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장. 묘림
그중 하나가 은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기루에 비친 경치가 거짓이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망망대해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원인에서인지 그 경치가 먼 곳까지 전해지며 해성 주민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신기루로 보이는 곳에 도저히 갈 수가 없고, 오직 섬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어야 가까이 갔을 때 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쉽게 접근할 수 없고, 또한 보이지도 않는 섬을 은도라고 한다. 은도에는 대단한 재물과 단숨에 절정에 오를 수 있는 무공과 공법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재지보가 있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은도에 가고 싶어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운하종이 이런 기연을 얻게 되었다. 때문에 신유 경지 고수 두 명을 포함한 정예들을 보내 은도를 탐험하게 한 것이다.
운하종에는 신유 경지 고수가 넷뿐이었는데, 지금 이곳에 절반을 보냈다. 그들이 이번 탐험에 거는 기대를 엿볼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양준이 가장 많이 들은 것은 운하종 제자들의 은도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들은 은도에서 어떤 기연과 만남이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양준은 이로부터 전승동천이 떠올랐다. 그는 줄곧 ‘폐관’ 중이던 지마를 불러 물어보았다. 지마는, 은도는 전승동천이 아니며, 아마 어떤 큰 인물이 섬을 차지하고 수련하던 곳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외부인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진법을 쳐 섬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라고 했다. 아니면 은도에 일반인들은 전혀 볼 수 없는 자연의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여하튼 지마는 은도에 기연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말해 주었다.
*양준은 가는 내내 운하종 제자들의 한담을 통해 많은 고수들의 이름과 실력을 기억했다. 배를 지휘하던 중년 사내의 이름은 유수평(兪修平)으로 진원 경지 9단계 실력을 갖춘 운하종의 장로였다.
진원 경지가 장로 직을 맡고 있는 것을 봐서 운하종은 확실히 능소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운하종의 신유 경지 고수들은 모두 나이가 많았다. 능소각의 장로들도 나이가 많다지만, 운하종의 두 고수보다는 젊은 편이었다.
배에 오른 두 신유 경지 고수 중에서 노옹은 정갑자(丁甲子), 노파는 곽향란(霍香蘭)이었고, 둘 다 신유 경지 4단계였다. 그들은 모두 운하종의 태상장로(太上長老)로 평상시 종문 내에서는 줄곧 좌선하거나 폐관을 한다고 했다. 늘 수련만 하는 사람들이라 이번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양준이 갑판에서 묵묵히 청소하고 있는데, 문득 한쪽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아(晴兒), 왜 여기 혼자 있는 것이냐? 묘림은 어디 가고?”
묘림이라는 두 글자에 양준의 귀가 번쩍 뜨였다.
강씨 부인은 묘화성의 아들 이름이 묘림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씨 집안이 봉변을 당한 데는 이 자가 뒤에서 꼬드긴 원인도 있었다.
‘동일인인가?’
양준은 그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하던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말하는 이들 쪽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고개를 들어 살펴보았다.
저쪽 뱃전에는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이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여인은 담청색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여인은 거만한 표정으로, 눈빛에는 도도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중년은 바로 운하종의 장로 유수평이었다.
‘딸 유오청(兪傲晴)인가 보군.’
양준은 유오청의 이름을 요즘 들어 여러 번 들었다. 많은 운하종의 젊은 제자들이 사적으로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능소각의 소안처럼, 유오청은 운하종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연모하고 경탄하는 대상이었다.
유수평의 물음에 유오청은 짜증과 혐오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자식이 자꾸 옆에 들러붙으려고 해요.”
“허허,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유수평이 웃으며 물었다.
“몰라서 물으세요?”
유오청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네가 조금만 참아라. 이번 일은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 묘화성이 지도를 바치긴 했지만, 그동안 연구하면서 얻은 깨달음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모두 묘림에게만 말해 주었지. 은도를 찾으려면 묘림이 꼭 필요해.”
유수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유오청은 예쁜 얼굴을 찌푸리며 유수평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버지도 그 자식이 어떤 꼬락서니인지 아시잖아요. 아침에도 저한테 집적거렸다고요. 아버지께서 신신당부만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바다에 던져 버렸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유수평의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그 자식이 너한테 집적거렸다고?”
“네!”
유오청은 몹시 억울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묘림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묘림을 다독여야 했다. 이는 항상 도도하고 눈이 정수리에 붙어 있는 유오청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고통이었다.
“힘들게 되었구나.”
유수평의 얼굴빛도 좋지 않았다. 유오청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의 귀한 딸이었다. 그 역시 딸이 뛰어난 이에게 시집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묘림은 인맥도, 자질도, 실력도 없었다. 이전 같으면 딸애의 시중을 들 자격도 없는 놈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묘림의 입에서 정보를 얻어 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딸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은도를 찾은 뒤에 아버지가 꼭 네 억울함을 풀어 줄게. “
유수평이 딸을 위로했다.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유오청은 이를 갈며 말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그 자식을 당장 바다에 던져 버릴 거예요.”
“네 기분대로 하거라!”
유수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빙그레 웃었다. 마치 그녀가 말한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 것 같은 반응이었다.
해성의 묘화성은 아마 일이 이렇게 발전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항해도를 바친 것은 아들의 앞날을 위해, 운하종에서 묘림을 중시해 주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운하종 장로도 묘화성의 요구에 의해 묘림을 중점적으로 키우려 했다. 다만 묘림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우쭐해져서 유오청에게 덤벼든 것으로, 이는 불장난으로 제 명을 재촉한 셈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수평이 불쑥 말했다.
“그 녀석이 쫓아왔군. 정 싫으면 자리를 피하거라. 절대 짜증을 내서는 안 된다.”
“알겠어요.”
유오청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유수평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잠시 뒤 스무 살 남짓한 젊은이가 갑판에 나타났다. 그는 기대에 찬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뱃전에 있는 유오청을 발견하고는 기쁨에 겨워 황급히 달려갔다.
‘이 자가 묘림이군.’
양준은 그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고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강씨 아가씨는 이 자에게 괴롭힘 당하다 참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결했다.
묘림은 잘생긴 편이었다. 얼굴색이 누렇고 걸음걸이에 힘이 없는 것 외에는 나름 괜찮았다. 그는 무인이라기보다 주색에 빠진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묘씨 가문은 해성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묘림이 밖에서 주색잡기 하는 것을 충분히 받쳐 줄 만했다.
묘림은 유오청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넘치는 연모의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다정하고도 상냥하게 말했다.
“청 사저, 갑판은 바람이 세.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유오청은 혐오감을 느꼈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바다 공기가 맑아서 고민을 날려 보낼 수 있어.”
유오청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묘림은 마치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 사저의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네. 무슨 일인지 나한테 털어놔 봐. 내가 고민 상담을 해줄게.”
유오청의 고운 얼굴에 은근한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조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양준은 갑판 청소를 하면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한 명은 마음에 없는 말로 무성의하게 응대하고, 다른 한 명은 혼자 흥분해서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양준은 묘림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오청이 여러 번 암시했지만, 묘림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알아들었지만 넉살 좋게 매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둘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묘림이 흥에 겨워 해성에서 묘씨 가문의 위풍을 뽐내고 있을 때였다. 배 밑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배 전체가 흔들렸다.
뱃전에 서 있던 묘림과 유오청은 휘청거리며 하마터면 바다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둘 다 무인이라 반응이 민첩해 황급히 몸을 가누었다.
묘림이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위기일발인 순간에 위세를 과시해 미인의 호감을 사고 싶었거나, 아니면 기회를 틈타 유오청의 몸에 손을 대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몸을 가눈 다음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사저, 조심해.”
소리치는 한편, 손을 뻗어 유오청의 허리를 껴안으려 했다.
유오청은 거만해서 그와 말을 엮는 것조차 역겨워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몸을 맡길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다급한 와중에 몸을 틀어 뻗어 오는 묘림의 손을 피했다.
바로 그때 배가 또 한 번 심하게 흔들렸다.
유오청은 몸을 틀던 중이라 배의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옆으로 휙 날아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날아간 방향은 뜻밖에도 양준이 있는 위치였다.
양준은 더러운 옷을 입고 손에 더러운 빗자루를 든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두 남녀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소식을 염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극적인 상황이 발생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유오청이 당장 그의 몸에 떨어질 판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양준은 미끄러진 척하면서 뒤로 넘어진 채 앞쪽으로 한참을 나아갔다. 그가 넘어지는 동시에, 유오청이 그의 위쪽으로 날아가 갑판 위에 쾅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옆쪽에 있던 오물통이 바로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