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장. 운하종
한밤중이 되어 비몽사몽간에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양준은 놀라 잠에서 깼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주변을 둘러보았었다. 근처에는 다른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었고, 이곳에는 단지 이 집 한 채와 노인과 손녀 둘뿐이었다.
게다가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모두 무인이었다.
양준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침대에서 자고 있던 노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두운 밤에도 양준은 그의 겁먹은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어르신……!”
양준이 입을 열어 말하려는데, 노인이 손짓으로 말했다.
“쉿!”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지만 분명 지금 들이닥치는 무인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얼마 안 되어, 밖에서 낡은 집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우는 놀라 잠에서 깨더니 할아버지를 안고 벌벌 떨었다.
양준의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영감탱이, 어서 문 열어.”
밖에서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손녀를 품에 껴안았다. 흐릿한 눈에는 분노와 무기력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손녀를 위로했다.
“소우, 괜찮아. 할아버지가 있잖니. 소우야, 걱정하지 마.”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인내심이 없었다. 노인이 끝까지 문을 열지 않자, 그냥 대문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바닷바람이 집 안으로 들이닥치면서 얼마 안 되는 온기를 거두어 갔다.
“영감탱이!”
그중 한 명이 험상궂게 쳐들어왔다.
“간덩이가 부었군. 감히 문을 닫아 걸어? 그냥 칼로 찔러 버리는 수가 있어!”
“또 왜 온 것이오! 나가시오!”
노인은 손녀를 감싸 안고 울부짖었다.
“애 부모도 모두 잡혀 갔소. 지금 여기에는 우리 둘만 남아 외롭게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어째서 아직도 놔주지 않는 것이오?”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나. 우리는 그들 부부를 살기 좋은 운하도(雲霞島)에 데려갔을 뿐이야. 지금 그들이 당신들을 보고 싶어 하니 데리러 온 것뿐이고. 같이 가면 온 가족이 함께 모일 텐데 뭐가 걱정이야?”
앞서 들어왔던 이가 섬뜩하게 웃으면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자는 양준을 보자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양준의 몸에서 무인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자, 양준이 일반인인 줄 알고 더는 주목하지 않았다.
‘거, 참 이상하네. 이 집에 언제부터 사람이 하나 더 늘었지?’
노인은 울며 말했다.
“그런 복은 우리 일반인들이 누릴 복이 아니오. 두 분이 자비를 베풀어 아이 부모를 돌려보내 줄 수는 없는가? 아이가 부모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소.”
“영감탱이가 호의를 모르는군!”
그는 냉혹하고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보고 싶으면 우리를 따라가면 돼. 운하도에 가면 온 집식구가 함께 모일 텐데. 왜 여기서 울고불고 난리야!”
두 명의 무인이 집 안에 들어오고 나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양준은 이미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운하도에 대해서는 이미 해성에서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섬에는 운하종(雲霞宗)이라는 종문이 있었다. 세력으로 따지면 능소각보다도 못한 삼등 세력이었다.
그들이 왜 이곳에 와서 사람을 데려가려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노인은 소우가 집의 변고 때문에 말을 잃었다고 했다. 아마 그때 말한 변고가 이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양준은 괜히 남의 일에 나서는 이가 아니었다. 전에 취아를 도와준 것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조손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 소우의 순진하고 착한 심성은 그에게 충분한 감동을 주었다.
집에 들이닥친 두 명의 무인은 모두 기동 경지로 실력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정말 싸우게 되면 양준은 그들을 쉽게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손쓰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그들의 배후에는 종문이 있었다. 일단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면 노인과 소우에게 화를 불러올 수 있었다.
‘여러모로 계략을 잘 짜야겠군.’
“두 분에게 부탁하겠소. 아이 부모를 돌려보내 우리 가족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해주시오.”
노인은 흐느껴 울며 침상 위에 무릎을 꿇고 연신 절을 했다.
“제기랄, 영감탱이가 시끄럽네. 왜 자꾸 열 받게 해.”
운하종의 무인은 욕지거리를 하더니, 그들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 했다.
이때, 양준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넌 뭐야?”
운하종의 무인은 양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는 일찍부터 양준의 정체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런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노인이 끊임없이 애원하는 바람에 아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양준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연신 굽신거리며 말했다.
“저는 이 집의 먼 친척입니다.”
“먼 친척이라고?”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양준을 훑어보았지만,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여긴 왜 왔어?”
양준이 서둘러 대답했다.
“외지에서 사업을 하다 망해서 친척을 찾아온 겁니다. 이모부와 이모는 이미 두 분께서 운하도로 모셨군요. 저는 운하종을 오래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진작 입문하고 싶었지만, 연줄이 닿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두 분을 뵙게 되었으니 하늘이 도와주신 듯합니다. 두 분께서 저를 운하도에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양준의 말투는 매우 겸손했다.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으나, 기대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운하도의 무인들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운하도에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니! 미쳤거나 멍청한 놈인가 보군.’
두 사람은 양준을 훑어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준은 더욱더 초조해했다.
“저는 오늘에야 해성에 도착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운하종에 입문할 수 있다면 후일 두 사형께 반드시 사례를 톡톡히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뇌물을 주려는 것인가?’
운하도의 두 무인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다 보니 별의별 사람을 다 보았다. 그러나 개중에도 오늘 만난 바보의 반응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해성에 온 지 하루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일찍 말하지. 너처럼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지인들이 속이기 가장 쉽단 말이야.’
양준은 긴장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졸였다. 운하도에서 일반인들을 붙잡아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로서는 당장 조손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이 이 방법뿐이었다.
늙은이와 어린애까지 잡아 가는 것을 보아서는 젊은 사내인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과연 두 무인은 반시진이나 눈을 부릅뜨고 있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양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좋다고. 운하종에 입문할 생각이라니, 우리가 어찌 막겠는가. 좋은 생각이야. 젊은이가 골격이 다부지고 영리해 보이는군. 무술을 읽힐 귀재야. 나중에 출세하면 추천해 준 이 두 사형을 잊지 마.”
“당연하죠.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셋은 서로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어이구, 멍청한 놈!’
‘멍청한 자식들!’
노인과 손녀는 아직까지도 침대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한참 뒤에 양준이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두 분, 저 혼자 운하종에 입문하는 건 어떻습니까? 늙은이와 어린애까지 데리고 가면 길에서 짐이 될 듯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양준이 가장 마음을 졸이는 문제였다. 만약 그들이 노인과 손녀를 놔주려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그들을 죽여야 했다. 좀 전에 허튼소리를 가득 늘어놓은 것도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준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사람을 잡으러 온 것은 운하종에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이면 다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양준을 잡았으니, 당연히 늙은이나 어린애까지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가는 도중에 죽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었다.
둘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건 그래. 원래는 한 집식구끼리 모일 수 있게 데려가 주려고 했던 건데, 영감이 우리 호의를 영 몰라주네. “
“나이가 들면 다 그렇습니다. 사형들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양준이 웃었다.
“운하종에 입문하기로 결정했으니, 지금 당장 가자.”
운하종의 두 무인은 임무를 완수하자 좁고 갑갑한 방을 떠나기 위해 서둘렀다.
“그럼 두 분은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할아버지와 여동생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 나가겠습니다.”
“빨리 나와.”
운하종의 무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한마디 당부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떠나고서야 양준은 천천히 침대 옆으로 걸어가 벌벌 떨고 있는 조손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방금 전 양준이 운하종의 무인과 헛소리로 일관할 때,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괜히 허점을 드러낼까 두려웠던 것이다.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이,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 운하종은 사람 갈 곳이 못 되네.”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나름대로 계획이 있습니다. 잊으셨나요? 저도 무인입니다.”
노인의 흐릿한 눈에 빛이 반짝였다. 그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양준은 품 속에서 은자를 꺼내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은 며칠 전 죽은 무인들의 몸에서 얻은 것이었다. 양준이 다시 진지하게 당부했다.
“내일 아침 일찍 해성을 떠나십시오. 소우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세요. 더는 이곳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양준은 말을 마치고 소우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뒤돌아 나갔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제야 노인은 떨리는 손을 펼쳐 보았다.
은자 한 묶음이었다.
노인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는 소우와 함께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소우야,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 오빠의 모습을 잘 기억해 두거라. 훗날 다시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에게 꼭 보답해야 해. 알겠지?”
노인이 근엄하게 당부했다.
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앳된 얼굴에 이미 두려움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