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장. 잡입하다
“지도는… 제 몸에 새겨져 있어요…….”
부인은 고개를 푹 떨구고 몸을 떨었다. 그녀 역시 용기를 내서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다.
“부인…….”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협…….”
부인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건 남편이 평생 심혈을 기울인 것이에요. 나는 이것이 묻히는 것이 싫고, 원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요. 사례라고 생각하고 소협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받아 주세요.”
양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가 다시 거절한다면 부인은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몸을 숙이고 앉아 부인의 허벅지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높고 험한 산으로 흡사 하나의 섬 모양 같았다. 그리고 많은 곳에 특수한 표기가 되어 있었고, 그중 길 하나는 끊임없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지도는 부인의 허벅지 전체에 그려져 있었는데, 수 놓는 바늘에 물감을 묻혀 새긴 것으로 보였다. 비록 완벽한 지도는 아니었지만, 완성본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듯했다.
양준은 평범한 여인이 어떻게 몸에 이런 대규모의 지도를 새길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까?
양준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인은 계속 파르르 떨며 두 눈을 감은 채, 눈물만 끊임없이 흘렸다.
이십 분쯤 지나서야 양준은 모든 것을 머릿속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인의 찢어진 옷가지를 정리해 주었다.
“소협, 수고해 주세요.”
부인은 땅바닥에 비스듬히 앉아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마치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은 듯했다. 양준은 그녀의 말투에서 결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그녀의 다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었다. 오로지 원한을 갚기 위해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소원이 이루어지자 자연스럽게 아무 미련도 없었다.
양준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양준은 부인이 가져온 바구니를 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바구니 안에는 흑현과가 담겨 있었다.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해변으로 걸어갔다.
산꼭대기, 부인은 줄곧 거기에 앉아 있었다. 눈물은 말라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양준은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삶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벗어나기만을 원했다.
몇 시진 뒤, 양준은 바닷가에 이르렀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운하종의 큰 배가 느릿느릿 도착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양준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큰 배가 도착하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뱃전에 나와 있던 운하종의 제자는 배에 오르는 길을 막고서 사람들의 바구니를 검사했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 이는 배에 오르도록 허락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이는 바구니를 빼앗고 가차 없이 바다에 던져 아래쪽 요수에게 먹였다.
몇십 명 가운데서 서너 명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그들은 바다로 던져져 요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양준은 인파 속에 몸을 숨겼다. 누구도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흑현과를 따러 온 이들은 모두 일반인이었다. 운하종의 어느 제자가 일반인을 기억하겠는가?
반 시진이 지나서야 큰 배는 다시 움직였고, 왼쪽 섬에 이르러 일반인들을 내려놓았다. 일반인들은 다시 저택에 보내졌다.
다시 운하종의 건물에 머물면서 양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지금쯤 배를 훔쳐 이곳을 떠날 궁리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운하종이 거북 등딱지 전체를 손에 넣은 이상,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지도는 섬으로 향하는 항해도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양준은 부인의 정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 지도를 그에게 보여주고 기억하게 했다. 물론 그가 묻어 두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만일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운하종은 며칠 내 또는 한두 달 내에 틀림없이 움직일 것이다.
양준은 골똘히 추측해 보았다.
묘화성은 거북 등딱지 전체를 얻고서도 운하종에 바쳤다. 물론 아들의 앞날을 위해서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묘씨 가문에 신비한 섬을 탐색할 실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거북 등딱지로 운하종의 호감을 사고, 묘림의 앞길을 닦아주려 한 것이다.
지금 양준이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섬 내부 지도에서는 대부분의 위험을 피하고 곧장 핵심 장소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신비한 섬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모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했다.
지금 문제는 어떻게 몰래 운하종과 함께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운하종에서는 신비한 섬으로 가는 항해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혼자서는 영원히 그 섬에 갈 수가 없었다.
양준은 며칠 밤을 매일같이 외출하며 소식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일부 제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운하종 장로가 최근 신비한 항해도 한 장을 얻었으며, 탐색하기 위해 바삐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 제자들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모두 장로들의 대화를 귀동냥해 들은 것으로 구체적인 상황은 그들도 잘 몰랐다.
양준이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운하종의 탐색 대열에 잠입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아침, 뜰에서 운하종 제자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잡혀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일반인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
모두들 겁에 질려 있는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또 약초를 캐러 가는 겁니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캐러 갔던 거 아닙니까?”
“이번엔 약초를 캐러 가는 게 아니다. 뭘 하는지는 알 필요 없어. 그냥 예전처럼 배에 타면 돼.”
운하종의 제자가 거짓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양준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정말 기회겠군.’
그들은 전처럼 해변으로 갔다. 해변에는 전보다 훨씬 더 큰 배가 정박해 있었다. 배의 길이는 약 스무 장 남짓했고, 돛대가 다섯 개나 되었다. 돛이 펄럭펄럭 휘날렸다. 뱃머리는 마치 용머리를 한껏 쳐든 것 같았고, 기세가 위풍당당했다.
많은 이들은 평생 이렇게 큰 배를 본 적이 없었다. 모두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 운하종에서 가장 큰 용선이로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지?”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양준은 자신의 짐작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뜻밖이군. 어떻게 하면 운하종의 탐색 대열에 섞여 들어갈까 백방으로 궁리하고 있었는데. 놈들이 알아서 데리고 와 주다니. 운하종이 일반인들을 데리고 가는 건 보물을 찾으라는 건 아닐 거야. 그냥 배에서 일을 시키려는 거겠지. 이렇게 큰 배를 움직이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양준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표정이 냉정해졌다.
운하종이 탐험하러 가는 배인 이상, 배에는 틀림없이 고수들이 있을 것이다. 진원 경지보다 대단한 고수면 신유 경지였다.
진원 경지의 무인 앞에서는 그의 실력을 숨길 수 있었지만, 만약 신유 경지 고수가 신식으로 살펴본다면, 양준의 실력이 발각될 터였다. 때문에 내내 조심에 조심을 기해야 했다. 절대 어떤 허점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가 실력을 속인 것이 걸리는 순간,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다.
양준은 인파를 따라 운하종 제자들에게 떠밀려 큰 배에 올라탔다. 칠십 명에 가까운 일반인들이 제자들의 지시 하에 각자 다른 일을 도맡았다.
양준은 운이 좋아 노를 젓는 일에 배치 받지 않고, 잡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정해진 임무는 없지만 무엇이든 다 해야 했다.
이는 양준의 뜻에 부합했다. 아래에 숨어서 노를 저으면 안전할 수는 있었지만, 양준은 갑판에서 일하며 여러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 더 좋았다. 신중을 기해 신유 경지 고수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면 되었다.
또다시 한참 동안 기다리니 운하종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왔다. 선두에 있는 자들은 고령의 노인 두 명이었다. 노인들은 혈색 좋은 얼굴에 백발을 하고 두 눈에는 빛이 번뜩이며 온몸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운하종의 절정 고수가 틀림없었다.
둘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운하종의 제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 모두 운하종의 정예들로, 남녀 합쳐서 오십 명 안팎이었다.
원래 배 위에 있던 운하종의 중년 사내가 황급히 큰 소리로 외쳤다.
“사숙, 어서 오십시오.”
이에 선상에 있던 운하종 제자들도 급히 호응했다.
노옹과 노파는 미소 짓더니 배 위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노파가 물었다.
“준비는 다 됐는가?”
중년의 사내가 공손히 대답했다.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두 분께서 오셨으니 곧 출항할 수 있습니다.”
“음.”
노옹은 외마디로 대답하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준비하게. 나와 난(蘭) 사숙은 선실에서 폐관할 것이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게.”
“예.”
신유 경지 두 늙은이가 선실에 들어가서야, 양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중년의 사내는 운하종에서 지위가 낮지 않은 듯했다. 그는 배 위에 서서 제자들을 승선시켰다.
반 시진 동안 바쁘게 준비한 뒤, 그의 명령으로 큰 배가 비로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준은 갑판에 서서 일을 하는 척하며 큰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외웠다.
큰 배는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치며 하루 동안 천 리를 나아갔다. 점점 주변에는 섬이 없어지고 끝없는 바다만 남게 되었다.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배에 오른 지 사흘이 되었다. 양준은 그동안 줄곧 잡일을 하며 조심스럽게 염탐하여 운하종 제자들의 한담에서 일부 상황을 알아냈다.
배에 이리 많은 사람들을 실은 것은 확실히 신비한 섬을 탐험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운하종의 제자들은 그 신비한 섬을 은도(隱島)라고 불렀다. 은도라는 말에 양준은 문득 해성에서 들었던 기이한 얘기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