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장. 염양삼첩폭
그 후 며칠 동안 양준은 해성에서 돌아가는 상황과 주변 환경을 살폈다. 해변의 경치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공기도 맑아 확실히 좋은 거주지였다.
양준은 찻집과 술집에서 해변 성곽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이한 얘기들을 적잖게 들었다. 더욱이 신기루라는 기이한 현상을 직접 보기도 했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는 실로 황홀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또 해성 근처에는 적지 않은 종문들이 있었다.
만약 각 세력을 등급으로 나눠 중도 8대 가문을 초대형 세력이라 한다면, 능소각은 기껏해야 이등 세력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이곳 종문들의 세력은 일등에서 삼등 사이로 골고루 있었다. 심지어 초대형 세력과 견줄 만한 세력도 있었다.
이런 세력은 내륙의 세력과는 달리 섬을 본거지로 했다. 크고 작은 섬들을 차지하고 섬의 수련 자원을 독점했던 것이다. 땅이 좋아야 뛰어난 인물이 나온다고, 거기에 수려한 풍경까지 더해지니 많은 이들이 찾아가 무예를 배웠다.
해성에서는 일부 가문의 세력을 제외하고, 무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 세력이 섬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섬의 천지 기운이 내륙보다 한 단계는 더 짙어, 섬에서 수련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섬을 본거지로 하는 세력들의 무인들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내륙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때문에 해성의 있는 무인들은 수도 적고, 실력도 높지 않았다.
양준은 해성의 번영을 만끽한 뒤, 다시 해변으로 갔다. 직접 눈으로 밀물과 썰물, 그리고 물결치는 파도를 보면서 파도가 해안을 강타하는 순간, 뇌리에 뭔가 번뜩였다. 어렴풋하게 자신의 깨달음과 오씨 노인의 무도 사이에 공통점을 파악한 것이다.
바로 자연스러움이었다.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마치 파도가 밀려올 때, 장애물에 부딪치면 수많은 물보라가 되어 흩어졌다가 다시 큰 물줄기로 모이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양준의 눈앞에 마치 무도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번뜩이는 영감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양준은 조용히 제자리에 서서 자신의 깨달음과 오 노인의 무도를 천천히 하나로 융합시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양준은 마치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이 해변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귓가에는 오직 흐느끼는 듯한 바닷바람 소리와 파도가 둑을 강타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전체적인 기질도 바뀌었다. 마음과 정신이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견뎌 내고 승화를 가져왔다.
양준은 자신이 만든 보법을 펼쳤다. 신형이 허상으로 바뀌며 마주 오는 파도를 밟았다. 마치 평지를 밟듯이 이 파도에서 저 파도 위로 건너가면서도 몸에 물 한 방울 닿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신형은 연속 열다섯 번을 번쩍이고 나서야 원기가 빠져나가 풍덩하고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양준의 온몸이 흠뻑 젖었다.
그러나 양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정면으로부터 휘몰아쳐 오는 거대한 파도를 마주한 채, 주먹을 천천히 내질렀다.
염양삼첩폭(炎陽三疊爆)!
공기 속에서 세 번의 다급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세 갈래의 원기가 주먹에서 뿜어져 나가며 거대한 파도에 구멍을 냈다.
이 순간에 이르러 양준은 오씨 노인에게서 배운 무도의 흔적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변화까지 더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염양폭에 적용했다. 지금의 염양폭은 단순하게 일회성 폭발에 그치지 않았다. 세 갈래 원기가 용솟음쳐 나와 점점 더 강해지면서, 마치 파도가 덮쳐 오는 것처럼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었다.
“완전 귀재(鬼才)군.”
지마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얼마 전에 양준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그는 몹시 놀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양준은 다시 한번 본연의 기반에서 더욱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아 세상이 바뀐 걸 모르는 건가?’
지마는 느낀 바가 많았다.
양준은 온몸이 푹 젖은 채로 바다에서 기어 나왔다. 문득 방금 서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한 구릿빛 피부에, 지저분한 머리를 한 여자애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애는 대략 7~8살쯤 되어 보였고, 커다란 눈은 생기가 넘쳤다. 그 아이는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맨발로 서 있었는데, 작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해변에 사는 이들은 햇볕을 오래 쬔 탓인지 보통 피부가 하얗지 않았다. 여자애의 피부는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양준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을 하고서 여자애에게로 다가갔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방금 전 깨달음을 얻을 때,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을 주의해 보지 않은 것을 자책했다.
여자애의 안색을 보니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양준은 감히 원기를 돌려 옷을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푹 젖은 채로 걸어갔다.
그는 여자애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물었다.
“꼬마야, 여기서 뭐 해?”
여자애는 큰 눈을 깜박이며, 여전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 눈은 티 없이 맑았다. 여자애가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자 설령 양준이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왠지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양심에 가책이 있는 사람이라도 당장 정화될 듯한 눈빛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여자애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넸다.
양준이 고개를 숙이고 보니 구운 생선이었다.
해변에 사는 어민들은 당연히 물고기를 주식으로 했다.
“나한테 주는 거야?”
양준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자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구운 생선을 양준의 손에 쥐여주고는 도망가 버렸다. 백사장에는 작은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겨져 있었다.
얼마 안 가, 여자애는 문득 멈춰 서서 양준을 돌아보았다.
곧이어 다시 양준 곁으로 돌아와서는 그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양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여자애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떠한 악의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이를 따라서 얼마 가지 않아, 어느 초라한 집 앞에 다다랐다. 여자애는 집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자고?”
양준이 묻자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가볍게 웃었다.
‘손님 접대를 하려는 모양이군.’
그가 미처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집 안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의 얼굴에는 무정한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게다가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했다.
노인도 여자애와 양준을 보자 깜짝 놀랐다.
양준은 오해를 살까 두려워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르신, 이 집 손녀 맞죠?”
노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여자애에게 손짓했다.
“소우(小雨), 이리 와.”
여자애는 고개를 저으면서 양준의 옷을 힘껏 잡아당겨 집 안으로 끌었다.
노인은 웃으면서 양준을 바라보았다.
“젊은이, 꺼리지 않는다면 들어오게나. 소우는 자네가 추울까 봐 집 안에서 옷을 말리라고 하는 걸세.”
양준은 그제야 여자애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따뜻한 호의를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어.’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양준은 소우와 함께 집 안에 들어섰다. 집 안을 한 번 휙 둘러본 그는 가슴이 저렸다. 그야말로 가진 것이 없는 집이었다. 집 안에는 침대 하나에 낡은 솜이불 몇 채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해성에서 부자들이 주색에 빠져 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해성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는 이리 가난에 쪼들리는 조손이 살고 있었다. 빈부의 격차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소우는 서둘러 숯불에 불을 지피고 양준을 숯불 곁으로 끌고 가 옷을 쬐게 했다.
바닷바람이 너무 강한 탓에, 집 안에서 숯불을 피운 것이다. 불길이 일자 집 안에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집에는 의자도 없어, 양준은 스스럼없이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았다.
“젊은이는 무인인가?”
노인은 소우를 무릎에 앉히고 한마디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양준은 의아스러웠다. 그는 지금 기운을 감춘 상태로, 진원 경지의 무인도 신식을 수련하지 않으면 그가 무인임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변의 늙은 어민이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양준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허허 웃었다.
“젊은이는 며칠 동안 해변에서 미동도 없었네. 일반인이라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여러 날이 지났나요?”
양준은 마음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지난번에 각성할 때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번에 각성할 때는 반드시 은폐된 곳을 찾아야 할 듯했다. 만약 갑자기 위험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우가 매일 자네를 보러 갔네. 그렇지 않으면 이 늙은이가 어찌 감히 자네를 집에 들여놓겠는가?”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양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소우는 줄곧 양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준이 손에 쥔 생선 구이를 입에 대지 않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먹을게. 소우, 참 착하네!”
양준은 생선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비록 생선은 식은 상태였지만, 양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맛을 음미했다.
“맛있어.”
소우는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구운 생선을 다 먹고 옷도 다 마르자, 양준은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르신, 소우는 말을 못 합니까?”
노인은 슬픈 표정을 짓더니 소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네. 단지 집에 변고가 생겼을 뿐이지. 그때부터 말을 잃었다네.”
“네.”
양준은 남몰래 탄식했다. 만약 소우가 태생적으로 말을 못 한다면 사람을 찾아 치료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음속 응어리 때문이었다.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한, 소우는 영영 말하지 않을 것이다.
노인은 이 일에 대해 더 깊게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양준도 남의 마음속 상처를 헤집기 싫어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군. 변변치 못하지만 여기서 하룻밤만 쉬시게나.”
노인이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자 소우가 서둘러 부축했다.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양준은 일어서서 인사했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노인과 소우는 침대에 눕고 양준은 땅바닥에 자리를 폈다. 밖에서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능소각에서의 3년 생활이 충분히 고생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군. 노인과 아이 둘이서 어떻게 연명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