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7장. 살인할 수 있느냐?
양씨 가문 자제는 뻐꾸기가 낳은 알처럼 은혜를 몰랐다.
양응봉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능태허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십 년간 가르쳤더니 결국은 남 좋은 일만 하게 되었다. 둘째 제자가 사도에 빠지지 않았다면, 능태허는 그래도 기대할 곳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무던하고 성실한 대제자는 배은망덕한 양씨 가문 사람이었고, 둘째 제자는 주화입마에 빠졌다. 장문인이 반평생 들인 공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더욱이 이 때문에 마음의 응어리가 생기고 자신의 경지를 돌파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양응봉은 능태허의 마음에 응어리가 생긴 것에 많은 책임을 져야 했다.
‘아버지가 갚지 못한 은혜를 나라도 갚아야 하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양준은 곧 웃는 낯으로 말했다.
“사부님, 화 푸시고 저희 아버지 같은 못난 제자는 잊으십시오.”
능태허는 원래 뚱한 얼굴이었으나 양준이 안면을 싹 바꾸자 참지 못하고 웃었다.
“무뚝뚝한 양응봉에게서 너 같은 능구렁이가 태어나다니…….”
“사내대장부라면 굽힐 줄도, 펼 줄도 알아야죠.”
양준은 능태허의 표정을 보고 방금 전에 한 말도 농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능태허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말했다.
“네 아버지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사실 입문한 지 삼 년 만에 이미 자신의 신분을 내게 말했단다. 그래서 그가 떠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어. 그러니 마음에 두지 말거라.”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친 김에 아첨을 더했다.
“사부님은 참 도량이 크십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뵈면 꼭 대신 혼내 드리겠습니다.”
능태허는 입꼬리를 실룩였다. 웃으려다가 참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사실 네가 능소각에 도착하는 날, 네 아버지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내가 너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은 네 아버지 뜻이었다. 네 아버지는 네가 수련에 재능이 없다면서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십 년 정도 키워 달라고 하더구나.”
능태허가 해명했다.
“넌 네가 왜 수련에 재능이 없었는지 아느냐?”
능태허가 물었다.
“아버지께서 선천적인 문제라고 했습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네 아버지는 중상을 입은 뒤로 완치하지 못했지. 그래서 너도 선천적으로 무공 재능이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고질병은 치료할 수가 없지. 그래도 지금은 네가 수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질도 뛰어나고, 수련 속도도 빠른 거 같구나. 그 가운데 어떤 기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네 부모님 말고는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말거라.”
양준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처음으로 능태허와 이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지만, 그의 배려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네가 단지 일반인이면 나도 널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니까. 비록 고생하고 괴롭힘을 당한다 해도 살아 있지 않으냐. 그러나 네가 자질도, 실력도 있으니 내가 상관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되겠구나. 일전에 그리 일을 크게 벌인 것도 결국 나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더냐?”
양준은 계면쩍게 웃었다.
“사부님일 줄은 몰랐습니다. 다섯 장로 중 누군가 제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능태허가 허허 웃었다.
“네가 생각지도 못할 수 있지. 네 아버지가 너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첫째로, 네 안전을 보살피기 위해서고, 둘째로, 아마 너더러 내 응어리를 풀어주라는 거였을 거다. 네 아버지는 심성이 너무 착해, 내 마음속 응어리가 본인 때문이라고 여기는구나. 사실 난 네 아버지를 탓한 적이 없단다.”
양준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탄식만 할 뿐이었다.
“자, 이제 더 궁금한 것은 없느냐?”
능태허는 웃으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네.”
양준은 살짝 민망했다. 그동안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 능태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든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구나.”
능태허가 정색하며 말했다.
“사부님, 제게 물어볼 것이 있으십니까?”
양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의 기운 말이다. 그날 싸움을 옆에서 지켜보니 네 기운이 핏빛을 띠고 포악하더구나. 당시 둘째 제자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혹 사공을 수련했느냐?”
능태허의 얼굴빛은 자못 엄숙했다.
“아닙니다!”
양준은 과감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역시 불굴지오를 펼치면 뿜어 나오는 기이한 기운을 알고 있었다. 양준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불굴지오를 펼쳐 보였다.
원기가 들끓으며 양준의 실력은 이합 경지 1단계에서 이합 경지 절정으로 수직 상승했다. 원기가 요동치며 사기가 온몸에 넘쳐났다.
능태허는 깊은 눈동자로 양준의 눈을 지켜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듯했다.
“검도 꺼내 보거라!”
능태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색 장검이 순식간에 양준의 손에 나타났다. 수라검을 손에 잡는 순간, 살기가 더욱 강해졌다.
수라문의 진문 비보는 양준의 원기와 친근감이 있어 서로 호응하는 듯했다. 수라검을 쥐고 있을 때와 쥐지 않았을 때, 양준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능태허는 양준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면서 그의 신체 변화와 감정 기복을 세심하게 감지했다. 얼굴빛은 무겁고 경계하던 기색에서 점차 느긋하게, 곧이어 경악스러움으로 이어지며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한참 뒤에야 능태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수라검을 거두어들이고 불굴지오도 멈춰 평소 상태로 회복했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구나. 정신은 또렷한 게냐?”
능태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네.”
“이상하군. 피의 기운이 이 정도로 강하면 나라도 필히 마에 끌려,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졌을 텐데, 넌 어찌 영향을 받지 않은 거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능태허의 눈앞이 번쩍 뜨였다.
“맞다. 네가 양성 결법을 수련했지. 양기가 바로 사악한 기운의 천적이다. 양성 원기로 몸을 보호하니 마에 흔들리지 않았던 거군.”
말을 마치고 능태허는 다시 놀랐다.
‘양기와 마는 서로 모순되고 상충하는데, 어찌 저 녀석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
능태허는 한참이나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양준에게 두 가지 기운을 조화시킬 수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양준을 바라보았다.
“네가 전날 한바탕 난리를 친 데다 현급 무공의 소식을 흘렸으니 앞으로 골칫거리가 많아질 거다.”
“그럼… 한동안 피해서 나가 있겠습니다.”
양준은 진작에 계획이 있었다.
능태허는 피식 웃었다.
“어디로 피할 거냐? 당분간은 나다니지 말고 그냥 종문에 있거라.”
“네.”
*양준이 자리를 떠나자 능태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양준의 포악한 기운은 그에게 아무 영향도 없지만, 능태허는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능태허는 한참을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저 녀석은 살인으로 무도를 깨우쳐야 하나?”
그를 불안하게 하는 피의 기운은 이미 양준의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앞으로 양준이 무도의 참뜻을 깨우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피의 기운을 온전히 없애고 평온한 공법으로 바꿔 수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준은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어렵게 오늘과 같은 성과를 이루었는데, 만일 공법을 바꿔 평범한 자질로 전락한다면 그가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영원히 최하층에 있으면서 높은 곳을 몰랐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높이 섰던 이가 한순간 최하층으로 떨어진다면 누구든 버텨 내기 힘들 것이다.
공법을 바꿔서 수련할 수 없다면 피의 기운을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 피의 기운도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그래야만 무도의 현묘함을 엿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길은 앞길이 순탄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혼백이 모두 소멸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인으로 무도를 깨우친 이들 중에 좋은 결말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살인으로 무도를 깨우친 이에게는 영원히 친구보다 적이 많을 것이다. 또한 살육하는 가운데, 본성을 잃고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버틸 수 있을까?’
*장문인과 헤어진 뒤 양준은 자신의 동굴로 돌아가 하응상이 만들어 준 단약을 복용하며 실력을 키웠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향로도 다시 꺼냈다. 그 속에 특이한 향을 피워 진양결의 운행 속도를 억눌렀다.
열흘 남짓 양준은 줄곧 동굴 안에서 폐관했다. 첫째로 단약을 복용하고, 둘째로 흡수한 지 얼마 안 되는 두 가지 비보를 수련했다. 수라검은 백운풍과의 접전에서 큰 작용을 했다. 천예혈해당은 아직 사용하지 않았지만, 똑같이 해외 최고 종문의 대표 비보인 만큼 수라검의 위력 못지않을 것이다.
매일 새벽녘이면 양준은 금신 육체편을 수련했다. 지금은 실력이 늘고 체질도 강해진 탓에 수련 속도도 많이 빨라졌다. 이미 거의 삼분의 일 정도 진척되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수련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매번 초식을 펼칠 때마다 온몸의 뼈들이 따닥따닥 소리를 냈다.
동굴 안은 조용해 폐관하기 좋았다. 하응상은 수시로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와 양준과 함께 나누며, 틈이 나면 둘이서 대화도 나누었다.
하응상은 가끔 돌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곤 했다. 그때마다 양준이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깨지 않았다.
이날 양준이 한창 수련하고 있는데 귓가에 장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살인을 할 수 있겠느냐?”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양준은 반사적으로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능태허의 목소리임을 알아챈 다음에야 괜히 놀랐음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
양준은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능태허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신식 하나가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능태허가 다시 물었다.
양준은 그제야 대답했다.
“네!”
“어떤 이를 죽여야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