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141화 (141/853)

제 141장. 열을 셀 동안의 시간을 드릴 게요

싸움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쪽은 장정의 수하와 남은 무인들의 혼잡한 싸움이었고, 다른 한쪽은 장정과 오씨 노인의 결투였다. 그들 모두 뒤엉킨 채, 시끄럽게 싸우고 있었다. 욕설과 분노에 찬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한편, 양준은 어둠을 빌려 살금살금 세 번째 마차로 다가갔다.

그는 원래 혼자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며칠간 보살펴 준 취아를 떠올리자 양준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차 안의 세 여인은 바깥의 기척에 놀라 잠을 깼다. 양준이 마차에 다다랐을 때, 마침 안에서 취아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렸다.

“오밤중에 왜 싸우는 거래요?”

곧이어 옷 입는 소리도 들렸다.

양준도 지체하지 않고 문을 확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야!”

취아가 깜짝 놀라며 주먹을 치켜들고 정면으로 양준을 마구 때렸다.

“때리지 마. 나야!”

양준은 취아의 두 손을 힘껏 잡았다.

“거지야?”

취아는 양준의 목소리를 알아듣더니 곧이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 변태 같은 자식. 어서 내려가.”

그녀는 말하면서 발을 들어 양준을 걷어차려고 했다. 마차 안에 있던 부인과 아가씨 역시 양준 때문에 깜짝 놀라 벌벌 떨고 있었다.

“입 다물어!”

양준은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장정이 배신했어요! 직접 들어 보세요!”

이 말은 마차 안의 세 여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오밤중에 갑자기 마차 안으로 쳐들어왔으니, 그는 반드시 이유를 해명해야 했다. 고개를 들어 부인과 아가씨를 본 양준은 또다시 시선을 피했다.

마차 안의 세 여인은 멍하니 있다가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정말 오씨 노인이 장정에게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에는 장정의 서늘한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취아는 깜짝 놀랐다.

부인과 아가씨도 이불을 끌어다 몸을 덮었다. 그들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먼저 옷을 입으세요. 제가 모시고 떠날게요.”

양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오씨 노인과 남은 무인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또 이번 전투에서 누가 마지막까지 웃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마차 안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양준의 침착함에 정신을 차린 세 여인은 그의 말을 듣고 지금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부인은 상기된 얼굴을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지야, 너 좀 내려가 있거라. 우리가 옷을 다 입고…….”

양준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힐끔 보더니 귀찮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부인, 살고 싶다면 지금 많은 것을 신경 쓰면 안 돼요. 제가 지금 내려가면 들통난다고요.”

그의 말을 들은 부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세 여인은 다급히 마차 안에서 옷을 입었다. 비록 양준이 그들을 등지고 있었지만, 부인과 아가씨는 여전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르는 남자 앞에서 옷을 입다니, 예전이라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위급한 상황인지라 부끄러움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취아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녀는 성격도 개방적인 데다 양준과 잘 아는 사이라 금방 옷을 다 입고, 부인과 아가씨를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여인은 모두 옷을 입었다.

“그럼 우리 어서 도망치자.”

취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마차의 문을 젖히려던 양준은 행동을 멈추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늦었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오씨 노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잠깐 새에 바깥의 전투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오씨 노인과 남은 무인들의 패배로 끝난 것이다. 약을 먹은 오씨 노인과 남은 무인들은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장정과 그의 수하들이 먼저 습격했기에 인원이 적어도 우세를 차지했다.

“흠흠, 다 늙어가지고!”

바깥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장정의 목소리였다. 오씨 노인과 싸우면서 그도 적지 않게 부상을 당한 듯했다.

이 기침소리에 양준은 실낱 같은 희망을 보았다.

“어떡해? 어떡해?”

취아는 양준을 꽉 잡고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부인과 아가씨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세 명의 여인들이 거지라고 여겼던 소년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고 말았다.

“당황하지 마세요. 부인, 우선 말로 그를 꼬드기세요. 제가 기회를 봐서 손을 쓸게요.”

양준은 나지막하게 말하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숨을 참으며 심장소리를 억눌렀다.

부인은 비록 위험에 처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면서도 양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취아와 아가씨처럼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발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양준은 귀를 기울여 다섯 사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지자 취아는 양준에게 더욱 바짝 붙었다. 작은 몸뚱아리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발걸음소리는 마치 목숨을 취하려는 귀신처럼 공포스러웠다.

발걸음소리는 드디어 마차 앞에서 멈추었다.

장정은 또 기침을 하며 말했다.

“부인, 아가씨, 내리시지요.”

부인은 길게 숨을 들이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정, 나리께서 널 친형제로 대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부인의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장정이 이토록 모질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밖에서 침묵이 이어지더니 한참 뒤에야 장정이 입을 열었다.

“부인, 용서하세요. 새는 먹이로 인해 죽고, 사람은 돈으로 인해 죽죠. 나리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이토록 많은 재산을 어찌 부인과 아가씨처럼 힘 없는 분들이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그저 돈 때문인 것이냐?”

부인은 처참하게 웃더니 또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은 생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장정이 대답했다.

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재산을 가져가거라. 장정, 옛정을 생각한다면 우리 모녀를 풀어주거라. 우리는 그저 우리끼리 조용히 살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은 없다.”

부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모든 희망을 양준에게 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양준이 침착한 모습을 보였지만, 부인의 눈에 그는 그저 거지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실력이 강한 장정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밖에서 부인의 말을 들은 장정은 꿈쩍도 하지 않더니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부인, 아가씨, 먼저 내려오시지요.”

“정말 이토록 무정하게 굴 것이냐?”

부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장정이 그녀의 부탁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을 전부 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부인.”

장정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만약 순순히 협조하신다면 온전한 시체로 남겨 드릴게요. 하지만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흐흐, 부끄럽지만 소인은 부인을 오랫동안 흠모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그동안 부인께 어쩌지는 못했지만, 이제 부인이 죽게 되셨으니 제 소원을 이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차 안에서 부인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장정이 자신에게 어떤 몹쓸 짓을 벌일 지, 그리고 또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지 상상되었다.

“양심 없는 놈!”

취아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장정은 냉소를 지었다.

“취아야, 이따가도 그렇게 욕할 수 있기를 바랄게.”

취아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양준의 뒤로 몸을 숨겼다.

마차 안의 세 여인은 모두 몸을 벌벌 떨었다. 그로 인해 마차까지 흔들거릴 정도였다.

“부인, 열을 셀 동안의 시간을 드릴 게요. 스스로 내려오시면 제가 깔끔하게 보내 드리고, 잘 묻어 드리겠습니다.”

장정이 최후통첩을 전했다.

부인은 눈을 감고 맑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딸과 손을 꽉 마주 잡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그녀는 결심을 내렸는지 눈을 떠서 딸을 보고는 처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단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

남에게 수치를 당하느니 깔끔하게 죽는 게 나았다.

그녀가 일어나려는데 양준에게 잡혀서 다시 앉혀졌다. 양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장정의 귀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부인께서는 소인에게 기회를 주고 싶으신가 보네요. 그렇다면 전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말을 마친 장정은 바로 손을 뻗어 마차의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발이 마차에 닿기도 전에 새카맣고 때가 잔뜩 낀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히죽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거지잖아!’

이 얼굴은 분명 며칠 동안 그들이 데리고 다닌 그 거지의 얼굴이었다.

장정은 깜짝 놀랐다. 그는 모든 정신을 부인에게 쏟은 탓에 마차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내 그는 화가 치솟았다. 진원 경지의 고수인 그가 한낱 거지 때문에 깜짝 놀라는 꼴이라니, 정말 너무나 창피했다.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뻗어 양준을 잡아 밖으로 내던지려고 했다.

양준은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가볍다 못해 무력해 보이는 주먹을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눈 깜짝할 새에 장정은 가슴팍에 네다섯 차례 주먹을 맞았다.

‘빨라!’

장정은 다시 한번 놀랐지만, 곧 냉소를 지었다.

“이게 죽으려고!”

그는 이 거지의 주먹을 맞고,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저 거지가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른 거라고 생각한 그는 양준을 번쩍 들더니 밖으로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죽여!”

장정의 수하들은 그 소리에 바로 양준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번뜩이는 검광이 양준에게 드리워졌다.

“거지야!”

취아는 소리를 질렀다. 그토록 태연자약하던 양준이 이토록 손쉽게 장정에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소리치자마자 장정의 안색이 갑자기 다채로워졌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던 반쪽 몸이 제자리에 굳어진 채, 얼굴이 시뻘개지며 눈알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은 무척 괴기스러웠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장정의 가슴팍에서 피가 튀었다. 동시에 마구 날뛰는 뜨거운 원기가 그의 몸에서 솟구쳐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