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6장. 거래를 하자
누구도 무리의 맨 뒤를 따르던 사람이 살그머니 모습을 감추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람은 무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방향을 틀어 다급히 뛰어갔다. 그 방향은 바로 양준이 떠나간 방향이었다.
양준이 가기 전에 단약을 내놓기는 했지만, 이곳에 수련하러 들어온 제자들 중에서 누가 몸에 단약을 한 병만 지니고 있겠는가? 더구나 양준은 산골짜기에 떨어져서 반년 넘게 길을 헤매다 이제 겨우 올라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반년 동안 전투도 별로 하지 않았을 테니, 다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치지 않았다면 당연히 요상단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단약이 더 있을 거야!’
이 사람은 무승의의 명령을 받아 양준을 죽이고, 그의 단약을 빼앗으러 가는 것이었다. 무승의는 일을 완벽하게 진행했다. 그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그 사람 하나만 보냈다.
*양준의 몸은 제비처럼 가벼워, 달려가면서 약간의 산들바람만 일으킬 뿐 나뭇잎 하나도 흔들어 떨어뜨리지 않았다.
양준은 몰래 주위를 경계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무승의 무리들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식을 알아내려던 목적은 이미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의 상황이 이처럼 심각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대로 이곳에 와서 수련하는 각 종문의 제자들은 모두 각자 싸웠다. 간혹 연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연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천랑국의 무인 몇 명이 나타나면서 대한의 무인들은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이는 전례가 없었던 일로, 이미 두 나라 젊은 세대 제자들 간의 사활을 건 한판 승부로 격상되었다.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이가 누가 될지는 양준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대한의 무인으로서 천랑국 무인들이 이곳에서 횡포하게 날뛰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수라문의 두 제자와 무승의만 아니었다면, 양준도 그곳에 남아 진학서 일행과 함께하면서 이번 싸움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도 별 도움이 안 되었다. 양준은 머릿속의 잡념을 빠르게 떨쳐 버렸다. 달려가던 중 양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음산해졌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생각하다가 섬뜩한 웃음을 짓더니, 바닥에 착지한 다음 큰 나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온몸의 기운을 거두었다.
잠시 뒤, 그림자 하나가 그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찰나였지만, 양준은 그자의 얼굴과 차림새를 똑똑히 확인했다. 그는 장검을 등에 메고 청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스물 남짓해 보였고, 외모는 차갑고 준수했다. 그는 양준이 떠난 방향을 따라 곧장 날아갔다.
양준은 슬그머니 코웃음을 쳤다. 이내 그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자는 바로 전장을 정돈하면서 혈주를 거두던 무인이었다. 등 뒤에 메고 있는 장검이 그의 신분을 말해 주었다. 그는 구성검파의 제자로 무승의의 사제이기도 했다. 무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고 양준을 뒤쫓아온 그의 속셈은 뻔했다.
양준의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그가 무승의와의 충돌을 피했던 것은 진학서와 서소어가 사이에 낀 채 난감해할까 봐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승의가 먼저 사람을 보내 자신을 해하려 하는데 양준도 더 이상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하물며 양준은 원래부터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앞쪽에서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성검파의 제자가 멀리 갔다가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급하게 달려가면서 주위를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그는 진원 경지의 고수였다. 속도 면에서 양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내 양준의 종적을 따라오다가 그만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다시 살펴보았지만, 도저히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양준도 의문이 들었다.
‘추적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군. 내내 조심하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잠시 뒤, 구성검파의 제자는 양준에게서 서른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양준은 조급해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어 몰래 그를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손을 뒤로 뻗자, 검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검을 손에 쥐더니, 기세가 더욱 상승하며 예리한 검처럼 날카로움을 드러냈다.
구성검파의 고수답게 과연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기세만 봐도 일반적인 진원 경지 무인에게서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순순히 나와라.”
제검성(齊劍星)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장검을 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양준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구성검파의 제자가 정말로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떠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검성이 이어 말했다.
"나도 너의 담대함에 감탄했어. 천하에 대사형하고 그렇게 말하는 이는 중도 8대 가문 공자들 외에, 아마 너 하나뿐일 거다. 그 용기를 높이 사서 절대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냥 네 몸에 있는 단약을 모두 나한테 넘겨, 대사형이 내준 임무를 완수하게 하면 돼."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자, 제검성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로 위협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넘겨. 내가 널 찾아내면 그땐 말로 해결하기 힘들 거야."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제검성은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이내, 그의 장검이 진동하자 맑은 울림 소리가 끊임없이 전해졌다.
양준은 사방에서 서늘한 기운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 얼굴빛이 변하더니 훌쩍 위로 뛰어올랐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검기(劍氣)가 가느다란 선처럼 종횡으로 교차되더니 사방 삼십 장 범위 내의 나무들이 순식간에 잘려 나가면서 일제히 아래로 와르르 쓰러졌다.
양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구성검파 제자의 악랄함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방금 전 계속 말을 하던 것은 바로 이 공격을 하기 위한 초석을 깔기 위해서였다.
제검성은 말하면서 이미 보이지 않는 검기를 주위에 가득 쳐 놓고 있었다. 양준이 이곳에 숨어 있는 한, 그가 검기를 움직이는 순간, 틀림없이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양준은 다행히 감이 예민한 덕분에 검기에 몸이 잘릴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 방어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기에 당했다면, 분명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양준은 놀란 마음을 달래며 감히 제검성을 얕잡아보지 못했다. 구성검파가 중도 8대 가문의 뒤를 잇는 세력으로 꼽히는 것도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었다. 종문의 최우수 제자들 역시 명성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음을 몸소 깨달았다.
"드디어 찾았다!"
제검성이 몸을 홱 돌리고는, 음산하게 웃으며 바닥에 착지하는 양준을 가소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여유 있게 양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이합 경지 7단계 무인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 그는 이등 문파의 제자 따위는 단 일격으로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은신술이 제법인데? 누구한테 배웠냐?"
제검성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양준의 은신술에 흥미를 느꼈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서 이런 은신술이 있다면 살길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그가 즉각 양준에게 손을 쓰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양준은 빙긋 웃었다.
"무슨 상관이야? 결국 들켰는데."
제검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감탄하는 마음과 탐욕이 숨겨져 있었다.
"네가 나한테 적의를 품고 있던 탓에 내 검이 너의 기운을 감지한 거지, 사실 나도 네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어. 한 번에 너를 찾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는 양준을 한껏 치켜세우고는 음침하게 웃었다.
"네가 영리하다는 건 인정할게. 내가 널 쫓아온 의도도 눈치챘겠지? 몸에 있는 단약과 은신술 공법을 넘겨.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날 이긴 것처럼 말하네?"
제검성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니라고 생각해?"
‘진원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잠시 뒤, 제검성은 웃음기를 거두고, 오만하게 말했다.
"관두자. 그냥 불구로 만들어 놓고 수련하는 방법을 얻어 내면 되지!"
말하는 사이, 그의 손에 든 장검이 진동했다.
수많은 빛줄기가 그의 앞에 부채 모양으로 펼쳐졌다. 차가운 빛줄기에서는 엄청난 살상력이 느껴졌다.
"가랏!"
제검성이 수련한 무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가 장검을 휘두르자 빛줄기가 번개처럼 양준에게 날아들었다.
빛줄기의 위협을 느낀 양준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빛도 달라졌다.
제검성은 대종문의 제자답게 어린 나이에도 수준급 실력이었다.
양준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빛줄기는 순식간에 양준에게 날아와 그의 몸을 꿰뚫었다.
제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양준에게서 은신술 공법을 알아낼 생각이었기에, 아직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여지를 남겨 두고 너무 강력한 공격을 쓰지 않은 것이었다.
곧이어, 제검성의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다시 한번 장검을 휘둘렀다.
빛줄기가 또다시 닥쳐오자, 양준은 하는 수 없이 직접 만든 보법을 펼쳐 아슬아슬하게 일격을 피했다.
"보법도 괜찮네? 이합 경지 7단계가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다니, 내가 수련하면 그야말로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일 거야. 이따가 보법도 같이 넘겨."
제검성은 흥분된 표정으로 '좋아'를 연발했다. 그는 두 번의 공격을 펼친 뒤, 더는 공격하지 않고 흥분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바로 선 다음, 그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내 은신술과 보법이 그리 탐나면 차라리 거래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