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03화 (203/853)

제 203장. 천랑국의 무인

양준은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많이 발견했다. 모두 전에 호숫가에서 본 얼굴들이었다.

만화궁의 네 소녀들도 그 중에 있었다. 그들 말고도 문심궁(問心宮), 수월당(水月堂), 구성검파(九星劍派), 열화교(烈火教), 비우각(飛羽閣) 등이 있었다. 각 종문의 제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는데, 총 인원이 서른 명은 되어 보였다. 모두들 세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다만, 현재 그들의 상황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었고, 모두 진원의 소모가 큰 듯했다. 방금 전에 격전을 벌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쉬고 있었고, 오직 한 사람만이 전쟁터를 누비며 죽은 요수들이 남긴 혈주를 줍고 있었다.

이내 시선 하나가 양준을 향해 날아왔다. 그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청년은 건장한 몸집에 비록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긴 했지만, 여전히 주름 없이 반듯하였다. 그의 몸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핏자국이 많았는데, 그 모습이 더욱더 잔혹하고 비범해 보였다. 그는 조용히 그곳에 서서 검집을 벗어난 날카로운 검처럼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양준과 그는 서로 잠깐 마주 보다가 청년이 먼저 시선을 돌리고 방금 전 전쟁터를 누비며 혈주를 주운 사람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집한 혈주를 건네받았다.

이때, 진학서와 서소어가 양준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는 도저히 눈앞의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각 큰 세력의 젊은이들은 원래 서로 적대하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특별한 이유나 변고가 없었다면 적이 되지는 않더라도, 절대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좀 길어.”

진학서는 한숨을 내쉬며 양준더러 앉으라고 했다.

양준은 그가 많이 다쳐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을 보고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단약 몇 알을 쏟은 뒤 그에게 건네주었다.

“요상단!”

서소어는 눈을 반짝였다.

진학서는 다급히 그녀에게 눈치를 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 사제, 어서 숨겨!”

양준은 미간을 더더욱 찌푸렸다. 그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순순히 약병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쏟아낸 단약을 진학서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는 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약 몇 알일 뿐이잖아. 서소어는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

이곳에 수련하러 들어온 젊은 제자들은 필요할 때를 위해 모두 몸에 단약 몇 알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양준의 건곤대 속에도 단약이 열몇 병이나 있었다. 모두 능태허가 미리 준비해 준 것이지만, 양준은 아직 사용한 적이 없었다.

서소어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혀를 홀랑 내밀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진 사형, 저들은 왜 한데 모여 있는 거야?”

양준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그가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래!”

진학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위협이라도 하는 거야?”

양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그건 아니야.”

진학서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모두 스스로 원한 거야. 한데 모이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모두 손을 잡아야 될 정도로 이곳에 변고가 생겼다는 거야?”

양준이 놀라워하며 질문했다.

“응.”

진학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야? 요수야?”

“사람도 있고, 요수도 있어.”

진학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시선을 들고 물었다.

“혹시 전에 호숫가에서 옷차림과 모습이 우리 대한의 무인들과 달랐던 문파 기억나?"

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었는데 양준이 어찌 기억하지 못할 리 있겠는가? 양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랑국의 무인들이잖아.”

진학서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 사제가 그들의 출신을 알고 있었다니! 우리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서야 겨우 그 사람들이 우리 대한의 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어.”

“사부님께서 전에 알려 주셨어.”

진학서는 놀란 얼굴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능 선배님께서 아시는 것이 많구나.”

“천랑국의 무인들과 무슨 상관이야?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겨우 네 사람이잖아. 너희들이 머릿수가 훨씬 많으면서 그들을 두려워하는 거야?”

양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네 명뿐이라면 우리가 무서워할 리 없지!”

진학서는 화를 내다가 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네 명만 있는 게 아니야. 도대체 무슨 괴이한 공법을 수련했는지 그들은 요수를 노예처럼 부릴 수 있어! 그들 네 사람은 한 사람당 수하에 백여 마리의 요수가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

이 말을 들은 양준은 깜짝 놀라 물었다.

“전에 너희들을 둘러싸고 있던 요수들 하고, 방금 전 그 요수 무리도 전부 다 천랑국의 무인들이 데려온 거야?”

“맞아.”

진학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랑국 사람들은 진작 준비를 마쳤던 거야. 그들은 처음 한두 달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면서 우리 대한의 무인들이 요수를 사냥하고 서로 죽고 죽이게 내버려 두었어. 하지만 두 달이 지나고 그들이 많은 요수를 길들이게 되자, 바로 우리 대한의 무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어. 많은 사람들이 미처 방어도 하지 못하고 요수들에게 죽임을 당했어. 천랑국의 무인들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우리 무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어.”

양준은 진학서의 얘기를 듣고, 오래도록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어쩐지 전에 봤던 요수 무리는 종류가 다르다 했어. 별별 요수들이 다 있다 했더니 원래는 길들여진 것이었구나!’

“이 몇 달 동안 천랑국 녀석들이 부리는 요수들은 점점 더 많아졌어. 다 죽이지 못할 정도야. 오히려 우리 대한의 무인들이 점점 줄어들었지. 함께 모여 있는 무인들도 처음에는 오십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열 명이나 넘게 죽었어. 그 외에 따로 다니던 사람들은 아마 모두 죽었을 거야.”

이 말은 현재 외지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중, 천랑국의 네 사람을 제외하면 여기에 있는 서른여 명이 전부라는 소리였다.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족히 이삼백 명이나 되었던 사람들이 반년 사이에 서른 명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십 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꼴이었다. 죽어 버린 사람들도 각 크고 작은 세력들의 인재였으니, 그 손해는 막중할 것이다.

진학서는 말하다가 시뻘개진 얼굴로 한탄하듯이 말했다.

“여기서 겪은 일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이곳에 있는 제자들은 밖에서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거야.”

대한 종문의 젊은 인재들이 한데 모였다가 멀리서 온 천랑국 사람들에게 꼼짝없이 당해 버리다니. 이 일이 소문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형의 잘못도 아니잖아.”

서소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우리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 인간들이 너무 교활해서 그래. 단단히 벼르고 온 게 분명해.”

“휴.”

진학서는 풀이 죽어 말했다.

“난 지금 그저 이곳이 하루 빨리 닫히기를 바랄 뿐이야.”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 있던 양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누구의 명령을 듣는 거야?”

다들 최우수 제자들이라 각자의 세력에서는 기량이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도하고 자부심이 넘쳐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따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통솔 능력이 뛰어난 우두머리가 이끌지 않는다면 분명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다.

진학서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저 사람이야. 구성검파의 무승의(武乘儀). 진원 경지 7단계의 고수지. 이곳에서 수련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실력이 가장 강해. 지금은 모두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어.”

진학서의 시선을 따라 힐끗 쳐다본 양준은 그 사람이 바로 방금 전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청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비범한 느낌이 들더라니, 구성검파의 인재였구나.’

양준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구성검파의 제자들은 주로 검법을 수련했다. 구성검파는 유명한 문파로서 대한에서도 이름을 날렸는데, 세상 사람들은 구성검파를 중도 8대 가문 아래의 제1세력으로 불렀다. 그들은 중도 8대 가문 다음으로 세력이 강한 문파였다. 이로써 구성검파의 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무승의는 실력이 강한 데다가 출신도 비범했다. 이런 인물이 임시로 우두머리를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고는 여기 모인 무인들 중에서 사람들을 이끌 만한 인물이 없었다.

“기질과 분위기를 보니 통솔자의 느낌이 좀 있네. 보아하니 구성검파에서 그를 꽤 신경 써서 키웠나 봐.”

이 말을 들은 서소어는 입을 삐죽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난 저 녀석이 재수 없어. 우리를 부하처럼 부려먹잖아. 그리고 요수를 죽인 뒤 얻은 혈주도 전부 쟤가 나눠 주던데 몇 알을 빼돌렸는지 누가 알아.”

진학서가 서소어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저 자가 앞장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한데 모이지도 못하고 천랑국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야. 저 자의 실력이 가장 강한 데다, 요수도 가장 많이 죽이니까 좋은 것이 있으면 좀 더 가지는 것도 당연한 거야. 게다가 지금 여기 있는 요수들은 대부분이 천랑국 사람들이 부리는 노예라, 우리는 혈주를 별로 모으지도 못한다고. 저 자가 가지고 싶다면 가지라고 해. 난 그저 우리가 무사히 나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야.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아.”

서소어는 뾰로통해서 말했다.

“그것뿐이라면 말도 안 하지. 쟤는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단 말이야. 전에도 우리더러 요수 열몇 마리를 잡고 있으라고 했잖아. 양준이 와서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방금 전의 상황이 떠오르자 서소어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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