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6장. 적들에게 둘러싸이다
이곳에는 절대적인 안전이란 없었다. 양준은 최대한 몸을 숨기며 기운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행적이 드러날까 두려워 흔적을 감추며 다녔다.
한 고목 뒤의 구멍에 숨은 양준은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한편으로는 혈주의 기운을 연화하고 흡수하였다.
이 며칠 사이에 얻은 혈주는 스무 알이 채 되지 않았는데, 절반 이상은 3급 요수가 죽은 뒤 응고된 것이었다. 4급 요수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방금 전에 죽인 금광전의 세 무인의 혈주였다.
크기로 보면 손쉽게 혈주의 등급을 나눌 수 있었다. 4급 요수의 혈주는 완두콩만 했고, 3급 요수의 것은 그것보다 절반 정도 작았다. 이합 경지의 무인이 죽은 뒤 남긴 혈주는 엄지 손톱만 했다.
양준은 3급 요수의 혈주를 꺼내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묵묵히 진양결을 운행했다. 원기가 움직이자 양준은 손바닥에서 순수한 기운이 경맥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전 안에 머무르지도 않고 바로 금신에게 흡수되었다. 진양결은 일주천을 운행하지도 못했는데 혈주는 감쪽같이 사라져 그의 기운으로 전환되었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비록 전에 능태허에게서 들어 이곳에서 획득한 혈주는 손쉽게 연화하여 흡수할 수 있으며, 후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쉬울 줄은 몰랐다. 혈주의 기운은 이슬처럼 맑고 순수하여 연화할 필요도 없이 흡수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능태허가 전에 이곳의 혈주를 그토록 숭배한 것이었다. 만약 한 사람에게 대량의 혈주가 있다면 그의 실력은 분명 단번에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큰 경지에 오를 때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작은 경지를 돌파할 때는 전혀 막힘이 없었다.
혈주의 기운을 흡수해 본 무인들은 모두 이런 유혹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강해지기 위해, 진급하기 위해, 그들은 그 어떤 살아 있는 것들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든, 요수든 강자의 눈에는 그저 한 알의 혈주에 불과했다.
이렇게 마음껏 기운을 흡수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하늘 아래 이곳을 제외하고, 혈주를 배출하는 곳은 없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양준은 마음을 가다듬고 모든 혈주를 꺼내 손에 잡았다. 그리고 진양결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방대하고 순수한 기운이 손바닥에서 퍼지며 순식간에 경맥을 팽창하게 만들었다. 이 기운은 끊임없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 뒤, 곧바로 금신에게 흡수되었다. 그 속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손바닥 안의 혈주는 한 알, 또 한 알 줄어들더니 빠르게 양준의 실력으로 전환되었다.
양준은 자신의 몸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합 경지 3단계를 곧 뛰어넘을 것 같았다.
손바닥의 혈주가 마지막 두 알 남았을 때, 양준은 갑자기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 확산되는 것을 느꼈다. 천지 간의 기운도 갑자기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졌다.
아무런 막힘없이 그는 이합 경지 4단계로 진급했다. 하지만 양준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손에 있는 혈주의 기운을 흡수했다.
잠시 뒤, 혈주 두 개가 사라지고, 금방 진급한 경지도 신속하게 안정되었다.
양준은 다급히 일어서더니 몸을 숨기던 곳에서 재빨리 떠났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진급할 때 기척이 그렇게 클 것이라고는 양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방금 전에 누군가 근처에 있었다면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에게 위치를 발각 당할 가능성이 컸다.
양준은 연이어 십몇 리를 달려갔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자꾸 누군가에게 포착된 기분이 들었으나, 경계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옅은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기분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양준은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의 실력이 그가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높다고 예상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바로 뒤에 있거나 일시적으로 자신을 쫓아오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컸다. 만약 진짜로 그를 노리고 있는 것이 고수라면,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도 없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양준은 이곳에서 영원히 경지를 돌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이합 경지 3단계의 실력으로 이곳을 돌아다니게 되면, 당분간은 무사할지도 모르겠지만, 진정한 고수를 만난다면 분명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진급할 때마다 기척이 전해질 것은 뻔했지만,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십 리를 넘게 뛰어간 양준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의 등골에는 오싹한 기운이 전해졌다.
앞으로 달리던 양준은 갑자기 얼굴을 굳힌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앞에 있는 나무 뒤에서 원기 파동을 느꼈다. 상대방은 숨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는 대놓고 그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앞에 와 있다니.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이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왔을 리 없었다. 양준은 그가 어느 종문의 제자인지 알지 못했고, 상대방의 실력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으므로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흐흐흐…….”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를 본 양준은 피를 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는 귀왕곡의 제자였다.
귀왕곡에서는 이번에 세 명의 제자들이 왔는데, 하나같이 진원 경지의 고수였다. 그 중에서 금호라고 하는 녀석은 자꾸 양준에게 위세를 부리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다른 한 사람은 여인이었고, 눈앞에 이 사람은 귀왕곡의 세 번째 제자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 마주친 게 이들이라니…….’
다른 사람이라면 얘기해 볼 만했지만, 귀왕곡의 사람이니 화해할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귀려는 전에 그들 세 사람에게 반드시 양준을 죽이라고 당부까지 했었다.
양준도 당연히 그들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지금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는 들어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경지도 한 단계밖에 돌파하지 못했는데 이런 적수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상대방은 홀로 충분히 그를 이길 수 있는데, 세 사람이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위험해!’
“하하, 이게 누구야!”
귀왕곡의 제자 우성곤(於成坤)도 깜짝 놀라 했다. 그는 음산한 시선으로 양준을 훑어보면서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능소각 녀석이라니. 애써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제 발로 찾아오는군.”
그는 그가 잡은 사람이 양준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양준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움직여 옆에서 번쩍, 하고 나타났다. 이렇게 신법을 펼치며 이곳을 도망칠 계획이었다.
스스로 만든 보법은 도망치기 좋은 선택지였다. 한걸음에 열다섯 걸음을 걸을 수 있고, 몇백 장이나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속도가 아주 빨라 동급 경지의 무인은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양준이 몸을 두 번 움직였는데 옆에서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새하얀 손이 그의 머리를 덮쳤다.
“하하하… 능소각 녀석, 우리 참 인연이 있네!”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금호의 모습이 보였다. 혈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손에는 음산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양준은 어두운 안색으로 염양삼첩폭을 날렸다.
주먹과 손이 마주치자 금호는 코웃음을 치며 진원을 움직였다. 그의 다섯 손가락은 마치 날카로운 칼 같았다.
퍽, 퍽, 퍽!
소리가 세 번 들리더니 양준이 나가떨어졌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끓어오르는 기혈을 힘겹게 참으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착지했다.
금호는 진원 경지 4단계의 실력인 것 같았다. 귀왕곡의 세 제자 중 그의 실력이 가장 강했다. 양준은 이런 등급의 적수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마주친다면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양준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뒤에서 음풍(陰風)이 전해졌다. 양준은 급히 피했지만, 등에서 ‘쫘악’ 소리가 들리면서 옷이 찢어졌다.
“반응 속도가 꽤 빠른데?”
금호는 공격하지 않고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양준을 바라보며 조롱했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귀왕곡의 여제자가 나타난 것이 보였다. 방금 전, 뒤에서 그를 공격한 사람은 바로 이 여인이었다.
세 사람은 양준을 둘러쌌다.
이 세 사람은 이합 경지였던 금광전의 제자들과 달랐다. 양준은 금광전의 세 사람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지만, 이 세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네놈을 어떻게 죽여줄까?”
금호는 의기양양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에 유명산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양준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하마터면 금동구렁이의 공격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니 그가 양준을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양준은 자신의 사제, 사매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날개가 달려도 도망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급히 양준의 목숨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때로는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욱 짜릿했다.
우성곤이 웃으며 말했다.
“사형, 저놈 사지를 잘라서 피를 잔뜩 흘리게 해 죽이는 건 어때?”
금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건 너무 약하지. 영혼까지 고문시켜서 우리 귀왕곡의 노예가 되도록 말려 죽이자!”
우성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녀석의 실력은 너무 낮아. 노예가 된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양준을 겁주는 두 사람의 말에 귀왕곡의 여제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냥 죽여. 왜 시간을 낭비해? 죽이면 혈주라도 얻잖아.”
금호와 우성곤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사매가 죽이라면 죽여야지.”
말을 마친 금호는 음산한 얼굴로 양준에게 다가갔다.
“자식, 고통 없이 죽는 것도 복이야. 저승에 가거든 나한테 고마워하는 걸 잊지 마.”
양준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큰소리는 날 죽인 다음에나 하시지!”
말하는 사이, 양준은 몸을 움직여 귀왕곡의 여제자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