은 무공이나 공법을 종문에 바치기 싫어하는 제자들이 있으면 공헌치를 상금으로 준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능소각에서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혈전방과 풍우루에서도 모두 이런 조치를 취했다.
양준도 전승동천에서 무공을 두 가지 얻었다. 하나는 염양폭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흔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바칠 생각이 없었다. 특히 성흔은 그에게만 있는 필살기였다.
만약 누군가 그와 무공을 교환하자고 한다면 염양폭 정도는 내놓을 수 있었지만, 종문에서는 제자들끼리 사적으로 무공을 교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발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양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양준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를 불러 세운 사람은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양준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집법당의 조정문이었다. 몇 달 전에 그의 명령으로 양준과 이운천 무리들이 감옥으로 끌려갔던 것이었다.
조정문은 뒷짐을 지고 태연한 얼굴로 양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매우 싸늘했다.
“사형께서 무슨 일이죠?”
조정문은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휘두르더니 무언가를 튕겨서 양준에게 쏘았다.
양준은 두 손가락을 내밀어 그것을 손쉽게 잡았다. 태연한 양준의 행동에 조정문의 얼굴이 흠칫 떨렸다. 그는 자신이 몰래 감춰 둔 암경(暗勁)을 양준이 이토록 쉽게 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예요?”
양준은 손에 든 물건이 서신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바로 열어 보지 않았다.
“진급령(晉升令)이다!”
조정문이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
“장로회의 명령을 전한다. 예비 제자 양준은 개원 경지를 돌파하여 일반 제자로 진급한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급이라고요?”
“그래!”
조정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종문에 들어와서 삼 년 동안 줄곧 육체 경지를 넘지 못해서 널 예비 제자로 강등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가 열심히 수련하여 개원 경지를 돌파한 것을 보고 장로회에서 상의를 거쳐 너에게 진급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지!”
“기회요?”
양준은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찾아냈다.
조정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가 장로회에서 하달한 임무를 완수하기만 한다면 예비 제자에서 일반 제자로 진급할 것이다. 능소각의 역대 예비 제자들 중 오직 너만 이런 특별한 영광을 가진 것이다.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 양 사제는 기회를 잘 잡아야 해.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 말지는 이번 기회에 달렸으니까.”
“관심 없어요.”
양준은 손을 휘저어 진급령을 던져버렸다.
조정문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손을 뻗어 진급령을 받았다. 그리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준, 이것은 장로회의 명령이다. 감히 거절하는 것이냐?”
“장로회가 뭐요?”
양준은 좀 귀찮아졌다.
“제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조용히 능소각의 예비 제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라고 굳이 저에게 진급하라고 핍박할 수 있나요?”
비록 양준은 그 서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손쉽게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아주 큰 위험이 있을 수도 있었다.
“넌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이구나.”
조정문이 비웃었다.
사실 이 진급령은 양준이 소안에게 감옥에서 구해졌을 때 이미 양준에게 줬어야 했다. 하지만 후에 양준은 하응상을 따라 구음 산골짜기로 갔다가, 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승동천이 나타나며 지금까지 미뤄진 것이었다.
“제가 평범하든 말든 사형이 참견하실 건 아니죠.”
양준은 입을 삐죽이며 조정문의 옆으로 지나갔다.
“양준!”
조정문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많은 능소각 제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네가 전승동천에서 뭔가를 얻었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 그곳에서 신기한 경험을 한 것은 너뿐만이 아니야! 감히 장로회의 명령을 무시하다니. 넌 그 결과를 알기나 하느냐!”
“꺼져!”
양준은 고개를 돌려 살기 어린 표정으로 조정문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조정문은 순간 얼이 빠졌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양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무기각 앞은 적막에 잠겼다. 많은 능소각 제자들이 방금 전의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양준이 장로회의 명령을 무시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장로회의 명령은 바로 금과옥조(金科玉律)였다. 명령이 하달되면 아무리 험악하고 위험한 일이라도 감히 거절하거나 반항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방금 전, 바로 눈앞에서 한 예비 제자가 장로회에서 하달한 지령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이건 정도를 벗어난 거 아닌가? 위아래가 있기는 한 건가?’
많은 사람들은 탄복하는 동시에 몰래 속으로 헐뜯었다.
조정문은 새파래진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쥔 진급령은 이미 볼품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속으로 화가 나면서도 막막했다.
대장로가 직접 그에게 무슨 일이 있든 양준이 이 진급령을 받고 지령의 임무를 완수하게 하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 임무가 무엇인지 조정문도 슬쩍 훔쳐보기는 했었다.
홀로 창운사지(蒼雲邪地)로 가서 실력이 그보다 낮지 않은 한 사사(邪士)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 임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것이었다. 창운사지는 수많은 사악한 무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만약 외톨이 사사를 마주치게 된다면 손쉽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지만, 만약 운이 좋지 않아 실력이 강한 상대를 만난다면 장로들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조정문은 양준이 무조건 임무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 앞에서 장로회의 지령을 거절할 정도로 간이 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하지?’
제자리에서 한참 생각한 조정문은 이를 악물고 홱 돌아서서 떠났다.
*아침 일찍부터 조정문 때문에 기분이 잡친 양준은 안색이 어두웠다.
삼 년 전의 그 사람이 콕 찍어서 자신에게 능소각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절대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나더러 능소각에 오라고 했을까? 이곳과 그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건가?’
종문에 들어와서 삼 년 넘게 그는 세태염량(世態炎涼)과 인정의 삭막함을 질리게 느꼈다. 양준은 능소각에서 조금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미련이 있다면 소안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미련도 최근에야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하응상도 있었지. 이 꼬마 사저와 있을 때면 마음이 따뜻해진단 말이야.’
걸어가면서 그는 등 뒤로 누군가 다급히 쫓아오는 것을 느꼈다. 향긋한 바람이 스치더니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양 사제…….”
양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바로 남초접이었다.
비록 전승동천에서 썩 유쾌하게 보내지 못했지만, 동문인 데다 그녀가 그를 건드린 적도 없었기에 양준은 꾹 참고 인사를 건넸다.
“남 사저!”
남초접은 생긋 웃었다. 그녀는 마치 전승동천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부 잊어버린 것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또 앞으로 네가 날 상대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럴 리가요. 사저, 괜한 걱정을 하셨네요.”
양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남초접은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전승동천에서는 내가 잘못했어. 사제가 너그럽게 생각하고 따지지 않기를 바라.”
그녀는 똑똑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전승동천의 일을 전혀 거리낌없이 꺼냈지만, 가볍게 한 마디로 넘어갔다. 그것이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고 더욱 진실되어 보였다.
양준이 옹졸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정말 그녀에게 불만이 있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말에 사르르 녹았을 것이다.
양준은 옅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었다.
“사저, 별말씀을요. 큰일도 아니었는데요.”
“사제가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많이 편해지네.”
남초접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한시름을 놓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사제, 오늘 일은 많이 경솔했어. 왜 장로회의 지령을 거절한 거야? 이렇게 되면 번거로워질 텐데.”
“조정문이 말했잖아요. 저는 스스로 평범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평범하게 살려고 하니 진급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는 거죠. 예비 제자가 나쁠 건 또 뭔가요?”
남초접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별로 대화할 기분이 아니라서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남초접은 입을 떡 벌렸다가 곧이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양준이 비록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하고 있으나 싸늘한 표정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때에 자꾸 달라붙으면 짜증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남초접과 헤어진 뒤, 양준은 자신의 동굴로 돌아왔다.
하응상은 이미 떠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화분 두 개가 많아져 있었다. 양준은 왠지 눈에 익은 기분이 들어 한참을 생각하다, 그것들이 공헌당 계산대 위에 올려져 있던 화분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