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7장. 검은 책의 지시
그녀는 이슬처럼 티 없이 맑고 기질도 한층 더 속세를 벗어난 듯했다. 완전무결한 그녀 앞에서 누구든 저도 모르게 겸손해지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맑고 깨끗한 용모는 경국지색이었고, 눈처럼 흰 피부는 훅 불어도 상처 날 것만 같았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선녀처럼 고결함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이 배어 있었다.
이미 그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양준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양준은 앞으로 다가서더니 망설임없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껴안았다.
소안은 당황해 손으로 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래로 내려가자!”
말이 떨어지자마자 양준은 곤룡골로 훌쩍 뛰어내렸다.
백 장 정도 뛰어내렸을 때 양준의 등 뒤로 양염지익이 활짝 펼쳐졌다. 양준은 스스로 만든 동굴로 멋지게 날아 들어갔다.
소안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채를 띠었다. 그녀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양준 등 뒤의 날개를 훑어보았다.
양준은 동굴 안에 들어가자 날개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보따리를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내던졌다. 다시 소안을 번쩍 안아 들고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돌침대로 걸어갔다.
운우지정을 나눈 뒤에야 둘은 수련을 시작했다. 하루 동안 합환공을 운행시켰다. 양준이든 소안이든 모두 자신의 실력이 향상되었음을 느꼈다. 상승폭은 크지 않았지만, 가장 큰 이득은 체내의 원기가 더 순수해진 것이었다.
합환공은 둘의 원기를 녹이고 제련했다. 수련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둘의 체내 원기는 갈수록 농밀해졌다. 둘은 다시 돌침대에 껴안고 누웠다.
굳이 입으로 그리움을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맞다. 네 예상이 맞았어.”
양준의 품 속에 누워 있던 소안이 입을 열었다.
“어떤 예상이요?”
양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평온을 누리고 있었다.
“몇 달 전에 네가 그랬잖아. 전승동천이 많은 파문을 몰고 올 거라고.”
“외부에서 누가 찾아왔나요?”
양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중도 8대 가문에서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어. 대신 각지의 명문 세가들이 전승동천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고수들을 보내왔지. 이쪽 세 종문 가운데서 전승동천에 들어갔던 제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능소각이든, 혈전방이든, 풍우루든 요 며칠 사이에 적지 않은 제자들이 넘어갔어.”
“능소각에는 어떤 사람들이 왔나요?”
양준은 물으면서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그날 밤 종문에 돌아왔을 때, 적지 않은 신식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능소각을 찾아온 세력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현주(玄州) 동(童)씨 가문, 운주(運州)의 백(白)씨 가문, 천주(泉州)의 자미곡(紫薇谷), 그리고 오매진에 있던 몇몇 세력들이 찾아왔어.”
‘동씨 가문이라?’
양준은 마음이 움찔했다.
“그들이 당신에게 제시한 조건은 뭐에요?”
양준이 물었다. 소안은 세 종문의 젊은 제자 중 최고의 실력자로서 전승동천 내 전승을 얻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들은 당연히 소안을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고, 제시한 조건도 그리 낮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년 안에 나를 신유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돕고, 가문에 있는 단약과 보물을 원하는 만큼 주겠대. 그리고 장로와 동급으로 대접해 주겠다더군!”
“손 한 번 크네요!”
양준이 가볍게 웃었다.
“조건은요?”
“가문에 시집가야 한대.”
“역시…….”
“승낙하지 않을 거야.”
소안이 양준의 가슴을 가볍게 밀쳤다.
“내가 전승을 얻었다고 의심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몰아붙이지는 않더라고. 며칠째 능소각에서 진을 치고 있어.”
“그 세력의 공자들이 다 왔나요?”
양준은 냉소했다. 미인을 얻으려면 당연히 젊은 공자들이 나서서 호감을 사야 했다. 다만 그들은 오산했다. 일단 소안은 진작 그의 연인이 되었고, 피차간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리고 설령 이런 속박이 없다고 해도 소안의 성격으로 승낙할 리 없었다. 빙심결을 수련하면 어떤 감정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조건들에 소안의 마음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래.”
소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난 너뿐이야.”
“걱정 안 해요.”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들더러 실컷 재롱 부려 보라죠. 당신이 감동할 수 있게 말이에요.”
그는 잠시 침묵하고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기분이 잡치네요. 제기랄,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려 하다니!”
소안은 입을 오므리며 미소 지었다. 마음속에서 달콤함이 솟아올랐다.
설령 아무 요구도, 욕심도 없는 그녀라지만 양준이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자 행복감을 느꼈다.
날이 밝자, 소안은 동굴을 떠났다.
양준은 그동안 얻은 물건들을 정돈하려고 동굴을 한 번 둘러보았다. 동굴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달라져 있었다.
양준이 떠날 때, 이곳은 차갑고 어두운 동굴이었다. 지금 동굴은 마치 새로운 보금자리 같았다. 책상과 의자뿐만 아니라 화분도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벽에도 많은 서화가 걸려 있었다. 곳곳에는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돌침대에도 따스한 이부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전에 소안과 있으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하응상과 소안이 함께 꾸몄을 것이다. 아늑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동굴 입구에 이르자 천지 영물인 음양요삼이 의기소침해 있었다. 형상이 한데 구겨져 있는 것이 화난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양준이 돌아왔을 때 영성이 있는 음양요삼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아무 호응도 해 주지 않자 지금까지 낙담하고 있던 것이다.
음양요삼도 잘 가꿔져 있었다. 이곳은 양기가 짙어 소안이 며칠에 한 번씩 내려와 진원을 주입해 주면 되었다.
양준은 허허 웃으면서 쪼그리고 앉아 양액 두 방울을 음양요삼에게 건넸다. 음양요삼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양준은 음양요삼 옆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의념으로 부르자 검은 책이 나타났다.
그는 단계를 돌파할 때마다, 작은 경지든, 큰 경지든 모두 검은 책을 꺼내 살펴보았다. 그 속에서 비밀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횟수가 많아지자 그도 처음처럼 열정적이지 않게 되었다.
검은 책은 이미 그에게 충분히 도움을 주었다. 설령 앞으로 검은 책에서 더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스스로 성장할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마음먹자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나았다. 검은 책이 아무리 좋은 물건을 준다고 해도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이었다. 이번에도 그저 습관적으로 꺼내 보았을 뿐이었다. 꼭 그 속에서 무엇을 얻어 내려는 생각은 없었다.
양준은 검은 책의 다섯 번째 장을 펼쳐 그 속에 원기를 주입했다. 아무 파문도 일지 않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에는 검은 책이 반응을 보였다.
“이건?!”
양준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눈을 크게 뜨고 검은 책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원기를 계속 주입했다.
겹겹의 잔물결이 밖으로 퍼지더니 곧이어 줄기줄기 금빛이 검은 책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금빛은 검은 책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이어졌다. 하나의 복잡한 진법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줄의 큰 글자가 나타났다.
[약왕곡(藥王谷), 만약담(萬藥潭)]
잠시 뒤 글자도, 금빛도 모두 사라졌다.
양준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이전과 크게 달랐다. 검은 책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저 지역 이름을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약왕곡이라고?’
양준은 물론 그곳을 알고 있었다. 이는 아주 특수한 세력이었다. 약왕곡에는 모두 단약 제련에 능통한 연단사들뿐이었다. 약왕곡의 사람들은 실력이나 수단이 특별히 강하지 않았다. 전투력은 심지어 일류 세력보다 못하고, 단지 이류 세력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이러한 세력이 어떤 가문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다. 소문에 의하면 이미 수천 년의 세월을 거쳤다 한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많은 초일류 세력도 역사의 기나긴 흐름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약왕곡은 여전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약왕곡의 지위는 뛰어났다. 중도 8대 가문이라 하더라도 약왕곡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것은 해마다 많은 무인들이 재료를 가지고 약왕곡에 가서 연단사들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었다. 약왕곡은 그 어떤 세력과도 천만 갈래로 연관되어 있었다.
달리 말해 약왕곡과 척을 지는 것은 천하를 적으로 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에 한 대문파의 장문인이 약왕곡에 가서 고수를 청해 단약을 만들려 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거절을 당했고, 화가 난 그는 연단사를 죽여 버렸다.
이는 큰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약왕곡의 호소에 이 대문파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소문이 꼭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이를 통해 약왕곡의 영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 수 있었다.
만약담은 약왕곡의 금지 구역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늘 기적이 나타난다고 전해졌다. 단약 제련에 능통한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약왕곡 창시자의 연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설마 나더러 약왕곡의 만약담에 가서 무엇을 찾으라는 말인가?’
양준은 이렇게 짐작했지만 지금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우선 그는 단약 제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곳에 찾아가도 쫓겨날 것이 뻔했다. 다음으로 그는 먼저 자신의 실력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런 다음 다시 좋은 방법을 강구해 안전하게 약왕곡에 섞여 들어가서 기회를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