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6장. 궁금증을 풀다
두 고수는 재빨리 백운풍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몽무애도 이번에는 저지하지 않았다.
신유 경지 고수는 달랐다. 둘은 거의 순식간에 양준의 앞에 이르렀고, 한 명은 수라검에 지풍을 날리고, 다른 한 명은 백운풍을 잡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챙-
수라검이 궤적을 틀면서 백운풍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양준은 차가운 눈초리로 백씨 가문의 고수들을 바라보고는 그들을 뒤쫓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지키고 있는 한, 백운풍을 죽일 수 없었다.
“공자, 그만하시게. 우리 집 공자가 실력이 못해 패했네.”
수라검을 막은 고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양준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참 동안 주저하다가 비로소 수라검을 거두었다.
전투가 드디어 끝났다. 서로 다른 경지의 싸움은 예상 외로, 실력이 낮은 쪽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여러분, 능소각으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러나 능소각은 당신들 마음대로 건방을 떨어도 되는 곳이 아닙니다.”
장문인의 표정은 차분했고, 말투도 담담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속에 숨어 있는 분노의 감정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씨 가문 사람들은 더더욱 이곳에 남아 있을 체면이 없었다. 고수 중 한 명은 백운풍을 끼고, 다른 한 명은 땅에 떨어진 백수도 조각을 주워들고 공수 인사했다.
“그동안 폐가 많았습니다. 여러분, 양해를 바랍니다. 다음에 백씨 가문에서 직접 찾아와 사죄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두 고수는 백운풍을 데리고 재빨리 떠나갔다.
자미곡에서도 더 머물지 못했다. 그들 또한 능소각이 작은 문파라 낮잡아보았고, 능소각에 와서도 줄곧 도도한 모습을 보이며 곳곳에서 인재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오늘 연이어 절대 고수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낸 데다, 능소각의 이합 경지 1단계 제자는 하마터면 백씨 가문 공자를 죽일 뻔하기까지 했다. 이를 본 자미곡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능소각을 얕보아서는 안 되겠군. 고수가 진을 치고 있고, 평범한 제자의 실력이 이 정도라니… 모두 실력을 감춘 위험한 존재들뿐이야!’
범홍과 자미곡의 두 고수도 연신 사죄를 고하고는 신속하게 자리를 떴다.
동경한과 풍운쌍위도 마찬가지였다. 떠나기 전에 동경한은 양준을 힐끗 보았다. 그 또한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외에도 많은 능소각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 싸움은 너무 요란스러워 다섯 장로뿐만 아니라 인기척을 들은 제자들까지도 모두 달려 나와 구경했다.
소현무는 냉담하게 제자들을 훑어보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요즘 저 세 곳의 세력과 내통한 제자들은 알아서 따라가거라. 이 작은 능소각이 너희들 성에 차겠느냐! 장래를 위해 어서 큰 문파로 가거라.”
이 말에 적지 않은 이들이 안색이 어두워지며 괴로워했다.
그들은 모두 이미 세 곳의 세력에 영입된 제자들이었다. 이들 세 곳의 세력에 의탁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능소각이 이렇게 위세가 드높을 줄 몰랐다. 장문인과 몽 주인이 나타난 뒤, 신유 경지 고수들이 토끼처럼 고분고분해지는 걸 그들도 눈앞에서 목격하였다.
지금 이 순간 그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회한뿐이었다. 그러나 이 장로가 말한 이상, 뻔뻔스럽게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양준은 온몸의 기운을 거두고 담담한 눈빛으로 능소각 장문인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의아함과 함께 안도감도 섞여 있었다.
몽무애는 허허 웃고는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각자 갈 길 가거라.”
장문인이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양준을 보더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따라오거라.”
다섯 장로들은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뜻밖에도 이번 접전으로 양준은 장문인의 눈에 들게 되었다. 지금 그를 부르는 것을 보면 당연히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도 풀어야 할 의혹들이 가득했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장문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능소각의 많은 제자들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전에 보이던 경멸과 무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놀라움과 공포뿐이었다.
*두 사람은 여러 건물을 지나 깊고 조용한 곳에 들어섰다.
이곳은 장문인이 폐관 수련을 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다섯 장로들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저택에는 소박하고 허름한 초가집 몇 채가 있었다. 정원에는 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화초가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평범하고 아늑할 뿐 화려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문인은 양준을 데리고 한 초가에 들어가더니 옷 한 벌과 단약 한 병을 내주었다.
“우선 치료부터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날 찾아오거라.”
장문인은 말을 마치고 재빨리 떠나갔다.
비록 물어볼 게 많았지만, 양준은 급히 묻지 않고 초가에 들어가 단약을 꺼내 먹었다.
오늘의 싸움은 양준에게도 힘든 싸움이었다. 진원 경지 고수는 확실히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접전 가운데 자신이 계속 열세에 처해 있었다. 만약 성흔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양준은 패했을 것이다. 백씨 가문의 천라강은 위력이 대단했다. 성흔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오늘 싸움은 양준이 일부러 이끌어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중 비록 질투심도 작용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니었다. 양준은 자신이 짐작하던 많은 추측들을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날 능소각에 보냈지? 아버지는 이곳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버지도 혹시 이곳에서 수련했었나?’
양준은 많은 것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짐작할 수 없다면 큰 소동을 일으켜야 했다.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면 누군가 뒤치다꺼리를 해줄 것이다. 바로 이 뒤치다꺼리를 하는 이가 결정적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양준은 그 사람이 능소각 장문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튿날 양준은 단정히 차려입고 초가를 나섰다.
장문인은 뜰 안 매화나무 밑에 서 있었다.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한 손으로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그윽한 눈빛으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준은 그의 뒤에 다가가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는 꽃봉오리 몇 개가 맺혀 있었다. 그것들은 찬바람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노인과 소년은 하루 밤낮을 서 있었다. 꽃봉오리가 완전히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문인은 뒤돌아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상처는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장문인과 십일 장로 중에서 어떤 호칭을 써야 할까요?”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눈앞의 이는 능소각의 장문인 능태허(凌太虛)로 양준이 곤룡골에서 만났던 십일 장로이기도 했다. 당시 양준은 능소각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후에 소무영 일행들에게 능소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십일 장로의 진짜 신분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능소각에는 십일 장로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능소각의 제11대 장문인이었다. 뛰어난 지략과 놀라운 재능을 지녔지만, 두 제자 때문에 십수 년간 고통에 빠져 있는 바로 그 장문인이었다.
두 제자가 참담한 결말을 맞지 않았다면, 능태허는 절대 지금의 실력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는 한, 그는 절대 신유 경지를 돌파하지 못할 것이며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없었다.
능태허는 빙그레 웃었다.
“편한 대로 하거라.”
양준이 입을 열려 했으나 능태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궁금한 게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 장문인께서 알려주십시오.”
양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능태허가 그의 의문을 짐작한 이상, 굳이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능태허의 얼굴에는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한참 뒤에야 천천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일생 동안 두 명의 제자를 거두었다. 대제자는 천성이 온순하고 선량했으며, 둘째 제자는 영특했지. 이변이 없었다면 둘은 우리 능소각의 기둥이 되어 문파를 빛낼 수 있었다. 그런데 둘째 제자의 승부욕이 너무 강했어. 그는 나중에 사도에 빠져서 대제자에게 살심을 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양준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에 소무영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문인은 당사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니 분명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
“소문에는 대제자가 살해당하고 둘째 제자가 곤룡골에 갇혀 있다고 하지?”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태허는 가볍게 웃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구나. 둘째 제자가 곤룡골에 갇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제자는 죽지 않았다.”
능태허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제자의 이름은 양응봉(楊應峰)이다.”
양준은 경악을 금치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여러 해 동안 그를 괴롭히던 궁금증이 한순간에 풀렸다.
양응봉은 양씨 가문 서열 4위로 바로 양준의 친아버지였다.
‘정말 뜻밖이군. 아버지께서 능소각에서 수련했었다니. 게다가 능태허의 대제자, 소문에서 둘째 제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던 재수 없는 대제자라고. 어쩐지 아버지께서 고질병에 시달려 실력이 늘지 않는다 했더니, 사도에 빠진 둘째 제자에게 중상을 입어서였겠군. 나를 능소각에 보낸 것도 원래는 이런 관계 때문이었구나.’
“서열을 따지자면 넌 나를 사공(師公)이라고 불러야 한다. 사부라고 불러도 돼.”
능태허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양준은 마지못해 예를 올렸다.
능태허는 양준의 표정을 훤히 보면서도 화내지 않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너의 정체를 알고도 삼 년 동안 예비 제자로 고생시켜서 섭섭하냐?”
“조금요.”
양준이 부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능소각에 온 첫 삼 년 동안 그는 온갖 세파와 야박한 세상 인심을 다 겪었다. 그러나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본인 실력이 따라가지 못해 고생했을 뿐인데 어찌 남을 탓하겠는가?
“나를 탓하지 마라. 탓을 하려거든, 네 아버지를 탓해라. 나도 화가 채 안 풀렸거든.”
능태허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양준은 이 말에 그만 목이 움츠러들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능태허의 말속에 뼈가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