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7장. 양준의 위기
계속 지켜본 결과, 귀왕곡의 세 제자들 중 여인의 실력이 가장 낮았다. 다만 예뻐서인지 아니면 이 여인의 신분이 낮지 않아서인지 금호와 우성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그래서 양준은 이 여인이야말로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위기를 모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염지익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진원 경지의 무인들도 날 수는 있지만, 양염지익보다 속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곳은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양염지익으로 공중에 떠 있을 경우, 지나치게 눈에 띄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양준은 양염지익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양준이 발걸음을 움직이자 귀왕곡의 세 제자는 비웃기 시작했다. 금호와 우성곤은 양준이 여제자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지만,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냉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여인의 실력으로 양준의 공격을 막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는 듯했다.
여인도 안색을 바꾸지 않은 채, 몸속으로 진원을 응집시키면서 아름다운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여인과 오 장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준의 체내 원기가 용맹하게 폭발했다.
불굴지오!
진원 경지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도망치려면 양준도 더 이상 실력을 숨길 수 없었다.
양준의 실력이 갑자기 늘어난 것을 느낀 여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가 창백한 손을 움직이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가는 실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뱀처럼 양준의 급소를 공격했다.
이 실은 진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명주실이어서 질기고 단단했는데, 진원을 주입하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비보가 아니라서 이곳에서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몇 가닥의 실에 숨겨진 살기를 감지한 양준은 표정을 굳히며 머리를 굴려 손끝으로 양액 몇 방울을 짜냈다. 양준은 양액을 방패막의 모양으로 만들어 몇 겹이나 겹친 뒤, 앞을 막았다.
이미 실은 양준에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푸슉-
가벼운 소리와 함께 양액으로 만든 방패가 바로 뚫렸다. 하지만 잠깐의 틈을 이용해 양준은 급소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실들은 급소가 아닌 몇 곳을 관통했을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떤 양준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쉬지 않고 주먹을 연속으로 날렸다.
그 여인은 냉소를 지으며 손을 날려 양준과 대항했다. 날카로운 그녀의 손톱은 양준의 손등을 긁어냈다.
양준의 안색은 점차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와 몇 번의 공격을 주고받으며 양준은 이미 그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그대로 보법을 펼치며 신속히 도망쳤다.
“어딜 도망치려고!”
여인은 소리를 지르며 양준을 향해 명주실을 쏜 다음 매섭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양준의 몸은 끌려오지 않았다. 잠시 동안의 지체로 그는 이미 멀리 도망친 뒤였다. 허공에는 피로 물든 명주실 몇 가닥만이 나풀거릴 뿐이었다.
여인의 눈에는 경악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금호와 우성곤의 여유롭던 표정도 놀란 얼굴로 변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금호가 여인의 곁으로 날아오더니 다급히 물었다. 그의 사매가 다루는 명주실은 단단하기 그지없는데, 양준의 몸속까지 뚫고 들어간 실이 그를 속박하지 못한 것이 의문이었다.
“타서 끊어졌어!”
여인은 잘린 명주실을 바라보며 분노했다. 곧이어 그녀가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뭘 보고 있어? 어서 쫓아가야지!”
우성곤은 실눈을 뜨더니 몸을 날려 양준을 쫓으러 뛰어갔다. 금호와 여인도 다급히 따라갔다.
양준은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여인과의 전투에서 적지 않는 대가를 치러 겨우 허점을 찾아 도망쳤던 것이다. 그 세 사람에게 다시 잡힌다면 양염지익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이미 극한으로 보법을 펼치고 있었지만, 등 뒤에서는 여전히 그림자들이 끈질기게 쫓아오고 있었다.
양준에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은 속도가 가장 빠른 귀왕곡의 제자였다. 금호와 여인의 보법은 우성곤보다 빠르지 못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우성곤은 계속해서 반나절 동안 양준을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쫓아갔다. 양준이 속도를 최대한 끌어 올렸지만, 그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에게서 반드시 양준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양준은 점점 화가 솟구쳤다.
이때, 앞쪽에 네다섯 마리의 요수들이 있는 것을 발견한 양준은 모질게 마음을 먹고 그것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몸을 움직여 몇 번 만에 요수 무리를 벗어났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우성곤도 멀쩡한 모습으로 요수의 포위를 뚫고 쫓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날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포기하는 게 좋을걸.”
우성곤은 양준을 쫓아가며 소리쳤다.
“네 속도는 빠르지만 이합 경지의 수준밖에 되지 않아. 몸속의 원기가 얼마나 버틸 것 같아? 순순히 멈춘다면 고통 없이 보내 줄게.”
우성곤도 짜증이 나 있었다. 그의 속도는 진원 경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인데 겨우 이합 경지의 무인을 쫓아가지 못하다니. 그는 속으로 양준의 속도에 감탄하면서도 화가 났다. 그는 양준을 잡고 나서 반드시 괴롭혀 주겠다고 다짐했다.
양준은 그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뛰면서 몰래 원기를 운행하여 상처를 치료했다. 양액이 있으니 원기가 부족할 걱정은 없었다. 양준은 좌우를 둘러보며 승기를 잡을 기회를 노렸다.
양준은 일부러 요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산을 넘고 강을 가르며 가시밭길을 지나면서 시간을 끌었지만, 우성곤과의 거리는 좀처럼 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만약 우성곤 한 사람이라면 도전해 볼 만했지만, 금호와 그 여인까지 쫓아온다면 그에게는 죽음뿐이었다.
무려 하루가 지났다. 양준도 자신이 얼마나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성곤은 마치 다리에 붙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양준은 계속해서 깊은 숲으로만 내달리다가 벼랑 끝에 다다랐다.
‘드디어 도착했어.’
양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려오며 이 벼랑을 발견한 순간, 양준은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전에 이동하며 깊이가 만 장 정도 되는 이곳의 벼랑을 유념해 두었었다. 이 벼랑 아래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몰아 쉰 양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우성곤은 이곳의 지형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곧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젠장, 실력도 없는 게 속도는 더럽게 빠르네. 힘들어서 혼났다고.”
그는 승리가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퇴로가 막히고 뒤는 벼랑이니, 이합 경지밖에 되지 않는 양준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안 도망쳐?”
우성곤은 싸늘하게 양준을 바라보며 그의 앞에서 오 장 정도 거리에 멈춰 섰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양준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하하하!”
우성곤이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긴 아는구나!”
“한 번만 봐줘!”
양준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한테 용서를 구하는 것이냐?”
우성곤은 경멸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건 부탁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지! 무릎 꿇고 내 앞까지 기어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잘못을 빌어봐. 기분이 좋으면 내가 살려줄지도 모르지!”
“난 너희들과 원수를 진 적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날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우성곤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너더러 운이 이렇게 나쁘래? 이런 곳에서 하필이면 우리와 마주치다니.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스스로 경맥을 자르고 내가 선심을 베풀기를 기도해 봐.”
“한 번만 놓아줘. 대신 다른 걸로 보상할게!”
우성곤은 웃음기를 거두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혈주를 얼마나 가지고 있지?”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혈주는 내가 이미 흡수했어. 하지만 나에겐 괜찮은 단약이 몇 병 있어.”
말하면서 양준은 품으로 손을 넣어 건곤대에서 단약 몇 병을 꺼내 우성곤 앞에서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품에 넣었다.
“이건 모두 상처를 치료하는 단약이야. 이곳에서 움직이려면 너도 필요할 거야.”
단약 몇 병을 본 우성곤은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좋아, 좋아. 오늘 수확이 적지 않군. 단약을 이리 내!”
“그럼 날 풀어주는 거야?”
우성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너를 풀어줘야 하지? 널 죽이면 혈주도 얻고, 단약도 얻는데. 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양준은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벼랑으로 뛰어내릴 자세를 취했다.
우성곤의 낯빛이 어두워지며,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화를 자초하다니. 네가 그럴 용기가 있기나 하겠어?”
그는 말을 하는 동시에 양준을 덮쳤다.
하지만 우성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양준이 미소를 짓더니 몸을 날려 진짜 벼랑으로 뛰어내렸던 것이다.
‘진짜로 뛰어내렸다고?’
우성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양준이 이토록 단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합 경지밖에 되지 않는 데다 날 수도 없으니 이렇게 높은 벼랑에서 뛰어내리면 시신도 찾지 못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양준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벼랑으로 뛰어내렸다.
곧이어 우성곤은 크게 분노했다.
‘이 녀석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이득을 보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군! 지독한 자식!’
그는 분한 마음에 양준을 따라 벼랑으로 뛰어내렸다.
‘벼랑이 뭐 대수야. 나는 진원 경지의 무인이라고. 몸속의 원기를 진원으로 바꾸면 날 수도 있단 말이야! 능소각 녀석을 재빨리 죽이고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다시 올라갈 수 있어.’
혈주 한 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다 단약 몇 병까지 더해지자 그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