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8장. 자맥의 정체
양준은 그녀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을 뿐, 너무 과하게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꺼져!”
자맥은 양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냉산도 눈을 뜨고 두려움에 떨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둘 다 양준의 냉혹함을 잘 알기에 마음속으로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양준이 손쉽게 보내주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자맥은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오므리며 웃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여색을 지척에 두고 꿈쩍하지 않는 남자는 지극히 바른 성인군자를 제외하고는 한 가지 경우였다.
‘알고 보니 쟤가… 깔깔깔……!’
이 순간, 자맥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쾌감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녀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힘들게 억지로 참았다.
“왜 그냥 서 있는 거야? 셋을 셀 때까지 사라지지 않으면, 벌을 받고 싶은 거라고 생각할 거야.”
양준은 자맥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위협했다.
두 여자가 큰 나무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양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큰 나무 뒤, 냉산과 자맥은 몸을 숨기며 말없이 마주 보았다.
냉산은 화가 치밀어 눈동자에 온통 살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땅 위의 마른 풀을 거머쥐고 힘껏 꺾으며 악담을 퍼부었다.
“나쁜 놈, 짐승보다 못한 놈. 약한 여자나 괴롭히고.”
자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걔 앞에서 약한 여자라고 할 수 없지. 걔 실력이 우리보다 낮잖아. 게다가 우리가 먼저 나쁜 짓을 했어. 걔는 그냥 혼만 낸 거고.”
냉산은 자맥을 차갑게 쏘아보더니 화가 나서 말했다.
“너는 정말 이 상황이 조금도 개의치 않아?”
“깔깔…….”
자맥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만약 다른 남자였으면 화났을 거야. 근데 쟤는… 괜찮을 거 같아.”
“아예 자포자기했나 보군.”
냉산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맥은 그녀의 반응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비밀을 말해 줄게. 알게 되면 너도 절대 화나지 않을 거야.”
“무슨 비밀?”
냉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맥이 앞으로 다가가 몇 마디 속삭였다.
냉산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곧이어 얼굴에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네 말은… 쟤가 사내 구실을 못 한다고?”
냉산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쉿, 입 밖으로 내뱉지 마! 너만 알고 있으면 돼.”
자맥이 손가락 하나를 뻗어 냉산의 입을 막았다.
“너 어떻게 알았어?”
냉산은 호기심이 동했다. 처음으로 자맥이 친근하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연속 이틀 동안의 명상 수련을 통해 양준은 유혹과 충동을 물리쳐 심적 경지가 적지 않게 향상되었다. 그런 다음 계속해 노수인을 수련했다. 비록 매번 두 수인을 하나로 융합할 수는 없었지만, 어떠한 감각을 찾게 되었다. 전에 비해 많이 숙련된 듯했다.
이틀 동안 양준은 수많은 원기를 소모했다. 그러나 금신에 저장된 원기 또한 무궁무진했기 때문에, 이 정도 소모량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자맥과 냉산은 지금 한 무리의 요수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이틀 동안, 두 여자는 어떻게 보복해야 양준이 고통스러워할지를 논의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동의 적, 양준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서로 간에 많이 가까워졌다.
이때, 멀리서 양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인이 양준에게 다가섰을 때, 그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눈을 떴다.
두 여인은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이 며칠 사이 양준은 엄청난 양의 원기를 소모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주화입마에 빠질 기미까지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 양준은 원래대로 회복한 상태였고,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참 이상한 놈이야!’
두 여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에게 뭐 물어볼 게 있어.”
양준이 자맥에게 말했다.
“좋아.”
자맥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양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거리낌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뜻밖에도 냉산도 걸어와 양준의 다른 한쪽 옆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맥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몸이 약간 굳어 있었다.
양준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냉산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나, 그 표정이 우는 표정보다 더 어색했다.
양준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악독한 두 여자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서 적대감을 느낄 수 없었기에 구태여 더 따지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이 상황 판단을 잘해 더는 방자하게 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뭐든 물어봐, 주인?”
자맥은 고의로 가슴을 그의 팔에 갖다 대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크흠… 지금 뭐라고 불렀어?”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주인…….”
자맥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봉긋한 가슴에서 놀라운 탄력이 느껴졌다.
그 호칭은 양준뿐만 아니라 냉산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다른 한쪽에 있던 냉산은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맥의 뻔뻔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못 하겠어.’
자맥이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이름도 모르니 주인이라고 부르는 수밖에. 지금 내 목숨도 네 손에 달려 있으니 대갓집에 팔려 간 노비와 뭐가 다르겠어. 네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잖아…….”
그녀는 말하다가 수줍은 듯이 양준을 힐끗 바라보더니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이런 수는 나한테 안 통하니까 그만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부르는 게 아니니 듣는 나도 힘들어. 그리고 난 날 지키기 위해 너희들을 지배하는 거야. 너희들이 딴생각만 안 하면 괴롭힐 마음은 없어.”
양준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자맥은 잠깐 당황하다가 말했다.
“농담 좀 했어. 그럼 네 이름은 뭐야?”
“양준, 너희들은?”
두 여인은 각자 이름을 말했다.
양준은 냉산의 출신을 알고 있기에 더 알아볼 것이 없었다. 그는 자맥에게 흥미를 가졌다.
“너희 종문에 대해서 말해 봐.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네가 거짓말하면 나는 다 알아챌 수 있으니까.”
양준이 경고하며 말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자맥은 양준을 곱게 흘겨보고는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난 천랑국의 삼라전(森羅殿)이라는 종문에서 왔어. 들어봤는지 모르겠네.”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대한에 국한되어 있었다. 밖의 소식은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도리어 냉산이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너는 들어 봤나 봐.”
자맥이 가볍게 웃었다.
냉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천랑국에 있는 거대 세력이라고 들었어. 중도에 있는 8대 가문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나?”
양준도 깜짝 놀랐다. 자맥의 종문이 이처럼 이름난 곳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비슷해.”
자맥은 가볍게 웃으며 슬그머니 양준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는 천랑국의 공주야. 그러니 죽이지 않는 게 좋을걸. 나를 데리고 천랑국에 가면 부마라도 될지 어떻게 알아. 그럼 앞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거고, 깔깔깔…….”
양준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자맥은 톡톡 튀는 성격에 속셈이 많아 대처하기 어려웠다. 반면 냉산은 속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 자맥보다 훨씬 대처하기가 쉬웠다.
“우리들이 모두 삼라전에서 왔다지만, 전체 종문을 대표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우리 천랑국의 거대 세력을 얕잡아보면 큰일 나. 우리는 삼라전에서 파생된 작은 종문 출신이야. 주로 공혼충을 연구하지. 공혼충은 둘 다 경험해 봐서 알지?”
자맥이 말했다.
“너의 그 곤충들을 말하는 거야?”
양준이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
자맥은 양준의 무시를 알아듣고 화가 나서 말했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내가 키운 공혼충이 네 상대가 못 되었던 거야. 잘 키운 공혼충은 절대 열을 무서워하지 않아.”
“공혼충이 열에 약하구나.”
양준은 무심결에 정보 하나를 알아냈다.
자맥은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모두 털어놓았다.
“맞아. 공혼충의 천적은 열이야. 그래서 공혼충은 양성이나 화성(火性)을 수련하는 무인은 제어할 수 없어.”
이는 며칠 전 냉산이 자맥에게 양준이 양성 공법을 수련한다는 것을 말하자, 그녀가 곧장 양준을 공격하려 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그래도 공혼충이 쓸 만한 점도 있네. 적어도 너희 천랑국 무인들은 공혼충을 이용해 이곳을 장악할 수 있었잖아.”
양준은 무승의 일행 서른여 명이 막다른 궁지에 몰려 추적당하던 것을 떠올리면 왠지 씁쓸했다.
자신도 운이 좋아서 공혼충의 비밀을 알아냈으니 망정이지,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자맥과 싸웠더라면 요수 몇십 마리만으로도 그녀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점은 물론 많지. 우리는 공혼충으로 제어할 수 있는 요수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난 덕분에, 다른 요수나 대한의 무인들을 만나면 직접 나설 필요 없이 모두 죽일 수 있었어. 그렇지만 단점도 뚜렷해. 이를 테면 너 같은 사람을 만나면 공혼충이 타 버리는 순간, 본인의 신식까지 손상되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는 거지.”
자맥이 양준을 쏘아보며 말했다. 얼굴은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양성, 화성 공법을 수련한 사람들은 너희들이 우선적으로 죽여야 할 목표였겠군.”
양준이 한마디로 핵심을 꿰뚫었다.