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139화 (139/853)

제 139장. 거지야

날이 어두워지자 마차가 멈추었다. 그들은 들판에서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우려고 했다. 이 무리는 대략 서른 명이 넘어 보였는데, 모두 숙련되게 각자의 일을 도맡았다. 곧이어 밥 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양준은 마차에서 내려 몸을 움직였다. 그는 최근에 터득한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마차에서도 사람이 내렸다.

양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세 여인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중년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풍만한 몸매와 백옥 같은 피부가 더해져 기품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젊은 두 여인이 있었다. 둘 다 스무 살쯤 되어 보였고, 그중 한 명은 하녀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녀 차림을 한 여인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다른 여인을 부축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요염해 보였다.

부축을 받는 여인이 아마도 중년 남자가 말한 아가씨 같았다. 평범한 집안의 여식으로 보이는 이 아가씨는 늘씬한 몸매에 어여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꽃무늬 천으로 만든 치마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이 세 여인이 나타나자 양준은 무인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부인의 우아한 기품이든, 아가씨의 청순한 모습이든, 아니면 하녀의 요염함이든 모두 평범한 기질이 아니었다. 남자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준이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하녀가 갑자기 양준을 노려보더니 교태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긴 뭘 봐? 또 보면 네 눈알을 파버릴 거야.”

말투는 비록 험악하게 양준을 꾸짖는 것이었지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의 시선들이 모두 재빨리 거두어졌다.

양준은 마른 기침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취아(翠兒)야!”

아가씨가 낮은 소리로 불렀다.

취아라고 불린 하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아가씨와 부인을 부축하고 옆으로 가서 앉았다.

잠시 뒤, 드디어 밥이 되었다. 무인들은 스스로를 챙기기 바빴고, 부인과 아가씨도 하녀인 취아가 시중을 들었다. 하지만 외부인인 양준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준은 쓸쓸하게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불쌍해 보였다.

부인과 아가씨가 그 모습을 보고 낮은 소리로 취아에게 뭐라고 애기하자, 취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밥과 반찬을 떠서 양준에게 건네주었다.

“거지야, 좀 먹어.”

양준은 거절하지 않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건네받았다.

취아는 그에게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방금 전의 매서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나지막하게 말했다.

“거지야, 화내지 마. 방금 전에는 널 욕한 게 아니야.”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날 뭐라고 부른 거야?”

그는 아까 낮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핏 중년 남자가 이렇게 부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잘 듣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취아도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거지라고. 아니야?”

취아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은 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내가 거지라고?”

양준은 드디어 제대로 들었다.

‘지금 내가 거지라는 건가?’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본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가 입은 옷은 해져서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데다가 온통 먼지를 뒤집어써서 아주 초라해 보였다.

취아는 더욱 즐겁게 웃으며 품에서 구리 거울을 꺼내 양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 스스로 좀 봐. 어디가 거지 같지 않은지.”

힐끗 훑어본 양준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 이게 지금 내 모습이라는 건가?’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서 몇 가닥은 아예 들러붙어 있었고, 얼굴도 온통 때로 가득해서 용모를 아예 알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옷까지 더해지니 정말 거지 그 자체였다.

보법을 터득하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런 꼴이 되다니. 양준은 문득 그가 여러 번 나무에 부딪히고, 물 웅덩이에도 자주 빠졌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취아는 웃으며 구리 거울을 거두고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물었다.

“거지야, 넌 어디서 왔어? 왜 혼자서 벌판을 돌아다니는 거야?”

양준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구걸하면서 여기까지 왔지 뭐. 나도 어디서 온 건지 몰라.”

“참 불쌍해.”

취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양준 몸의 먼지를 털어 주고 싶었지만 손을 더럽히기 싫어 그저 미간만 찌푸렸다.

“아쉽게도 나한테는 네가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어. 안 그러면 너한테 몇 벌 줘도 되는데. 지금 이미 가을철로 접어들어 밤이 되면 아주 춥단 말이야. 이렇게 얇게 입으면 병이 들 수도 있어.”

취아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누더기 같은 홑옷 한 벌만 걸친 채, 삐쩍 말라 앙상하게 늑골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이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옷도 따뜻하게 못 입다니. 불쌍해.’

취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양준은 저도 모르게 따스한 인정을 느끼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응, 많이 먹어. 부족하면 저쪽에 가서 스스로 떠서 먹어.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취아는 손을 털고 일어나 부인과 아가씨를 모시러 갔다.

*이튿날, 마차는 다시 길을 떠났다.

연속 이틀 동안, 양준은 그들 무리에 끼어 있었다. 낮이면 오씨 노인의 옆에 앉아서 그가 마차를 모는 것을 구경했고, 쉬는 시간이면 취아가 가끔씩 와서 말을 붙였다.

이틀 동안, 취아와의 한담을 통해 양준은 그들이 가려는 곳을 알아냈다.

목적지까지 아직도 대략 사흘 정도의 여정이 남아 있었는데 그곳은 해성(海城)이라고 하는 성곽이었다. 이들은 통주(通州)에서 왔는데, 원래는 그곳에서 작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반 년 전에 가문의 주인이 죽으면서, 부인이 아가씨를 데리고 해성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주인 어르신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취아는 상세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감히 말을 많이 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준은 그녀의 얘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식솔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고아에 과부라면 더 그랬다. 먼 길을 가다 보면 각종 위험과 걱정거리가 도사리고 있는데, 부득이한 이유가 없다면 그들이 어찌 이런 결정을 내리겠는가?

양준은 이 가문의 주인이 생전에 통주에서 많은 사람들과 척을 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죽자 부인과 여식이 기댈 곳을 잃고 멀리 타향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차에 동행한 많은 무인들이 양준의 추측을 입증한 셈이었다. 취아의 말로는 이 무인들 중 절반은 그들의 주인 어르신이 생전에 양성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르신이 죽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부인과 아가씨가 편히 길을 갈 수 있게 호송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해성에 도착한 다음 다시 통주로 돌아올 예정이었고, 그들 외에 일부 사람들은 돈을 써서 고용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길에서 그들은 적지 않은 강도들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위기를 넘겨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양준도 취아를 통해 해성의 상황에 대해 살짝 알아보려고 했으나, 취아는 그녀도 가 본 적이 없어 잘 모른다고 했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해성은 해변의 성곽으로서 내륙과는 다른 풍경이라는 것이 유일하게 알아낸 정보였다.

해변의 성곽!

양준도 호기심이 동했다. 이번에 보법을 터득하러 나오지 않았더라면 양준도 이렇게 먼 길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한의 가장 남쪽 땅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취아의 말대로라면 해성이라는 곳은 대한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성곽인 것이 틀림없었다. 마음속으로 기대를 품은 양준은 그들이 해성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양준의 현재 모습은 아주 지저분했지만, 그도 굳이 정돈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이미 그를 거지로 여기고 있는데 정돈하여 갑자기 말끔해지기라도 하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새에 양준이 가장 많이 한 일은 바로 마차를 모는 오씨 노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인이 말을 몰면서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묘함을 느꼈다.

채찍소리는 높지 않았고 폭도 크지 않았지만, 말들을 힘차게 달리게 만들었다.

그의 실력은 진원 경지 정도로, 그다지 높은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지라 무도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채찍을 휘두르는 동작에서 나타나곤 했다.

양준은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앞선 한 달 동안 보법에서 터득한 것과 결합해 보았다. 그러자 은근히 비슷한 점들이 눈에 보였다.

오씨 노인은 양준을 신경 쓰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다가 가끔씩 독한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이렇게 노인과 소년은 마차 위에 앉은 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날 저녁 무렵, 마차가 또 멈추었다.

양준은 마차에서 내린 뒤,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을 찾아 앉았다. 그는 땅에서 풀을 뜯어 아무렇게나 흔들어 보았다.

이 마차의 무인들은 모두 양준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가씨가 선심을 베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양준을 데려갈 리 없었다.

잠시 뒤, 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양준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거지야.”

취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내 이름을 알려 줬잖아. 호칭를 좀 바꾸면 안 돼?”

‘거지’라는 호칭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꼬맹이!”

취아는 그를 노려보더니 손바닥을 펼쳐 밤 두 알을 꺼내 양준에게 한 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도 한 알을 들고 까먹기 시작했다.

이 하녀는 종종 쉬는 시간에 간식을 가져와 양준과 나누었다. 양준은 이 하녀가 왜 거지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자신을 꺼리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서 알게 된 것인데, 취아에게는 남동생이 있었지만 굶어 죽었다고 했다. 자신도 전에 구걸을 해서 목숨을 부지했었는데, 나중에 부인과 아가씨가 거두어 주었다고 말했다.

양준이 죽은 남동생과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취아가 그를 꺼리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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