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193화 (193/853)

제 193장. 연잎을 타고

“이 녀석이 괜찮다고 하니 편한 대로 하시오.”

능태허가 탁온에게 말했다.

탁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는 얼굴로 공수 인사했다.

“능 형, 감사합니다.”

능태허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 두 사람도 탁 형에게 고마워해야 하오.”

사실 능태허와 양준의 입장에서도 영월문의 세 사람이 지금 합류해 들어오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들은 고작 두 명이서 한 자리를 차지한 터라, 세력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언젠가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빼앗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탁온이 합류하면 얘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에서 바로 다섯 명으로 늘어나게 되고, 두 고수가 지키다 보니 누군가 이 자리를 노린다 해도 선뜻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탁온은 말뜻을 알아듣고 마음이 편해져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두 제자들을 불러 가부좌를 틀고 앉게 했다.

능태허와 탁온은 비록 처음 만났지만, 두 사람 모두 능구렁인지라 말 몇 마디에 금방 친숙해졌다. 능태허가 편의를 봐주었으니 탁온도 보답하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외지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능태허에게 알려 주었다.

능태허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이곳에 와 본 것은 무려 오십 년 전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외지가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정보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탁온도 아는 것이라면 모조리 말해 주었다.

양준은 옆에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양준은 이곳이 유명산에 들어온 몇몇 무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이곳을 아는 사람도 점점 늘어났으나,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비밀로 여기고 외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한의 문파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호숫가에 모인 세력들은 전체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만약 천하가 다 아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곳은 십 년마다 피바람이 불 것이다.

“계속 비밀이 유지되었다면 다들 자리를 두고 싸울 일은 없었겠죠. 하지만 삼십 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점차 많은 세력들이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요.”

탁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오?”

능태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 외지에 들어와 수련하는 제자들 중에서 누군가 아주 좋은 물건을 얻었다고 합니다.”

탁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겁게 말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이곳에서 유염액(琉炎液) 몇 방울을 얻었다고 합니다.”

능태허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것은 진원을 수련하는 무상지보(無上至寶)잖소?”

탁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유염액 세 글자가 나오자 진학서와 서소어 두 사람의 호흡은 미묘하게 가빠졌다. 그들은 이것이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양준은 표정이 무덤덤한 것이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탁온은 양준의 표정을 보고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아이는 세상 물정을 모르나 보군. 그게 아니면 어떻게 저리 반응이 없겠어?’

양준은 비록 유염액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능태허의 말에서 충분히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구음응원로가 있으니 굳이 유염액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탁온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그저 유염액이라면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는 아니죠. 하지만 하필 그때 유염액뿐만 아니라 세혼로(洗魂露)를 가지고 나온 사람도 있었어요!”

능태허는 다시 안색이 바뀌었다.

양준은 드디어 호기심이 동했다.

“세혼로는 무엇인가요?”

탁온은 미소를 지으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유염액은 진원을 수련하는 무인에게 도움을 준다네. 진원이 더욱 순수해지게 하는 작용이 있지. 그리고 세혼로는 식해를 열어 주고, 신식을 수련하는 데 도움을 준다네. 진원 경지에서 신유 경지로 돌파할 때, 세혼로 한 방울이 있다면 식해를 열 때 전혀 막힘이 없고 쉬워지지. 또 신유 경지 이상의 무인이 세혼로를 복용하면 한 방울로도 식해를 확장시킬 수 있고, 신식은 단단해져 몇 년간 수련한 것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네.”

양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능태허가 말했다.

“그렇군. 어쩐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다 했더니. 심지어 이번에는 이합 경지의 젊은이들도 많이 참가하는군.”

오십 년 전에는 이합 경지의 무인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처음에 능태허는 세상이 바뀌어 지금의 젊은이들이 간이 커진 줄 알았다.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합 경지의 무인들은 두 가지 임무밖에 없었다. 하나는 경지를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기를 진원으로 전환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유염액은 이합 경지의 무인들에게 큰 유혹이었다.

그와 동시에 진원 경지의 무인들도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하나는 경지를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해를 열고 신식을 수련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유염액이든 세혼로든 그들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양준도 지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유염액인지 뭔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세혼로는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전에 지마가 오색 온신련은 신혼을 키워 주는 천재지보를 흡수해야만 칠색에 다다른다고 했었다. 이 세혼로가 그중 하나였고, 효과가 아주 좋은 축에 속했다. 만약 세혼로를 얻어서 복용한다면, 온신련과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얘기를 마친 두 노인은 사담을 하러 떠났다. 세 명의 젊은 제자들은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학서와 서소어는 양준보다 나았다. 두 사람은 같은 종문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연인 같아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서로 몰래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양준의 어색함을 눈치챈 듯 진학서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공수 인사했다.

“사제는 성이 어떻게 되나?”

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양씨야!”

“양씨…….”

진학서는 깜짝 놀랐다. 중도 양씨 가문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곧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양 사제는 이곳에 대해 잘 모르나 봐.”

진학서는 친해지려고 하다 보니 먼저 화제를 찾았다.

“응, 얼떨결에 끌려왔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소어가 놀라며 말했다.

“네 사부님이 바로 옆에 계셔. 혼날라.”

진학서도 웃으며 말했다.

“양 사제가 괜찮다면 모르는 것은 나에게 물어봐.”

이 말을 들은 양준은 물어볼 것이 떠올랐다.

“여기 모인 세력들은 왜 다들 몇십 장씩 사이를 두고 앉아 있는 거야? 자리를 선정하는 특별한 규칙이라도 있어?”

진학서가 대답했다.

“그건 내가 좀 알고 있지.”

말을 마친 그는 호숫가로 걸어가 양준에게 손짓을 하며 아래를 가리켰다.

“양 사제, 여기를 봐.”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호숫가에 떠 있는 새파란 연잎이 보였다. 다만 이 연잎은 보통 연잎과 달랐다. 손바닥만 한 것이 새파랗고 줄기가 선명했다.

“저들이 다투는 자리는 저 연잎의 자리야.”

양준이 고개를 들고 관찰하니, 정말 그러했다. 그 세력들의 앞에 모두 연잎이 하나씩 있었다.

“양 사제는 이 연잎을 우습게 여기면 안 돼. 연잎은 우리를 태우고 외지로 가는 배야.”

진학서가 말했다.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려면 연잎을 타야 해. 이 연잎이 없다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호수를 건널 수 없어.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이 호수를 지날 때는 하늘을 날 수가 없어. 또한 연잎은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를 태우지 않아. 그곳에 수련하러 들어가는 무인들은 진원 경지까지만이야.”

양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진학서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냈다. 서소어는 가끔씩 끼어들었는데 그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밤의 장막이 드리워지자 탁온이 갑자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제 시작이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숫가의 모여 있던 무인들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호수 밑에서 빛이 솟구치더니 호수 전체에 기이한 빛이 드리웠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곧이어 기괴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신유 경지의 고수들도 이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큰 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어두운 안색으로 공법을 운행해 기운이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호숫가의 연잎들은 스르르 회전하더니 순식간에 커져서 크기가 일 장만큼 되어서야 멈추었다. 연잎들이 멈추어 서자, 능태허와 탁온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올라가거라!”

양준과 영월문의 두 제자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연잎 위에 올라갔다.

전에 탁온이 말한 것처럼 호수를 지나는 연잎은 네 사람밖에 태우지 못했다. 세 사람이 위에 오르자 자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탁온은 무거운 얼굴로 진학서와 서소어에게 당부했다.

“조심하거라. 괜한 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능태허도 똑같이 양준에게 당부했다.

“너를 건드리는 사람은 봐주지 말고 죽이거라. 하지만 먼저 시비를 걸지는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네 동굴 안에 있는 보물들은 내가 잘 보관하고 있으마. 그리고 소안도 내가 잘 보살펴 주마.”

양준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소안과의 관계가 능태허에게 들킬 줄 몰랐던 것이다.

연잎 위에서 서소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준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고 웃었다.

몇 분이 지나자 발밑의 연잎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를 가르는 큰 배처럼 세 사람을 태운 채, 평온하게 호수 중심으로 나아갔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사방이 모두 연잎이었고, 그 위에는 모두 사람들이 가득했다. 많은 무인들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을 훑어보았다.

양준은 천랑국에서 온 무인들이 맹수처럼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귀왕곡의 세 사람도 보였는데, 금호는 또 한 번 양준을 향해 목을 긋는 동작을 해 보였다.

이때, 호수에 갑자기 큰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연잎을 탄 모든 사람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순간 비명소리가 들렸으나 금방 사라졌다. 주변의 경치가 변화하면서 양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낯선 환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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