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4장. 친근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울긴 왜 울어. 양 사제가 보면 놀릴 거야. 우리 무사하게 돌아왔잖아?”
진학서는 서소어를 위로하면서 한편으론 양준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 요수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것도 저 자의 명령을 따른 거야?”
진학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번갈아 하는 거야. 이번에는 나와 사매가 운이 좋지 않아 요수가 많이 출몰했던 거지.”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양준도 진학서의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만약 무승의에게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무리를 이탈하면 그와 서소어 두 사람의 실력으로 금방 죽을 게 뻔했다.
돌이켜본 양준은 방금 전에 요상단을 꺼냈을 때 서소어가 왜 그토록 기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몇 달 동안 그들은 분명 수많은 전투를 겪었을 것이고, 사람마다 준비했던 단약은 진작에 동이 났을 것이다. 지금 또 약초도 찾기 어려우니, 그가 꺼낸 단약은 이들에게 있어 아주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양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방금 전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만약 그 장면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요상단이 희귀한 물품이 되다니. 이건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진 형, 와서 좀 돕지?”
갑자기 저쪽에서 무승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학서는 양준에게 웃으며 말했다.
“양 사제, 잠깐 기다려 줘. 금방 다녀올게.”
“그래.”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학서가 떠난 뒤 양준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흥미진진하게 훑어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새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른 곳에 흩어진 대한의 무인들은 아마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양준을 보자 당연히 호기심이 동했다. 게다가 양준은 홀로 온 것이었다. 그들은 양준이 어떻게 홀로 천랑국 무인들의 공격을 피했는지 의문이었다.
양준이 시선을 돌리자 만화궁의 네 소녀들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소녀들은 그때 양준과 함께 유명산에 들어왔었다. 비록 말은 섞지 않았지만, 같은 배를 탄 적이 있는 셈이었다. 지금 또 함께 곤경에 처하자 친근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준은 미소로 화답했다.
관찰하는 동안 저쪽에서 갑자기 두 사람이 일어났다. 앞에 선 사람은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청록색 치마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양준에게 걸어왔다. 깊은 눈동자는 그윽하게 양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건장한 남자였다. 몸집이 거대하고 다부진 것이 양준보다 몇 배나 커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반 척 정도 되는 큰 흉터가 좌우로 가로질러 나 있었는데, 살이 뒤집어져 그 모습이 살기등등해 보였다.
여자든 남자든 모두 잔혹한 느낌을 풍겼다.
서소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저 자들이 지금 우리 쪽으로 오는 거야?”
“아마도.”
양준도 눈살을 찌푸렸다.
“양 사제, 아는 사람들이야?”
서소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양준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전에 이 두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능태허가 그에게 수많은 종문의 이름과 문파 내 제자의 실력을 알려 주었지만, 호수가 너무 큰 탓에 호수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까지는 알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양준은 이 두 사람의 출신을 알지 못했다.
“설마… 요상단 때문은 아니겠지?”
서소어의 안색이 변했다.
양준도 낯빛을 흐리며 몰래 경계했다.
“양 사제, 절대 저 자들과 다투지 마. 저 둘의 실력은 아주 강해!”
서소어는 다급히 당부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노력할게.”
양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이들과 싸우게 되면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그가 이 두 사람과 척을 진다면,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이 그를 괴롭히려고 한다면 양준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두 남녀가 걸어오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다들 이 여인이 뭘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잠시 뒤, 여인은 양준 앞에 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 뒤에 선 남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날카롭게 양준을 쏘아보고 있었는데, 마치 양준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듯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훑어보았다. 곧이어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얼굴을 양준의 앞까지 들이밀었다. 이내 작고 어여쁜 코가 씰룩거렸다.
그녀를 보는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이 여인의 몸에서 살기나 나쁜 꿍꿍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하는 행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인은 강아지처럼 양준의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저… 뭐 하는 거죠?”
서소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 지금 그녀는 양준의 바로 옆에 앉아 있어 누구보다도 이 상황이 잘 보였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왔다. 많은 젊은 무인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 뒤에 서 있는 남자 때문에 감히 제멋대로 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에 시시덕거리며 말을 건 적은 있어도 누가 이렇게 이 여인에게 가깝게 다가간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지금 이 여인은 양준의 몸을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더구나 이곳은 곳곳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곳인 데다 방금 전에 격전을 벌여서 다들 피가 뜨거워져 있었다.
“저기…….”
양준은 온몸이 굳었다. 비록 살기를 느끼진 못했지만, 이 여인은 너무나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오자마자 이토록 친근하게 굴다니, 그녀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쉿…….”
여인은 생긋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어 양준의 입술에 댔다. 그녀는 물어보려는 양준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더욱 마음껏 냄새를 맡았다.
“양 사제…….”
서소어는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 급히 양준을 발로 찼다.
“깔깔…….”
여인은 이 장면을 보고 가볍게 웃으며 흥미진진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여쁜 얼굴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넋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양준을 바라보았다.
“어때?”
여인은 갑자기 뒤에 선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살기도 있고, 혈기도 있어!”
남자는 말을 아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응.”
여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입을 막고 웃으며 말했다.
“동생, 많이 놀랐지? 친근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실례 좀 했어.”
“흥!”
서소어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양준도 당연히 믿지 않았다.
여인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소개할게. 난 야청사(夜青絲)라고 해. 이쪽은 내 사제 주패(周霸)야!”
“난 양준이야!”
“양 사제였구나…….”
야청사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성숙하고 색기가 흘렀다.
“우리 둘은 바다 너머에 있는 수라문에서 왔어. 양 사제는 아마 들어 본 적 없을 거야.”
양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얼굴색이 변했다가 이내 재빨리 표정을 감췄다. 그는 이 여인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건지 깨달았다.
수라문!?
두 남녀는 수라문의 최우수 제자들이니 분명 종문의 불전지비(不傳之秘)를 수련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라문의 진종비보 수라검은 지금 그에게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양준에게서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쩐지 그녀가 친근감이 든다고 말하더라니!’
양준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가 자신에게 친근감이 든다고 하지만, 수라문의 비보가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친근감은 곧 살기로 변할 것이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짐짓 처음 듣는 척하며 양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바다 너머라고?”
야청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의 최남단이지. 끝없는 바다 위에도 많은 종파가 있어. 양 사제는 내륙에만 있다 보니 잘 모를 거야.”
“남쪽에서는 너희 종문에서만 온 거야?”
양준은 적당히 관심 있는 척했다. 현재 그의 몸속에는 수라문 외에도 다른 세력의 비보도 있었다.
야청사는 웃으며 말했다.
“쌍자도(雙子島)의 사람도 있어. 하지만 지금 한 명밖에 남지 않았어. 바로 저 사람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바라본 양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낙화신교의 사람은 오지 않았군. 그게 아니면 또 찾아와 나한테서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했겠지.’
“양 사제는 어디 출신이야?”
야청사가 물었다. 그녀는 마음속에 의아함을 풀지 못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유 없이 낯선 사람에게서 친근감이 느껴지다니, 게다가 사저와 사제 두 사람 모두 그랬다. 이는 참 수상한 일이었다.
“난 능소각에서 왔어.”
이는 숨길 것이 없었다. 양준은 또 덧붙였다.
“아마도 내가 수련한 무공에 살의가 담겨 있는 데다가 그동안 많은 피를 묻혀서 너희들이 그렇게 느낀 걸 거야.”
“그랬구나.”
야청사는 생긋 웃더니 또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와 함께 다니지 않을래? 내가 옆에서 보호해 줄게. 깔깔…….”
“마음만 받을게.”
양준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떠나야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무승의와 진학서가 걸어왔다.
“잡담은 여기까지!”
무승의가 차가운 얼굴로 양준의 앞에 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진 형에게서 들었어. 능소각의 제자라고?”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무승의에게서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투에서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횡포함이 느껴졌다.
“맞아.”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